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성황신에게 빌다

“낭자, 그동안 정말로 고마웠어요.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요?”

박달이 금봉에게 다가가 작별의 인사를 건네자 금봉은 손가락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옆에서 부모가 지켜보지 않는다면 박달의 품에 안겨 펑펑 울고 싶었다. 박달 역시 말없이 훌쩍거리는 금봉을 안아 주고 싶었다.

“낭자, 얼른 가서 부엌칼이나 낫 있으면 가져와요.”

박달이 금봉에게 이상한 주문을 하였다.

“도, 도령님, 칼하고 낫은 어디에 쓰시게요?”

최대호가 외양간 벽에 꽂혀있던 낫을 가져와 박달에게 건넸다.

“이것은 내가 그대에게 줄 수 있는 정표랍니다.”

박달이 옷고름 잘라 금봉에게 주었다.

“도령님!”

금봉은 그만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만약 내가 보고 싶으면 이 옷고름을 꺼내봐요. 나로 생각하고요.”

박달이 건넨 옷고름을 받아든 금봉은 서럽게 흐느꼈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도령님, 이거…….”

이번에는 금봉이 낫을 들더니 물항라 저고리에서 빨간 옷고름 반을 잘라 박달에게 건넸다. 가까이서 두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던 최대호는 헛기침해댔고, 봉양댁은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도령님, 이 옷고름은 제가 보고 싶을 때마다 보세요. 저도 도령님의 옷고름을 항상 품속에 간직하고 있겠습니다.”

“낭자!”

박달은 금봉이 빨간 옷고름을 들고 마음이 무거웠다.

“박도령, 인제 그만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으이. 곧 해가 뜰 것 같은데…….”

“예, 어르신 알겠습니다.”

“금봉, 잘 있어요.”

“도령님-.”

“울지 말아요. 곧 다시 보게 될 터인데…….”

금봉은 곁에 부모가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잘 있어요. 내 장원급제하면 바람같이 달려와 제일 먼저 그대에게 알리겠소. 만약 좀 늦더라도 절대로 다른 생각하지 말고 나를 기다려 줘요.”

“도령님, 부디 몸조심하시어요.”

금봉은 간신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박달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박도령, 이거 받게.”

최대호가 도토리묵이 든 작은 보따리를 박달에게 내밀었다.

“어르신, 이게 무엇입니까?”

“한양 가는 길에 시장하면 들라고 도토리묵하고 주먹밥을 준비했어요. 산 넘고 물 건너 한양 가는 길에 많이 시장할 거요.”

최대호가 건넨 보따리를 받아 든 박달은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과거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벌말에서 금봉이와 살면서 한세월 보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어르신, 고맙습니다.”

“저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두 분, 안녕히 계십시오.”

“박도령, 잘 가시게.”

“도령님!”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박달이 금봉이에게 다가왔다. 이미 금봉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차마 쳐다보기 민망할 정도였다. 최대호가 큰기침을 서너 번 하고 난 뒤에야 금봉이와 박달은 떨어졌다.

‘도령님, 장원급제하세요. 저는 밤낮으로 도령님의 장원급제를 위하여 천지신명님에게 빌겠습니다.’

‘금봉이, 고마웠어요. 그대와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리다.’

두 사람은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박달이 길을 떠나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금봉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얘야, 뭐하니. 박도령을 동구 밖까지 배웅하지 않고?”

“아버지!”

“그래. 어서 다녀오렴.”

산안개가 자욱한 길에 박달이 앞서서 걷고 그 뒤로 금봉이 따랐다. 이른 아침이지만 추수철이라 마을 사람들이 볼까 봐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인제 그만, 들어가요. 아버님, 어머님이 걱정하실 텐데…….”

“서방님!”

금봉은 흐르는 눈물을 닦느라 제대로 박달을 바라보지 못했다.

“바보같이, 울기는…….”

“서방님, 다시 오실 거죠? 꼭 소녀를 다시 찾아오실 거죠? 꼭”

“바보, 그럼 다시 오지 않고. 내 과거에 합격하면 제일 먼저 그대에게 달려온다고 했잖소. 넉넉잡고 삼 개월만 기다려 주오. 천지신명님께 약속하오.”

박달은 금봉이의 손을 잡고 약속을 하였다. 눈물로 범벅이 된 금봉이 잠시 화사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살포시 미소 짓는 금봉의 모습에 박달 도령은 그만 눈물을 보일 뻔하였다.

