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청실홍실

 ‘아아, 이리 고울 수가. 내 지금까지 본 수 많은 규수 중에 최고의 절색이로다. 이리 아름다운 여인의 청혼을 거절하였다니 하마터면 두고두고 후회를 할 뻔 했구나.’
두 사람은 마치 마을 어귀에 서있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처럼 서서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아, 과연, 과연 하늘이 내리신 분이시다. 지금까지 내가 봐온 사내들 중에 으뜸이로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고루 지닌 선랑이시다. 언젠가부터 꿈속에 어렴풋이 나타나신 분이 바로 내 앞에 서계신 선랑님이시다. 이게 분명 꿈은 아니겠지.’
연꽃아씨는 슬며시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내 마음을 받아주신다면 아씨와 해로동혈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내 잠시 어줍지 않은 객기를 부렸습니다. 덕수 이씨와 상주 방씨 두 가문이 서로 돕고 의지하며 오래오래 정을 주고받기를 원합니다.”
이순신이 잔잔한 미소를 짓자 연꽃아씨는 다시 흐느꼈다.

“선랑님, 고맙습니다. 오늘 제 목숨뿐만 아니라 방씨 가문을 살리셨습니다.” 연꽃아씨의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이순신이 닦아주었다.
“내 그대를 이승에서 뿐만 아니라 저승에 들더라도 은애하리다. 내 진작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미안할 따름입니다.”
이순신이 살며시 연꽃아씨의 두 손을 잡자 달은 야속하게 다시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뱀골 방진의 집은 이른 아침부터 부산했다. 노복들은 안채와 사랑채를 돌며 기둥에 걸린 거미줄을 제거하고 마당을 깨끗하게 쓸었다. 영문을 모르는 여자종들은 부산하게 부엌을 들락거리며 아침상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방진은 집안 구석구석을 돌며 혹시 청소가 안 된 곳이 있나 살피고, 부인 홍씨는 백년지객이 될 이순신에게 대접할 아침상을 정성껏 준비하였다.

“마님, 오늘 아침에 연꽃아씨 낭군 되실 분이 오신다면서요?”
여종들은 괜히 신이 나서 히죽거렸다. 연꽃아씨는 간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으면서 일찍 일어나 단장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얘야, 그 청년이 분명 인편에 오늘 아침에 우리 집에 오겠다고 한 게 참말이냐?”
방진은 연꽃아씨에게 묻고 또 물었다.

연꽃아씨는 어젯밤 백암에 갔던 일을 차마 말하지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였다. 열흘전만 해도 방씨가문의 청혼을 거절하여 한바탕 초상집 분위기를 만들더니 이제는 잔칫집 분위기로 만든 당사자를 방진은 빨리 보고 싶어 했다.

사시巳時가 좀 넘어서 이순신이 아버지 이정과 함께 뱀골 방진의 대저택에 도착하였다. 팔척장신의 옥골선풍 헌헌장부 이순신이 옥색 비단으로 지은 도포에 검정 갓을 쓰고 나타나자 여종들은 탄성을 질러댔다.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 짙은 일자 눈썹, 반듯한 이마, 따뜻해 보이면서 은은한 눈매, 의젓한 걸음걸이, 이순신 풍채에 집안사람들은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대감마님, 이순신이라고 합니다. 미리 통보도 못 드리고 아버님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걱정을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청년 이순신이 방진에게 당당하고 깍듯하게 예를 갖추고 인사를 올렸다.

“아이고, 사돈 어르신, 정말로 잘 오셨소. 내 두 분 기다리다가 눈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자네도 정말로 잘 오시었네. 자자, 어서, 어서 사랑채로 드십시다.”
방진은 벌써부터 사돈이라고 칭하며 이정의 손을 덥석 잡더니 두 사람을 사랑채로 안내하였다.

방진은 하인을 시켜 홍씨 부인과 연꽃아씨를 사랑채로 나오라고 하였다. 갑자기 방진의 집 하인들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남녀 하인들은 사방을 살피며 끼리끼리 모여 귓속말로 이순신 부자에 대하여 밀담을 나누었다.

“하이고, 우리 아씨는 참으로 좋겠네. 저렇게 헌헌장부를 낭군으로 맞으니 한오백년 해로하는 일만 남았네. 에구, 우리 딸년은 어느 세월에 저런 신랑감을 맞이하누?”
나이 먹은 한 여종이 질투 섞인 말을 하자 옆에 있던 다른 여인이 눈을 흘겼다.

