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계유정난(癸酉靖難)

"알았습니다. 고마워요. 내 방값은 두 배로 줄 테니 안심하시고 우선 국밥 두개만 말아 주시구려."
대궐에서 백성들이 먹는 국밥을 구경한 적 없는 공주에게 거친 음식을 올려야 하는 유모는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 아침을 간단히 해결한 공주와 유모는 곧 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결에서도 공주는 무장이 무사히 대궐로 돌아갔는지 몹시 궁금하였다.

'무사히 돌아가셔야 할 텐데…….'
신열이 가라앉고 예전의 상태를 회복한 공주는 유모에게 길을 재촉하여 남행을 시작하였다.
세희공주를 무사히 탈출시킨 중전 윤씨는 상궁을 시켜 한양에서 젊은 여인이 죽은 상갓집을 수소문하였다. 다행히 흥인문 근처에서 신병을 비관하여 음독자살한 젊은 여인의 상갓집을 찾아냈다. 중전은 내관들을 은밀히 불러 죽은 여인의 시신을 아무도 모르게 대궐로 운반해 오도록 했다.

“너희들은 오늘 있었던 일을 죽어서 무덤 속에 들어간 후에도 절대 발설하여서는 아니 된다. 알겠느냐?”
중전 윤씨는 공주가 궁궐을 빠져나간 일과 여염집 처자의 시신을 궁궐로 운반해온 사실을 알고 있는 상궁 나인들과 내관들을 불러 놓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김상궁은 여염집에서 반입한 여인의 시신에 세희공주의 옷을 입히고 예쁘게 화장을 한 뒤 공주방에 눕혀 놓거라. 누구도 이일을 알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다음날 아침, 간밤에 세희공주의 일로 술을 많이 마신 상감은 내관으로부터 세희공주가 음독(飮毒)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뭐라고, 세희가 음독하였다고?”
“네, 전하. 방금 어의가 공주마마의 옥체를 살피고 왔나이다.”

 “아아, 내가 또 살인을 저질렀구나. 앞으로 얼마나 많은 피를 내손에 묻혀야 한단 말이냐? 여봐라, 내 직접 공주의 시신을 봐야겠다. 어서 앞장 서거라.”
상감이 막 침전을 나가려 할 때 중전 윤씨가 초췌한 얼굴로 상감의 침전에 들었다. 밤을 꼬박 샌 중전의 얼굴은 푸석푸석해 보였다.
“상감, 세희공주가 간밤에 음독을 하였습니다. 상감에게 호되게 질책을 받고 상심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일을 장차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으흐흐흐.”

중전 윤씨는 눈물을 흘려가면서 상감의 반응을 살폈다.
“그래서 내 공주 궁에 가보려하오.”
“아니 되옵니다. 외명부의 일은 소첩이 알아서 처결할 사안이옵니다. 이미 어의를 불러 검시(檢屍) 한 뒤 입관까지 마쳤습니다. 상감은 간밤에 세희에게 치죄를 하신다고 한 성심을 거두어 주세요.”

“나는 그 애를 용서할 없소. 나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자식이라 해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오. 그 아이가 죽었다고 하여도 용서할 수 없소.”
“상감, 너무 하십니다. 세희는 상감의 여식이옵니다. 이미 이승에 없는 여식을 치죄하여 무엇 하겠습니까?”
“여봐라, 어의를 들라하라.”
상감은 공주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마치 중전이 공주와 짜고 죄를 피해볼 요량으로 자신을 속일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너는 세희공주의 시신을 검시했느냐?”
“전하, 공주마마께서 음독한 사실이 틀림없사옵니다. 소신이 두 눈으로 똑똑히 검시하였습니다.”
상감은 어의가 감히 자신을 속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공주 궁으로 가려던 것을 포기하고 도승지를 들도록 하였다. 상감은 날이 밝으면 자신이 직접 치죄를 하여 적절한 벌을 내리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세희공주가 더욱 미웠다. 죽은 자식에게 측은할 법도 하였지만 아비에게 상처를 남기고 홀연히 자신의 곁을 떠나간 딸이 얄미웠다.
“오늘부로 세희공주를 폐서인하고 왕실족보에서 삭제토록 하시오.”

무서운 일이었다. 차라리 공주의 죄를 묻고 치죄한다면 왕실의 족보에 기록되어 이름은 남을 수 있지만 상감은 딸 세희공주가 얼마나 얄밉고 미웠는지 왕실족보에서 이름을 삭제하도록 했다. 중전 윤씨는 딸의 목숨을 구했지만 왕실호적에서 이름이 삭제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졌다.