“저는 오늘부터 서방님을 다시 뵐 때까지 편히 잠도 자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천지신명님께 서방님의 장원급제를 위하여 기도만 올릴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꼭 장원급제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안 돼요. 내 걱정하지 말고. 잘 먹고, 잘 자야 해요. 그리고 건강하게 지내야 다시 나를 볼 때 나도 기분이 좋지요. 내 걱정 너무 하지 말아요. 그대와 이곳 벌말에서 보낸 닷새가 마치 백 년을 보낸 것 같아요. 절대로 안정을 취하며 건강하게 지내야 하오.”

박달은 동구 밖 장승이 서 있는 삼거리에서 금봉을 꼭 안아 주었다.

“잘 있어요. 내 꼭 장원급제하면 바람처럼 달려와 그대를 은애할 거요. 그때까지 몸 성히 잘 있어요. 내가 만약 약간 늦더라도 다른 생각하지 말고 기다려 주오.”

박달의 팔에 힘이 들어가면서 금봉은 박달의 품에 꼭 안기며 흐느꼈다.

“서방님.”

“잘 있어요.”

박달이 앞서서 걸으려고 하자 금봉이 박달을 따라나섰다.

“서방님, 저도 따라가겠어요.”

“아니 되오. 난 과거를 보러 가는 몸이오. 그대를 데리고 한양에 갈 수는 없어요. 집에서 기다리는 부모를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아니 되오. 어서 돌아가요. 이러면 한양으로 향하는 나의 발길이 무거워요. 내가 편안한 마음으로 한양으로 갈 수 있도록 해줘야 해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요.”

박달이 금봉을 설득하였으나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서방님, 저 앞산까지만 배웅할게요.”

금봉이 안개에 묻혀있는 산을 가리켰다.

“저 산까지 갔다가 언제 다시 오려고요?”

금봉의 간절한 바람에 박달은 할 수 없이 함께 가기로 했다. 한참을 걸으니 어제 두 사람이 다녀갔던 서낭당과 비슷한 당집이 나타났다. 그 옆으로 수백 년은 족히 된 듯한 느티나무가 버티고 서 있었다. 금봉은 박달과 함께 당집 앞에 서서 서로의 손을 잡고 성낭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서낭신님, 박달 서방님께서 부디 과거에 장원급제하도록 도와주세요. 서방님께서 장원급제하셔야 하옵니다. 소녀의 마음은 이미 서방님에게 있습니다. 소녀가 앞으로 밤낮으로 빌고 또 빌 테니 우리 박달 서방님께서 이번 과거에 꼭 장원급제하실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빌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서낭신님, 이번 과거에 장원급제하도록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금봉이와 한 백 년 살 수 있도록 해주소서. 비나이다.’

금봉은 수없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가며 서낭신께 간절히 비손하였다.

“금봉이, 이제 그만 해요. 서낭신께서도 그대의 정성에 탄복했을 거요.”

금봉의 성낭신에게 자신의 금의환향을 위하여 기도하자 곁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박달은 콧등이 찡해오면서 가슴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앞산까지 갔다가 혼자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요.”

박달이 금봉의 손을 꼭 잡고 마치 아이들이 소풍을 가는 것처럼 기분이 들떠있었다. 들길 옆으로 꿩이 푸드덕 날아오르고 노루 한 쌍이 두 사람 앞을 가로질러 숲속으로 달아났다.

“서방님. 지난 며칠이 꿈만 같아요.”

금봉이 밝은 얼굴로 생글생글 웃기까지 하였다. 이른 아침이지만 다행히 들길을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아침 이슬에 촉촉이 젖은 들꽃들이 두 사람의 발을 적셔주었다.

“꿈? 꿈이라…….”

“네. 꿈속에 나타났던 서방님을 뵌 것과 서방님과 제가 단둘이 백년가약을 맺은 것 그리고 서방님이 저를 은애해 주신 것들이 모두 잠시 낮잠을 자는 동안 꾼 달콤한 꿈같아요.”

“이건 분명히 현실이오. 내가 지금 그대의 손을 꼭 잡고 한양을 향해 걷는 이 순간이 꿈이 아니고 현실이오. 절대로 꿈이 아니오. 앞으로는 그런 말 하지 마오. 이건 현실이오.”

“아닌 것 같아요.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저에게는 그저 꿈만 같은 걸요. 저도 꿈이 아니길 바라요. 그러나 꿈속의 임이 실제로 나타났다는 것이 저는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그리고 그것이 다시 꿈이 되어 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생긴답니다.”

“아니요. 그대와 나는 분명 이전부터 인연이 닿았던 거요. 전생의 인연이 금생에서 다시 맺어진 것이 분명하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꿈속의 사랑이 현실에서 맺어질 수 있겠소. 그대와 나는 생전에 하늘나라에서 부부로 지냈던 것이 분명해요.”

박달은 금봉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부부라는 말을 꺼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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