<30>별루첨첨(別淚添添)

금봉은 아침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이 반찬 저 반찬 젓가락으로 집었다 놨다 하며 밥을 먹지 못했다. 그런 딸의 모습에 금봉 어머니는 가슴이 답답하고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불안했다. 조반을 마친 박달이 짐을 꾸리기 위해서 사랑채에 들자 금봉이 박달의 옷을 들고 사랑채로 들었다.

“이 옷으로 갈아입고 떠나세요. 어제 빨래해서 다렸어요.”

깨끗하게 세탁한 두루마기와 바지저고리 속옷 등을 내밀자 박달은 감격했다. 처음 늦은 밤 벌말에 올 때 산속을 헤매다 옷이 몹시 헤지고 찢어졌었는데 금봉이 고운 바느질 솜씨로 감쪽같이 기워놓았기 때문이다.

“고맙소. 천의무봉(天衣無縫)을 만들어 놓았구려. 직녀가 바로 이곳 평동에 있었구려.”

“서방님, 어서 갈아입으세요. 이제는 서방님이라 불러도 되겠는지요?”

금봉이 어렵게 ‘서방님’이란 말을 꺼내놓고 얼굴이 빨개졌다.

“서방님이란 말을 들으니 그대가 정녕 내 아내가 된 것처럼 보이는구려. 고맙구려. 마치 먼 길 떠나는 지아비의 안녕을 기원하는 아낙의 마음이 바로 그대의 마음일진대…….”

박달은 금봉을 꼭 안아 주었다. 금봉의 풍만한 젖가슴이 박달의 가슴에 밀착되었다. 갑자기 박달은 금봉을 다시 한번 안아 주고 싶었다. 선녀 같은 금봉이였다. 이제 헤어지면 몇 달 후 봐야 하기에 박달은 가슴이 아려왔다. 이대로 헤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박달은 실감하지 못했지만, 막상 떠난다고 하니 괜히 가슴이 허전했다. 박달은 이제 막 피어난 한 떨기 백합 같은 금봉의 손을 살며시 잡아 주었다.

“자, 이리 잠시 오구려.”

박달이 금봉을 아랫목으로 앉게 하고 꼭 안아 주었다.

“서방님, 어서 떠나셔야 하는데…….”

“잠시 좀 늦으면 어떻소.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그대를 사랑하고 싶어요. 이제 가면 삼 개월 후에나 그대를 볼 수 있으니 떠나기 전에 그대를 꼭 안아 보고 싶어요. 이리 와요.”

박달이 금봉의 섬섬옥수를 꼭 잡았다.

“밖에 아버님이 계신 데 어떻게…….”

박달은 어쩌면 영영 금봉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러나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아리따운 금봉을 천천히 내려다보면서 박달은 나쁜 생각을 떨쳐 버리고 싶었다. 박달은 가슴에 안긴 금봉은 박달의 가슴 뛰는 소리를 들으며 서러운 생각이 들어 울컥 울음이 나올 뻔한 것을 억지로 참았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기우(杞憂)일 거야. 내가 과거에 합격만 하면 나는 아름다운 금봉이와 부부가 되어 백년해로할 수 있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박달은 금봉의 촉촉한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속으로 나쁜 예감을 지우려고 애쓰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밖에서 금봉의 아버지가 사랑채 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박달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집안에 어른들이 있는지라 박달의 마음은 불안하였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이대로 남겨두고 떠나가야 하는 생각에 가슴이 쓰렸다.

“서방님-.”

“금봉이, 사랑하오.”

“소녀도, 서방님을 사랑한답니다. 이제는 서방님 없이는 단 하루도…….”

박달은 성스러운 사랑의 율동을 이어갔다. 금봉은 비록 아침에 치루는 은밀한 정사이지만 정성을 다해 박달의 요구에 응해 주었다.

‘서방님, 소녀 이대로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져도 좋으니 이대로 멈추고 싶어요. 왠지 서방님이 제 품을 떠나면 영영 다시 못 볼 것 같아요. 차라리 이대로 숨이 멈추었으면 좋겠어요.’

