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박달을 위한 비손

“서낭신님, 박달 서방님께서 부디 이번 과거에 장원급제하도록 도와주세요. 서방님께서 장원급제하셔야 하옵니다. 소녀의 마음은 이미 서방님에게 있습니다. 소녀가 앞으로 밤낮으로 빌고 또 빌 테니 우리 박달 서방님께서 이번 과거에 꼭 장원급제하실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빌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서낭신님, 이번 과거에 장원급제하도록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이 처자와 한 백 년 살 수 있도록 해주소서. 이렇게 빌고 또 비나이다.‘ 박달 도령과 금봉낭자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가며 서낭신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박달 서방님이 이번 과거에 장원급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금봉낭자는 합장하고 계속해서 서낭신을 바라보며 기도를 하고 진심으로 박달 도령의 과거 합격을 기원하였다.

“금봉낭자, 이제 그만해요. 서낭신께서도 그대의 정성에 탄복했을 거요. 이제 그만해요.”

끊임없이 금봉낭자는 성황당을 향해 자신의 금의환향을 위하여 기도하자 곁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박달 도령은 콧등이 찡해오면서 가슴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자, 어서 가요. 저 앞산까지 갔다가 혼자 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거요.” 박달 도령이 금봉낭자 손을 꼭 잡고 마치 아이들이 소풍을 가는 것처럼 기분이 들떠있었다. 들길 옆으로 꿩이 푸드덕 날아오르고 노루 한 쌍이 두 사람 앞을 가로질러 숲속으로 달아났다.

“서방님. 지난 며칠이 꿈만 같아요.”

금봉낭자 밝은 얼굴로 생글 생글 웃기까지 하였다. 이른 아침이지만 다행히 들길을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아침 이슬에 촉촉이 젖은 들꽃들이 두 사람의 발을 적셔주었다.

“꿈? 꿈이라......”

“네에. 꿈속에 나타났던 서방님을 뵌 것과 서방님과 제가 단 둘이 백년가약을 맺은 것 그리고 서방님이 저를 인애해 주신 것들이 모두 잠시 낮잠을 자는 동안 꾼 달콤한 꿈같아요.”

“이건 분명히 현실이오. 내가 지금 그대의 손을 꼭 잡고 한양을 향해 걷는 이 순간이 꿈이 아니고 현실이란 말이오. 절대로 꿈이 아니오. 앞으로는 그런 말 하지 마오. 이건 현실이오.”

“아닌 것 같아요.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저에게는 그저 꿈만 같은 걸요. 저도 꿈이 아니길 바래요. 그러나 꿈속의 임이 실제로 나타났다는 것이 저는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그리고 그 것이 다시 꿈이 되어 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생긴 답니다.”

“아니오. 그대와 나는 분명 이전부터 인연이 닿았던 거요. 전생의 인연이 금생에서 다시 맺어진 것이 분명하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꿈속의 사랑이 현실에서 맺어질 수 있겠소. 그대와 나는 생전에 하늘나라에서 부부로 지냈던 것이 분명해요.” 박달 도령은 금봉낭자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부부라는 말을 꺼냈다.

“어머나? 그게 정말이지요? 서방님, 그 말씀 믿어도 되는 거지요?”

“그럼. 믿어도 되고말고요.”

“서방님, 고마워요.” 해가 중천에 왔을 때 두 사람은 들판을 건너고 산을 넘어 걸음을 재촉하였다. 야트막한 어느 산 정상에 섰다. 파란 하늘과 누렇게 물든 산이 병풍처럼 둘러 쳐져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한바탕 불면서 우수수 가랑잎이 날렸다.

“자아, 이제 돌아가요. 그대를 혼자서 돌아가게 하는 것도 걱정이 되는구려.”

“서방님, 제 걱정하지마시고 어서 가세요.”

“아니오. 그대 먼저 내려가는 걸 보고 떠나겠소.”

“아니에요. 서방님, 서방님은 갈 길이 먼걸요. 어서가세요. 제가 서방님이 안 보일 때까지 여기 서있을게요.”

금봉낭자는 박달 도령이 먼저 가라고 손짓을 하였다.

“그럼, 내서 셋을 세면 우리 동시에 서로의 갈 방향으로 가도록 해요.” 박달 도령이 손가락을 펴서 엄지부터 세기 시작하였다.

“자 ,하나, 둘, 셋.”

“서방님, 흐흐흐 흐흑......”

금봉낭자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금봉낭자, 울지마오. 그대의 흐느낌 소리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소.”

“서방님, 절 받으세요.”

금봉낭자는 울면서 박달도령에게 절을 하려고 하자 박달도령은 얼른 금봉낭자의 손을 잡고 말렸다.

