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남한강을 거슬러 오르다

“금봉아, 넌 내 딸이기 때문에 이 엄마는 박도령과 너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해. 그러니 안심하고 자세히 말해보렴. 난 네가 이제껏 한 번도 남자들에게 서방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어. 내가 언뜻 들으니 네가 박도령에게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어머니…….”

“어미와 딸 사이에 못할 말이 어디 있니? 금봉아, 속 시원하게 말해보렴. 박도령과 어떤 일이 있었던 거니?”

“어머니,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이것아, 너는 처녀야. 시집 안 간 처녀가 함부로 몸을 놀리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러니?”

“어머니,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리고 마땅히 부를 호칭이 없어서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불렀어요.”

‘아, 애가 지금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틀림없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어.’

“그래, 네가 아무 일 없었다고 하니 나도 그리 믿겠다. 그러나 여자의 행동은 곧 표시가 나타난단다.”

‘표시? 그 표시가 무엇일까?’

금봉은 어머니의 말뜻을 금방 알아듣지 못하고 손가락만 물어뜯고 있었다.

“피곤할 테니 그만 저녁 먹고 쉬어라.”

간신히 어머니의 날카로운 질문 공세를 피한 금봉은 혼자 늦은 저녁을 들면서 박달이 어디쯤 갔을지 궁금했다. 이미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으니 들판을 건너고 산을 넘어 상당히 먼데 있는 어느 주막에 들어 있을 것 같았다. 금봉과 헤어진 박달은 부리나케 걸어 산척(山尺)을 지나 목계(牧溪) 나루터에서 배를 탔다. 자주 있는 배가 아니지만, 박달이 탄 배는 충주와 여주를 통과하여 양평의 두물머리를 지나 한양의 마포나루로 갈 참이었다. 박달은 배로 가면 족히 십여 일 내로 한양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였다.

'서방님께서 무사하실 테지. 서방님과 헤어진 지 이제 하루도 안 되었건만 왜 이리 내 가슴이 아플까? 조금 전에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일까? 여자의 행동은 곧 표시가 나타난다? 여자의 행동이라? 그게 무슨 뜻일까?‘

금봉은 어머니의 말을 생각해보아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헤어질 때 눈물 어린 박달의 모습에 금봉은 가슴이 아려왔다. 헤어지기 싫어하는 박달에게서 금봉은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금봉이, 보고 싶소. 헤어진 지 하루 만에 이리도 사무치도록 그대가 보고 싶다오. 그대는 분명 나의 인연이 틀림없다고. 나는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때 알아보았소. 그대와 나는 이미 전생부터 인연의 끈으로 단단히 묶여있다는 사실을 말이오. 이제 그 길고 긴 인연이 어렵게 맺어졌으니 세세연년 우리의 아름다운 관계의 끈을 이어가야 하오. 이번 과거에 합격하면 고향에 계신 어머님에게 말씀드려 그대를 내 배필로 할 것이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주변에 머물며 어정거리던 수많은 여인이 나에게 온갖 유혹을 해왔지만 나는 과감하게 그 유혹들을 물리쳤어요.

이제 생각해보니 그 모든 유혹이 내가 그대를 만나기 위한 일련의 시험이었던 것 같소. 다행히 그 유혹을 물리쳐 그대를 만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르겠소. 그대처럼 어여쁘고 착한 며느릿감을 어머님이 보시면 크게 기뻐하실 거요. 저 산새와 물새들이 짝을 이루어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있는 것처럼 내가 과거에 합격하면 나와 그대도 저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고 행복할 거요. 그대는 나와 천생연분이 틀림없어요. 그날 밤, 물레방앗간에서 그대와 첫 입맞춤은 너무나 황홀하고 감격스러웠소. 세상에 태어나 진정으로 여인을 알 수 있었던 기회였어요. 그대는 선녀보다 더 어여쁘고 달콤한 여인이 틀림없다오.

난, 그날 밤만 생각하면 행복하다오. 내가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면 그대와 혼인하여 한세상 행복하게 살 것이오. 그 어느 부부들보다 재미있고 깨가 쏟아지는 알콩달콩한 삶을 살 거요. 그대가 지금도 나의 입신양명을 위하여 천지신명에게 간절히 빌고 있을 테지요. 천지신명께서 그대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소원을 들어주실 거요. 정말로 감사하오. 내 그대에게 약속하였듯이 과거에 합격하면 제일 먼저 평동으로 달려가 그대와 합격의 기쁨을 누릴 것이오. 그러니 넉넉잡고 석 달만 기다려 주오.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평동으로 달려가리다. 그리하면 그대 부모님도 나를 사윗감으로 받아 들일거요.’

박달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을 하다가 곧 찌푸리기도 하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하루가 지났지만 금봉은 싱숭생숭한 상태로 방에만 들어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운 사람이 곁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절감한 금봉은 수백 수천 번 박달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금방 하루해가 지고 밤이 되었다. 금봉은 전전반측하다 부모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방안에 정화수를 떠다 놓고 빌기 시작하였다.

