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조선의 동량지재

이정 역시 지금은 벼슬이 없어 낙향하여 처가 주변에 살고 있지만 만약 조정에 출사하였다면 얼마든지 방진에게 먼저 혼사를 청해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처지에서 가세는 방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른께서 그리 흔쾌히 말씀하시니 안심이 됩니다. 아드님이 인품뿐만 아니라 문무에도 출중하다 들었습니다. 어르신께서 허락하시어 아드님과 제 여식이 혼인을 맺도록 해주신다면 우리 상주 방씨 가문에 큰 영광입니다.”
방진은 이정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딸의 혼사를 꺼냈다. 방진은 정중하게 이정에게 잔을 건네고 술을 따랐다.

방진의 가문 역시 대대로 벼슬을 한 집안이었지만 조정에 출사할 만큼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증조부 방홍지는 평창군수를 지냈으며, 조부 방중규는 영동현감을 지냈다. 방진 자신은 조상들 보다 더 크게 출세하지 못하고 전라도 지역 보성 군수에 머문 것이 가슴에 한으로 남아 있었다.

더구나 슬하에 딸 하나 밖에 없는 처지로서 특출한 데릴사윗감을 골라 딸의 앞날을 보장해 주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제사 및 상주 방씨 가문도 아울러 빛내줄 전도가 유망한 청년을 원했다.

그런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방진에게 이준경이 미미한 가문의 이순신을 거론했을 때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러 버렸지만 이준경의 강력한 권고와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은 청년 이순신은 문약한 사대부가의 자제와 달랐다.

방진은 여러 사람의 이야기와 이미 딸이 청년 이순신을 마음에 두고 있는 사실 등을 고려하여 욕심을 버리고 청년 이순신을 데릴사위로 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방진의 말에 처음에 크게 환영하던 이정은 데릴사위라는 조건에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여해는 장차 이 나라에 귀하게 쓰일 동량입니다. 사람에게는 태어난 장소와 시기에 따라 간웅이 되기도 하고, 건곤일척을 도모하는 호걸이 되기도 합니다. 아드님은 반드시 이 나라 조선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바질 때 구국의 기둥이 될 자질을 타도 났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한양에서 몸소 이곳까지 내려왔겠소? 두 가문이 인연이 맺어진다면 두 가문 모두 큰 영광이 있을 것이오. 내 말이 틀림없을게요.” 이준경은 손수 이정에게 술을 따르며 은근한 시선을 주었다. 방진 역시 이준경의 말을 예언처럼 믿고 있었다.

“두 분 대감께서 내 자식을 그리 보시니 내 할 말은 없소이다. 이 일은 인륜지대사인 만큼 집에 가서 안 사람과 제 자식을 불러 의논해보고 사흘내로 기별을 넣겠습니다.”
이정은 늦은 밤 방진의 대저택을 나서면서 자다가 홍두깨에 맞은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영감, 순신이가 승낙할까요? 그 애 성정으로 봐서는 절대 그댁 데릴사위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나 역시 순신이가 머슴살이나 다름없는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것에 마음이 퍽 내키지 않아요. 우리 끼리 이럴 것이 아니라 순신이를 불러 그 애 의향을 들어 보는 게 어때요?”

변씨 부인은 남편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아들이 방진의 사위가 되는 일에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조건이 데릴사위라는 것에 이내 마음이 착잡했다. 물론 대부분의 사대부가에서 데릴사위는 크게 흠이 되는 일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리 퍽 기분 좋은 일도 아니었다.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선생이나, 필선弼善을 지낸 초당 허엽許曄 그리고 회재 이언적李彦迪 선생 같이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의 유명한 자제들 역시 오랫동안 처가살이를 한 사례가 얼마든지 있기는 하다. 부부는 동상이몽이었다.

이정은 아들이 데릴사위라도 상관없이 방진의 재력을 바탕으로 아들의 출세를 시키고 싶어 했고, 변씨는 참한 규수를 짝지어 주고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끝까지 뒷바라지하여 과거에 입격시키고자 하였다.

이정은 아들 순신을 불러 방진의 제의를 전했다. 아비로써 아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일이란 그리 쉽지 않았다. 행여 아들에게 떳떳하지 못한 제안을 하였다가 책잡히는 일이 벌어지면 정말로 난감한 상황이 될 게 뻔했다.