“아니, 우리가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들 같이 왜 그러오?” 아무리 박달 도령이 금봉낭자에게 만류하여도 금봉낭자는 말을 듣지 않았다.

“부디 장원급제하시고 저를 잊지 마세요. 만약, 만약 서방님과의 사랑이 이승에서 이루어 지지 않는다면 저승에서라도 반드시 서방님과의 사랑을 이룰 것입니다. 서방님, 부디, 부디 장원급제하세요.”

금봉낭자가 박달 도령에게 절을 하자 박달 도령은 금봉낭자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서방님, 꼭, 꼭 장원급제하세요. 소녀, 매일은 아니더라도 북녘하늘이 시원하게 보이는 저 시랑산 이등령에 올라 서방님을 생각할거예요. 시랑산 산신령님께 서방님의 장원급제와 무사안일(無事安逸)을 위하여 기도 올리겠어요. 서방님께서도 저를 잊지 마셔요.”

“그대를 생각해서라도 내 꼭 합격할 테니 나만 믿어요. 곧 돌아올 거요. 어서 돌아가요. 혼자서 벌말까지 가려면 한참 동안 가야할거요.”

“서방님, 흐흐흐 흐흐흐......., 서방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요. 흐흑 -”

“어서 돌아가야 하오. 아버지 어머니께서 걱정하실 거요.”

금봉낭자는 박달 도령에게 절을 하고 돌아서면서 통곡하였다. 금봉낭자는 박달도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금봉낭자의 물항라 저고리와 붉은 치맛자락이 바람에 펄럭거렸다.

“금봉낭자, 잘 있어요. 꼭 장원급제하여 그대를 보러 오리다. 삼 개월만 기다려 주오. 꼭 삼 개월 후에 그대를 보러 오겠소. 금봉낭자 -, 잘 있어요-” 박달도령이 돌아서서 자신을 향해 가녀린 손을 흔들고 있는 금봉낭자를 향해 소리쳤다.

“서방니임-, 꼭 장원급제 하셔야해요.”

금봉낭자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박달도령을 향해 하얀 손을 흔들며 울먹였다.

“금봉낭자, 잘 있어요. 어흐흐흐흐흑 -” 박달도령은 그만 참던 울음을 터트리며 잠시 길 옆으로 서서 눈물을 닦았다.

“서-방-니-임 -”

바람결에 금봉낭자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박달도령이 눈물을 닦고 뒤를 돌아보니 금봉낭자의 붉은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뛰어오고 있었다.

“아니, 왜요?”

박달 도령이 놀란 얼굴로 금봉낭자를 바라보았다.

“서방님, 저도, 저도 데려가 주세요.”

“안 됩니다. 집에 아버지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세요.“

“싫어요.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제가 서방님 곁에 있으면서 빨래하고 밥 지으면서 서방님 뒷바라지를 하겠어요. 저 혼자 벌말에 남아서 할 일이 없어요. 서방님 없이 전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제발,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제발요. 으흐흐 흐흐흐......”

“안 돼오. 한양에 집도 절도 없는 데 어디서 빨래하고 밥을 짓는단 말이오? 어서 돌아가요. 집에서 부모님이 기다려요.”

“싫어요. 이렇게 서방님과 헤어지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아요.”

“바보, 내가 수백 번도 더 약속했잖소. 과거에 합격하면 그대에게 꼭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요. 삼 개월 정도면 충분하오. 그때까지 내가 준 옷고름을 위안삼아 기다려주오.”

“서방님, 으흐흐흐......”

“어서가요. 날씨가 꾸물거리는 것을 보니 곧 비가 내릴 듯하오. 어서요. 나도 그대를 이렇게 놔두고 가는 발길이 가볍지 않아요. 서쪽 하늘이 꾸물거리는 것으로 보아 곧 비가 내릴 것 같아요. 더 오래있다가는 집에 갈 때 비를 맞을 수 있어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오."

박달 도령은 같이 가겠다고 울며불며 따라오는 금봉낭자를 간신히 떼어 놓고 고개를 넘었다.

‘서방님, 부디, 부디 장원급제하셔야 해요.’

“서-방-니-임-”

점점 희미하게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박달을 향해 금봉낭자는 소리쳤다. 금봉낭자의 애절한 목소리는 재를 휘감고 하늘 높이 치솟는 바람을 타고 계곡에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금봉낭자가 박달도령을 부르는 소리가 얼마나 간절하고 애달픈지 산새들도 숨을 죽이고 금봉낭자의 애끓는 목소리에 그만 침묵하고 있었다. 박달도령도 금봉낭자를 향해 손을 흔들다 말고 다시 눈물을 쏟고 말았다. 비록 닷새간의 든 정이었지만 평생을 함께 한 부부처럼 정이 새록새록 들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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