“천지신명이시여, 박달 서방님이 무사히 한양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소녀, 이렇게 빌고 있나이다. 우리 박달 서방님이 무사히 한양에 도착하여 과거에 장원급제하면 모든 공덕을 천지신명님께 돌리겠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께 비나이다. 우리 박달 서방님이 무사히 한양에 도착하도록 도우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강을 건너면 행여 강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옵고, 산을 넘을 때 산짐승에게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옵고, 이상한 여인들이 박달 서방님을 유혹하려 들면 그 붉은 입술을 멀리하게 도와주시옵고, 천둥 번개가 치는 날이면 고요를 주시어 박달 서방님이 편안히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고, 하루 세끼 따뜻한 밥을 드실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고, 항상 총기를 맑게 하여 공부가 머릿속에 쏙쏙 들어가도록 주와 주시옵고, 행여 여인이 생각나면 오로지 이 소녀만을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고, 과거 볼 때 시험과제를 보면 훌륭한 정답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천지신명님께 빌고 또 비옵나이다.”

금봉은 밤이 이슥토록 천지신명에게 빌고 빌었다.

“이보시오 도령! 보아하니 과거를 보러 가는 듯하외다?”

박달이 목계나루에서 배를 탈 때부터 관심이 있던 선비였다.

“그렇습니다. 형씨도 과거 보러 가시는지요?”

“그렇소. 우리 통성명이나 하고 지냅시다. 나는 청풍사는 김청이라하오.”

“풍산(豐山) 사는 박달이라 합니다.”

김청이 먼저 손을 내밀자 박달도 얼른 손을 내밀어 악수하였다. 김청이라는 사내는 곱상하게 생기기는 하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세상의 때가 많이 묻은 듯 했다. 나이는 박달보다 서너 살 위로 보였다.

“선달님, 저는 이 뱃길이 처음입니다. 한양까지 얼마나 걸리는지요?”

“글쎄요. 이 배는 정기적으로 다니는 배가 나이라서 나도 정확히는 모르오. 길면 한 열흘 짧으면 이레 정도 걸리지 않을까 합니다. 만약 동남풍이 솔솔 풀어주면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겠지요.”

앞뒤로 황포돛대가 설치된 평저선(平底船)에는 사오십 명이 타도 족히 될 듯 커 보였다. 배는 복층으로 되어있어서 내부에는 밤에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협소해 보였다. 갑판에는 옹기며 대나무로 만든 생활용품과 추수한 농산물이 가득 실려 있었다. 낮에는 햇볕을 피해 포장 아래 앉아 비스듬히 눕거나 그림처럼 펼쳐진 산수화 같은 산천을 구경하는 일이 고작이었다. 배에는 뱃일을 하는 사람 서너 명 하고 상인, 농민, 선비 등 삼십여 명이 타고 있었다. 도포를 정제하고 갓을 쓴 사람은 박달과 김청 두 사람 뿐이었다.

“박도령, 과거 준비는 많이 하시었소?”

“많이 라뇨? 겨우 천자문을 떼고 사서삼경 제목만 읽어본 걸요.”

“너무 겸손한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지요.”

“선달님은요?”

“나 역시 공맹(孔孟)과 잠시 친분을 나눴을 뿐이라오.”

김청의 말투에서 그가 한양을 수시로 다녔다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는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에 가는 것이 아니라 풍류를 즐기러 가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배는 천천히 북서 방향을 향해 유유히 흘러갔지만, 박달은 벌말에서 여러 날을 머물러 마음이 조급했다. 그러나 배 위에서 뛸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하는 수없이 사공의 완력과 바람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점심때가 지나서 출발한 배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이런 속도로 가다가 어느 세월에 한양에 도착하나 하는 조급함이 일었다. 박달이 평동에서 닷새를 머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양평이나 한양 근처까지 다다랐을 것이었다.

‘괜히 배를 탔나? 충주, 장호원, 이천, 용인을 거쳐 걸어갔더라면 더 빠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스승님이 산척이나 충주쯤에서 배를 타면 걷는 것보다 더 빠를 수도 있다고 하셨어. 하지만 이미 뱃삯도 주었으니 되돌려 받을 수도 없고 누워서 잠이나 자자.’

박달이 볏 가마니에 기대어 잠시 눈을 붙였다.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와 폐부 속까지 시원하게 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 쳥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

 

나이 지긋한 뱃사공이 부르는 노랫가락에 박달은 눈을 떴다. 구성진 사공 노랫소리가 나그네 마음을 울적하게 했다. 김청은 뱃머리에 앉아 젊은 사공과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것으로 보아 꽤 친분이 있는 것 같았다. 김청이 박달과 시선이 마주치자 오라고 손짓을 하였다. 박달 손사래를 쳐도 김청은 계속해서 박달에게 손짓을 하였다.

“이렇게 산천경개가 빼어난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눈앞에 보면서 어찌 술 한 잔이 생각나지 않겠소?”

김청은 자신이 풍류객이라도 된 것처럼 연신 술잔을 기울이며 옛시조를 읊기도 하고 흥에 겨워 노래도 부르며 신바람이 난 듯했다.

“자, 박달 도령도 한 잔 하시오.”

김청은 뱃사공들이 일하면서 목을 축이기 위하여 준비해 온 탁주를 마치 자신의 것 인양 막사발에 한잔 기득 부어 박달에게 건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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