어머니 변씨 역시 아들이 어떤 대답을 할지 가슴을 졸여야 했다. 데릴사위가 아니라면 정말로 좋은 혼처가 될 터인데 자식이 마치 재물에 팔려가는 것 같아 변씨는 씁쓸했다.

“애야, 요즘 네 선행이 마을뿐만 아니라 근동까지 아니지 아산에 소문이 나 있더구나. 쉬엄쉬엄 하렴. 네가 과거를 앞두고 다른 데 너무 총기를 허비하는 게 아닌지 아비는 걱정이 되는구나. 또한 벌써 성년이 되었으니 장가도 들어야 하고…….”

이정은 아들에게 차마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오히려 아들의 눈치를 보았다. 곁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던 어머니 변씨가 답답한지 혼사 이야기를 꺼냈다.

“애야, 너 뱀골에 방대감댁 알지?”
‘방대감? 그렇다면 연꽃아씨 아버지 방진 어른을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이순신은 방대감이라는 어머니 변씨의 말에 두 눈이 반짝거리면서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어머니께서 얼마 전 이슥한 밤에 방진의 집에 갔던 일을 아시고 물어 보는 게 아닌가?’하고 불안해하였다.

“네에, 어머니. 그 댁을 몇 번 지나치기는 했습니다만......”
“어제, 그 댁에서 아버지를 초빙하였단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 댁을 가보니 한양에서 영의정 이준경 대감이 내려와 계시더란다. 더 놀랄 일은 영의정 대감과 방대감이 너를 방씨네 사윗감으로 점찍어 놓고 빠른 시일 내에 확답을 달라고 하는구나. 그 댁에는 과년한 무남독녀가 있는데 참으로 곱다고 소문이 자자하단다. 그래서 네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어 불렀다.”
변씨 역시 아들의 반응을 살피느라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아니, 그 댁에서? 연꽃아씨를 나와 부부의 연을 맺기를 원한다고? 이게 생시인가 꿈인가? 천지신명님이 얼마 전 내가 야밤에 그 댁에 갔던 일을 아시고 도우시려고 하는 것인가? 그리고 동고 대감이 직접 뱀골에 내려왔다면 이건 보통일이 아닌데?

그분은 몇 해 전 내가 한양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인사를 올린 분 아닌가? 그럼, 그분이 그때 나를 한번 보시고 중매를 선다는 말인가? 아니, 우연일 수도 있겠지. 방대감과 친분이 있어 놀러 왔다가 우연히 아버님을 만났을 거야.’
이순신은 어머니 변씨의 물음에 잠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니, 얘야. 무얼 그리 골똘하게 생각하니?”
아버지 이정은 아들을 곁눈질로 보면서 곰방대를 빡빡 빨아댔다. 아들이 대답을 하지 않자 어머니 변씨는 가슴을 졸였다. 만약 싫다고 하면 아들 볼 낯이 없을 것 같았다. 이정은 헛기침만 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만약 이순신이 방진의 데릴사위가 되고 훗날 방진 내외가 세상을 뜨게 되면 방진의 많은 재산은 아들 이순신에게 돌아오게 되니 꿩 먹고 알 먹는 셈이 된다. 그러나 아들에게 방진의 데릴사위가 되라고 강요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야, 나와 연꽃아씨 사이에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이 있는 거야. 아마도 그 인연의 끈은 누구도 어쩌지 못할 단단하고 질긴 밧줄과도 같을 거야. 아니라면 아산에서 제일 부자인 방대감이 먼저 아버지를 초대해 혼사 문제를 꺼냈을 리가 없어.’
청년 이순신은 삼매경에 든 사람처럼 멍하니 방바닥만 쳐다보았다.

“얘야, 싫으면 할 수 없고. 내일 사람 편에 방대감댁과 혼인할 의사가 없다고 기별을 넣으마.”
어머니 변씨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허허, 가만히 좀 있구려. 지금 저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이 아니오?"
이정은 행여 아들이 방진의 사위가 되는 것을 거부할까봐 불안했다.

“아, 아닙니다. 어머니, 그 댁 규수라면 아산고을에서 모두가 탐내는 며느릿감 아닙니까? 소자에게 하루만 말미를 주세요.”
이순신의 아버지, 어머니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얘, 그리고 방대감댁 사위가 되면 그 댁에 들어가 살아야 한다고 하는구나.”
어머니 변씨는 간신히 말을 하고 눈치를 봐야 했다.

“네에? 그럼 데릴사위란 말씀이세요?”
이순신이 놀라는 표정에 이정과 어머니 변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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