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여행자를 위한 서시
류시화(1959~)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자라 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 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순간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던 일도 이제 그만
종이꽃처럼 부서지는 환영에 자신을 묶는 일도 이제는 그만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 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류시화의 본명은 안재찬이다. 1959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졸업했다. 대학교 2학년 때에 「아침」이라는 시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1980~1982년 무렵 박덕규, 이문재, 하재봉 등과 함께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1983년에 활동을 중단하고 ‘류시화’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구도의 길을 걷는 동시에 각종 명상서적의 번역 작업에 몰두했다.

1988년부터는 미국과 인도 등지의 명상센터에서 생활하고 인도의 대표적 명상가인 라즈니쉬의 주요 서적들을 번역했다. 당대 시단에 의해 대중의 심리에 부응하고 세속적 욕망에 맞춰 시를 쓴다고 매도당하기도 했으나, 대중적으로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1991),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1996) 등의 시집을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매년 겨울 인도를 방문하는 여행가이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겪은 일들과 얻은 교훈들을 모은 여행산문집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1997), 『지구별 여행자』(2002) 등으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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