금봉은 숨을 죽인 채 박달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그의 욕망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박달의 짧은 외마디 소리를 내고 길고 거친 밭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금봉을 꼭 안아 주었다. 두 사람은 잠시 가쁜 숨을 고르면서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 폭의 정물화가 되었다. 비록 순식간에 치러진 정사(情事)였지만 박달과 금봉은 서로를 바라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방님, 이대로 죽고 싶어요.”

“무슨 소리요?”

박달 도령이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다시는 서방을 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불현듯 들어요.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정말로 과거시험에 합격하시면 평동으로 오실 거죠?”

“무슨 그런 소리를 다 하오? 내 과거에 합격하면 제일 먼저 평동으로 달려와 그대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준다고 했잖소. 행여 그런 생각일랑 절대로 하지 말아요.”

“죄송해요. 그러나 괜히 불길한 생각이…….”

“절대로 그런 나쁜 생각은 하지 말래도요. 내가 장원급제하여 그대를 보러오리다. 믿어주오. 사내는 일구이언을 하지 않는 법이오. 그러니 나를 믿고 기다려 주면 되오. 반드시 과거에 합격하여 달려오겠소. 걱정하지 말아요.”

“서방님, 이제 가시면 언제…….”

“울지 마오. 과거 보러 가는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 쓰오?”

“서방님-.”

박달은 금봉을 꼭 안고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울고 있는 금봉을 보니 박달은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지만, 대의를 위하여 그리고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없이 이별을 감수해야 했다.

“그대에게 약속하오. 늦어도 삼 개월 내로 그대로 보러 오리다. 그러니 절대로 마음 초조해하거나 다른 생각하지 말고 기다려 주오. 꼭 그대와의 약속은 하늘에 맹세코 지키리다. 꼭 지키리다.”

“서방님-.”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떨어질 줄 몰랐다. 사랑채로 든 딸이 오래도록 나오지 않자 최대호는 사랑채 앞에서 이리저리 바장이며 어쩔 줄 몰랐다.

“뭘 하느라 이리도 지체한단 말인가? 박도령이 금봉이와 정분을 나누나? 내가 문밖에 서 있는데. 험-.”

할 수 없이 최대호는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서방님, 어서 준비하고 나오셔요. 아버지께서 밖에 계신가 봐요.”

금봉이 눈굽이 퉁퉁 붓고 얼굴이 빨개져서 사랑채에서 나오자 최대호는 딸의 핼쑥해진 모습에 그만 가슴이 미어졌다. 딸의 등을 다독여 위로하고 싶었지만 차마 다 큰 딸을 어린아이처럼 다루기가 민망할 것 같았다. 금봉이 방에서 나오다 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여리디여린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견디어 낼까? 내가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 이러다 생떼 같은 딸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얘야, 박도령은 떠날 채비를 하고 계시니?”

“네에, 곧 나오세요.”

“마음 단단히 먹어라.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거란다. 박도령이 떠나면 적어도 삼 개월 후에 다시 온다고 하잖니.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네.”

“한동안 네가 적적하겠구나.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바람도 쐬고 마음을 편하게 갖도록 해라. 삼 개월은 길면 길고 짧다고 생각하면 짧은 게야. 기다리다 보면 박도령이 다시 올 테니…….”

“네, 알았어요. 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알았다.”

최대호는 멍하니 서서 운무 속에 모습을 감춘 이등령을 돌아보았다.

“어르신,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과거 끝나면 고향 가는 길에 평동에 들러 어르신께 인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구려. 박도령, 꼭 장원급제하시구려.”

“네. 두 분 안녕히 계십시오.”

이른 아침 마당에 네 사람이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었다. 만남은 곧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별은 또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는 것이다. 비록 닷새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박달은 정성을 다해 자신을 보살펴 준 금봉의 부모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고, 비록 부부는 아니지만 부부 이상으로 정이 든 박달과 금봉은 헤어지는 것이 가슴 아팠다. *계속

저작권자 © 남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