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놀이
 

주요한(1900~1979)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江물 위에 스러져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가는 사람소리······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위에서 내려다보니 물냄새 모랫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의 퍼런 꿈을 찬 강물 위에 내어던지나 무정(無情)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 아아 꺾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님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버릴까, 이 설움 살라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 시원히 오늘밤 이 물 속에……

그러면 행여나 불쌍히 여겨줄 이나 있을까…… 할 적에 퉁, 탕, 불티를 날리면서 튀어나오는 매화포, 펄떡 정신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더 강렬한 열정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 숨막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

사월달 따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 청류벽(淸流碧), 모란봉 높은 언덕 위에 허옇게 흐느끼는 사람 떼, 바람이 와서 불 적마다, 불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틀어박히고, 물결치는 뱃술게는 졸음 오는 리듬의 형상(形像)이 오락가락 ― 얼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소리, 달아논 등불 밑에서 목청껏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노래, 뜻밖에 정욕(精慾)을 이끄는 불구경도 인제는 겹고,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끝없는 술도 인제는 싫어, 지저분한 뱃밑창에 맥없이 누우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없는 장고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불리는 욕심에 못 견디어 번뜩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위에 조을 때, 뜻있는 듯이 찌꺽거리는 배젓개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綾羅島)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너의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요, 괴이(怪異)한 웃음소리도 무엇이리요, 사랑 잃은 청년의 어두운 가슴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르라, 사르라! 오늘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주요한(朱耀翰 1900.10.14~1979.11.17)의 호는 송아(頌兒)다. 평양에서 출생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 중등부와 도쿄 제1고등학교를 거쳐 상하이로 망명, 후장(滬江)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을 지냈다.
메이지학원 재학 중에 학우들과 회람지를 발행하는 한편 일본 시인 가와지 류코(川路柳虹)의 문하에서 근대시를 공부하다가 1919년 <창조(創造)> 동인에 참가함으로써 문단에 진출했다.
주요한의 ‘불놀이’는 신체시와 근대시의 분기점을 이룬다는 면에서 크게 각광을 받았다. 형식을 보면 전체 5연으로 된 산문시(散文詩)로 시적 자아의 격렬한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방식으로 채택되었다.
이시는 객관적 배경으로 ‘흥성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 있지만, 그 흥성스러움 뒤에 소외되어 있는 화자의 의식은 좌절로 인한 슬픔으로 가득해 있다. 사월 초파일의 관등놀이가 시적 모티브를 이루고는 있지만, 이 ‘불놀이’는 대동강가의 흥성스러운 불놀이 장면과 임을 잃은 화자의 고통스러운 내면이 교차되면서 절망적인 현실에 직면한 한 젊은이의 정서가 상징적으로 형상화 되어 있다. ‘삶’과 ‘죽음’, ‘어둠’과 ‘밝음’, ‘물’과 ‘불’이라는 대립적 요소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가지는데, 이는 화자의 심리 상태, 즉, ‘죽음에 대한 충동’과 ‘삶에 대한 욕구’ 사이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준다.
시적 화자는 강물로 내려가 ‘가신임의 무덤’과 연관된 좌절과 상심을 고백한다.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시인의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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