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당의 매화를 추억하다(玉堂憶梅)
 

이황(1501~1570)

一樹庭梅雪滿枝(일수정매설만지)/ 한그루 마당의 매화가지에 가득 눈꽃 피니
風塵湖海夢差池(풍진호해몽치지)/ 풍진의 세상살이 꿈마저 어지럽네
玉堂坐對春宵月(옥당좌대춘소월)/ 옥당에 홀로 앉아 봄밤의 달을 보며
鴻雁聲中有所思(홍안성중유소사)/ 큰기러기 슬피 울 제 생각마다 산란하네

이황(李滉 )은 예안(禮安 지금의 안동시)에서 진사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퇴계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가 사망했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이우에게 학문을 배웠다. 1528년에 소과(小科)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534년 식년시(式年試)에서 문과(文科)의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성균관 대사성, 공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고,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퇴계사절요(退溪書節要) 등의 저서가 있다.

조선 성리학 발달의 기초를 형성했으며, 주리론(主理論) 전통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이다. 천원 신권에 그의 초상화와 도산서원과 매화그림이 인쇄되어 있다. 이 시는 퇴계가 단양군수로 부임하기 6년 전 1542년(중종 37년) 42세 때 홍문관 부교리로 임명받고 숙직을 서며 고향에 내려가 글공부를 하며 제자를 가르칠 생각을 하면서 쓴 시라고 한다.

관기 두향은 신임 사또로 퇴계 이황이 부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임 군수가 매화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그의 시첩을 꼼꼼히 살펴보고 <옥당억매>를 외었다. 미모에 시·서·화에 뛰어나고 거문고를 잘 연주하며 매화 가꾸기에 취미가 있는 두향은 퇴계를 가까이서 모시게 되었다.

그래서 사별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분매를 퇴계의 처소에 옮겨 놓았다. 때마침 이른 봄이라 화분 속의 매화는 곱게 피어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처소에 든 퇴계는 매화를 보고 무척 반기는 듯 하였으나, 선물을 받을 수 없다 하여 이내 매화분을 가져온 사람에게 돌려줄 것을 명하였다.

두향은 매화분에 얽힌 이야기를 아뢰고 퇴계가 6년 전에 쓴 시를 외우면서 매화분을 가까이 둘 것을 간청하였다. 이후 두향과 퇴계는 무척 가까워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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