“아따, 성님은 언년이가 얼굴이 반반한데 뭘 그러슈. 우리 꼭지가 걱정이지유. 사내나 계집이나 그저 잘나고 봐야지. 개차반으로 생기면 지나가는 강아지도 쳐다보지 않으니 원. 저렇게 잘난 신랑감을 얻으려면 3대가 복덕을 쌓아야 가능한 일이라고 하는데. 에구, 우리 같은 인생들이 언감생심 꿈이나 꿀 수 있을까?”
두 여인뿐만 아니라 다른 여종들도 신세를 한탄하며 한숨을 푹 푹 내쉬었다.

“방대감, 아침에 미리 기별도 하지 못하고 불쑥 찾아와 결례를 한 게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이 방진과 홍씨 부인을 번갈아 보았다.

“아이고, 사돈어른. 그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하게 하시나요? 어제 제 딸아이한테 오늘 아침에 오실 거라는 소식을 듣고 밤새 한잠도 못 잤답니다. 다 죽어가던 제 딸이 이렇듯 하루아침에 이슬 머금은 봄꽃처럼 일어났답니다. 하하 하하하......”
방진은 사랑채가 떠나가도록 웃었다.

“어르신, 정말 잘 오셨습니다. 우리 부부는 무덤 속 같은 어둠속에서 광명을 보는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제 딸이 어떻게 이렇듯 당당한 가랑佳郞을 알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자랑스럽고 대견합니다.”

홍씨 부인은 만면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이정과 이순신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였다. 이정은 홍씨 부인 옆에 반쯤 고개를 숙이고 서있는 연꽃아씨에게 눈길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아, 참으로 고운 규수로다. 한양에서도 이렇듯 참하고 아리따운 규수를 보기 힘든데 아산 뱀골에서 경국지색 뺨치는 며느릿감을 보게 되다니 참으로 우리 아이에게 홍복이로구나.

우리가 한양에 살다가 이곳으로 내려온 것과 이곳에 방씨 가문이 거주하게 된 것도 모두가 우리 덕수 이씨 가문과 예정된 인연을 맺기 위한 수순인가? 그게 아니라면 조선팔도에 그 많은 가문 중에 하필 상주 방씨란 말인가? 우리 가문은 초계 변씨와 대를 이어 인연을 맺었건만…….’

이정은 넋을 잃고 연꽃아씨를 바라보며 속을 중얼거렸다. 장차 시아버지가 될 이정의 강렬한 시선에 연꽃아씨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애야, 뭐하고 있니, 어서 인사 올리지 않고서. 사돈어른 좌정하시지요.”
방진의 말이 끝나자 연꽃아씨는 날아갈 듯 이정에게 큰절을 올렸다. 또한 이순신과 맞절로 인사를 나누자 바라보던 방진과 이정 그리고 홍씨 부인은 흐뭇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두 집안 어른들의 인사가 끝나자 본격적인 혼사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정과 이순신은 방진이 제의한 데릴사위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좋은 날을 택일하여 혼례를 치르기로 하였다.

“그러면 팔월 모일이 어떻겠습니까? 택일은 제가 알아보았습니다.”
방진이 의외로 혼사를 서두르고 있었다. 방진이 혼사를 서두르는 이유는 영의정 이준경이 한양으로 떠나면서 가능하면 서둘러 혼사를 성사시키라고 언질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혼사를 차일피일 끌다가 다른 가문에서 청년 이순신에게 눈독을 들이고 신랑감을 채갈 수도 있었다. 이정은 혼사가 성사되면 올 가을 쯤 아들 이순신을 장가보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다다음달인 팔월에요? 허허 허허허…….”
이정은 크게 놀라면서도 웃음으로 방진의 의사에 승낙의 표시를 하였고 청년 이순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연꽃 아씨는 혼례 이야기에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정도 예의바르고 헌헌장부라면 딸아이 장래뿐만 아니라 우리 내외가 죽어서도 외손봉사를 받을 수 있겠어. 또한 내가 죽으면 내가 평생 일궈놓은 전 재산을 잘 운영할 수 있을 거야. 말만 들었지 막상 바로 앞에서 보니 과연 영웅호걸의 풍모가 보이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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