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에서
 

곽재구(1954~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고등학교 독서, 송하춘 외 2명, 박영사, 서울; 2005)

곽재구는 전남 광주에서 출생했고,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1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사평역〉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처녀시집 『사평역에서』와 『별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등이 있다. 1996년 제9회 동서문학상을 받았다.

‘역(驛)’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많다. 요즘은 역이 많아 옛날과 같은 정서를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옛날의 기차역은 만남과 기쁨, 이별과 슬픔의 상징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기쁨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읽을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입영열차는 눈물바다다.

연실 훔쳐내는 흰 손수건과 창가에 앉아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는 모습을 어찌 말로 표현하랴. 역의 겨울은 고독과 안타까움을 의미한다. 갈 곳 없는 노숙자나 구두닦이 소년들, 구걸하는 고아 소년들이 혹한(酷寒)을 이겨내는 장소다.

이시는 시골역사의 겨울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누구를 기다는 걸까? 기다려도 또 기다려도 좀처럼 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 다섯 시간, 열두 시간을 기다려 보지 않고 사랑했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그리웠던 지나간 순간들을 난로에 던져버린다. 마침내 돌아오지 않음을 깨닫고 미련을 툭툭 떨며 일어서는 화자의 적막한 심정을 이해하고 싶다.이 시에서 막차로 연상되는 ‘시간적인 소멸감’, 간이역에 의해 연상되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이시의 서정적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특히 눈 내리는 풍경, 역사에서 피어오르는 톱밥 난로는 소시민 삶의 누추함, 시련과 아픔 등을 표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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