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장원급제의 꿈

“서방니임 -, 기다릴게요. 꼭 돌아오셔야 해요. 매일 서방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도드릴게요.”

“금봉이 -, 잘 있구려.”

박달은 북쪽을 향해 걸으면서 금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의 눈물이 이별이 있었던 이등령 고개에 차가운 가을바람이 불면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금봉이 서둘러 벌말로 돌아오다가 다시 당집 앞에 섰다. 산신령 같은 느티나무가 금봉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봉이 길가에 있는 돌멩이 서너 개를 집어 돌무덤 위에 살며시 얹어놓았다. 서낭당에도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비바람이 불었다. 비바람이 불 때마다 느티나무와 참나무에서 가랑잎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주변이 어두컴컴해 지면서 늦가을의 쓸쓸함을 더해주었다. 금방이라도 나무귀신이나 도깨비들이 우르르 몰려나올 것만 같았다.

“서낭신님! 박달 도령님께서 무사히 들을 건너 산을 넘을 수 있도록 굽어 살펴주세요. 글만 읽던 도령님이시라 생전 처음 가는 낯선 들길과 산길이 위험할 수도 있을 겁니다. 도령님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무탈하게 한양까지 가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 소녀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서낭신에게 지성을 드린 금봉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다리에 힘이 빠지고 후들거렸다. 금봉은 돌무더기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랑잎이 바람에 날려 빙빙 돌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금봉은 지난 닷새 동안의 꿈같았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되새김해 보았다.

‘도령님은 나와 전생부터 인연이 있었음이 틀림없어. 어떻게 꿈속에서 뵌 분을 현실에서 실제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얼굴 하며 풍채, 목소리까지도 꿈속에서 뵈었던 그분과 하나도 다른 게 없었어. 내가 그분과 맺은 정분도 이미 예정된 거나 다름없었어. 그렇다면 우리의 만남은 이미 천지신명께서 마련하신 거야. 영남의 총각과 충청도 처녀와 연분을 천지신명께서 주관 하신 거야.

물레방앗간에서 맺은 인연도 예정된 거였어. 그날 밤 도령님과 첫 정사를 생각만 하여도 짜릿해. 혹시 아버지나 어머니께서 알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 모르실 거야. 달님과 천지신명님 밖에는 아무도 그날 밤의 일을 모를 거야. 도령님이 이번 과거에 꼭 합격하셔야 할 텐데. 도령님이 나라님이 하사하는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벌말로 나를 찾아오시면 아버지 어머니는 좋아서 춤을 추실 것이고 동네 사람들도 나를 부러워하겠지. 특히 갑돌이와 수돌이가 어떤 얼굴들을 할까?

갑돌이가 어릴 때부터 나를 무척 좋아하는 눈치였는데 내가 만약 박달 도령님과 혼인을 한다면 크게 실망하겠지? 수돌이는 울고불고 난리를 칠지도 몰라. 그러나 과거에 합격한 박달 도령님에 비하면 그 두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산골에 묻혀 평생 땅이나 파먹고 사는 사내를 믿고 한세상 살기 싫어. 박달 도령님을 따라 대처에 나가 보란 듯이 잘 살고 싶다고. 꼭 그런 날이 올 거야. 삼 개월만 참으면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그 삼 개월을 어찌 참아야 하나? 석 달 안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데. 혹시 도령님이 한양에 눌러앉아 나를 찾지 않으면 어쩌지?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어찌해야 하나? 아니야, 괜한 걱정일 거야. 도령님은 떠나기 전에 나에게 수십 번도 더 약속했어. 저 시랑산에 눈이 녹으면 도령님이 오시겠지.’

금봉은 차가운 비를 맞으며 손금이 다 닳도록 서낭신께 지성으로 빌며 박달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였다. 금봉은 비가 그치자 시랑산 자락을 헤매며 박달과 함께 걷던 길을 걸어보기도 하고 북녘 하늘을 올려다보며 박달을 불러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메아리뿐이었다. 배고픈 것도 잊고 금봉은 산으로 들로 마치 정신 나간 여인처럼 쏘다녔다. 평동과 시랑산에 어둠이 내리고 나서야 금봉은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금봉이 평동에 도착할 때쯤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하였다. 비를 흠뻑 맞고 금봉이 집으로 돌아오자 최대호와 봉양댁은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은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들에도 나가지 않고 온종일 집에 있었다. 사위를 혼자서 먼 길 떠나도록 한 것 같아서 최대호는 울적한 심사를 술로 달래고 있었다. 최대호에게 박달은 생각할수록 아까운 사내였다. 훤칠한 외모와 풍채도 그렇고 특히 글을 쓰고 읽을 줄 아는 선비라는 점이 최대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박도령은 잘 갔니? 비를 흠뻑 맞았구나. 찬비를 맞아 몸에 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아버지. 괜찮아요. 도령님은 잘 가셨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셔요. 지금 사오십 리쯤 가셨을 겁니다.”

금봉은 퉁퉁 부은 눈으로 간신히 대답하였다.

“얘야, 이리 와서 앉아봐라.”

봉양댁이 두 눈이 퉁퉁 부은 상태로 멍하니 앉아 있는 딸을 불렀다. 며칠 전부 터 물어볼까 말까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딸을 불렀다.

“너, 솔직히 말해보렴. 너, 박도령과 어떤 사이니?”

“어머니…….”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질문에 금봉은 손가락을 물고 주저주저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봉양댁은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딸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금봉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대꾸가 없었다.

“괜찮아. 엄마가 가만히 보니 너와 박도령이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 어디까지 간 거야?”

“어머니…….”

금봉이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최대호를 흘낏 한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최대호는 모녀의 이야기를 듣고 북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 엄마한테 말해봐. 너하고 그 박달 도령하고 어떤 일이 있었던 게야?”

“어머니,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었어요.”

금봉은 한참 만에 겨우 한마디 하였지만 개운하지 않은 듯했다.

“그 도령과 아무 일도 없다던 애가 잠도 안 자고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천지신명에게 지성을 드렸니? 내가 보기에는 너와 그 도령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게 분명해. 엄마에게 못할 말이 어디 있어.”

‘아아, 어머니가 다 보셨구나. 이 일을 어쩌나?’

금봉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너와 그 도령이 밤에 같이 다니는 것을 동네 사람들이 본 모양이야 이것아. 사람들 눈이 얼마나 무서운데 박도령과 동네를 돌아다닌 거야 그래?”

“어머니, 박달 도령님과 두 번 바람 쐬러 개울가에 다녀왔을 뿐이에요. 도령님과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네가 밤에 그런 행동을 하니까 그 도령과 눈이 맞았다는 둥 정분이 났다는 둥 내 귀에까지 이상한 소문이 들리는 거야.”

“누가 그런 소문을 냈대요?”

“이미 소문이 동네에 파다하게 퍼졌는데 누가 말한 게 뭐가 중요하니?”

“어머니,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야? 정말 아무 일도 없던 게 분명한 거니?”

“네.”

금봉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간신히 대답하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얘, 왜 눈물을 흘리는 거니? 어디 아파서 그러니?”

“비를 맞아서 그런지 마음도 아파요.”

“괜히 마음이 왜 아파?”

“저도 모르겠어요.”

‘어이구, 이것이 무슨 일을 낸 게 분명하구나.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잘못되는 날이면 우리 집안은 망신살이 뻗칠 텐데…….’

봉양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마음이 착해 과객을 스스럼없이 재워 주는 남편의 처사가 얄미웠다. 봉양댁이 술잔을 기울이는 남편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먼 하늘만 바라보며 눈만 슴벅거릴 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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