조정에서는 세희공주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말들이 많았지만 상감의 절대적 권위에 도전하면 대군과 공주의 신분일 지라도 가차 없이 치죄(治罪)하는 상감의 권위에 누구도 세희공주의 일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1453년 계유년 10월 10일 밤 수양대군은 휘하의 용맹무쌍한 양정(楊汀)과 임운(林芸)등에게 밀명을 내렸다. 밀지의 내용은 자신의 대권(大權)을 가는 길에 가장 큰 걸림돌인 영의정 황보 인(皇甫 仁)과 좌의정 김종서(金宗瑞)를 척살하라는 임무였다. 문종(文宗) 임금은 죽기 전 자신의 보위를 물려받을 노산군(魯山君)의 안위를 부탁 할 정도로 두 사람은 문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세종의 둘째 아들로 문무를 겸한 수양대군은 야망이 큰 사람이었다. 아우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역시 야망이 크기는 수양에 버금갔지만 그의 수하에는 한명회(韓明澮)와 권람(權擥)같은 모사꾼이 없었다.
수양은 자신의 앞날에 훼방꾼으로 등장한 김종서와 황보인만 제거하면 탄탄대로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양대군은 상감에게 김종서 등이 반역을 도모하였기에 대역모반죄로 우선 죽였다고 아뢰고, 왕명을 빌어 대신들을 소집한 다음 홍윤성(洪允成) 등을 시켜 황보인, 조극관(趙克寬), 이양(李穰) 등을 죽였으며, 정분(鄭苯)과 조수량(趙遂良) 등은 귀양 보내 완전히 권력을 장악했다. 수양의 예측대로 상감을 보필하던 두 거물과 중신들이 제거되자 조정에서는 감히 수양대군에게 맞설 자가 없었다.

역적으로 몰린 김종서와 아들 김승규(金承珪)가 죽임을 당하고 김승규의 처(妻)와 딸은 수양의 편에 섰던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된 정인지(鄭麟趾)에게 하사되어 하루아침에 당당했던 사대부가의 아녀자에서 권신(權臣)들 성욕의 제물로 전락했다. 김종서 일족이 몰살되는 과정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자가 있었다.

계유정난이 일어났던 때 김종서의 손자는 멀리 집을 떠나 있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충청도 어느 깊은 산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반역의 잔당을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전국 방방곡곡에 숨어있던 김종서를 비롯한 역신(逆臣)으로 몰린 혈족들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가는 곳마다 간신히 도망쳐 목숨을 건진 역신들 혈족들의 얼굴을 그린 방(榜)이 붙어있었다. 충신들의 혈족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지난 가을부터 이십 초반의 훤칠한 장부(丈夫)가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동학사 뒤편 남매 탑에 나타났다. 장부는 끝없이 속으로 염불을 외며 남매 탑을 돌고 돌았다. 장부의 탑돌이는 어느새 주지스님을 비롯해 모든 스님들에게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

두 손을 합장한 채 밤이슬을 흠뻑 맞고 달이 서산에 기울 때 까지 청년은 쉬지 않고 탑을 돌았다. 마침 잠이 안 와 맑은 공기를 쐴 겸 주지스님이 동학사 뒤편 암자에 올라갔다. 지나가려고 하는데 한 청년이 기진맥진 한 채 겨우 발걸음을 떼며 탑 주위를 돌고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
청년은 모든 기력을 다 쏟아 낸 듯 이마와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이 광경을 주지스님은 멀리서 몸을 숨기고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은 발걸음조차 떼기가 힘든 듯 장승처럼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달이 거의 서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소쩍새 우는 소리가 들렸고, 이따금 늑대 울음소리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청년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남매 탑을 돌기 시작하다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저런-
주지스님이 달려가 쓰러진 청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눈은 감은 상태였지만 숨을 몰아쉬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주지 스님이 맥을 집어보니 가늘게 맥박이 뛰고 있었다.
“어쩌다 이런 몸으로 탑돌이를 하였을꼬?”
주지 스님은 상좌승을 불러 청년을 주지 스님이 기거하는 요사채로 옮기도록 하였다. 주지스님이 청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산촌에서 막 자란 사람 같지 않았다.

“으음……. 기골이 장대하고 골격으로 보아 보통집안의 자손이 아니로다. 무슨 사연이 있어 이 야심한 시각에 탑돌이를 하고 있었을까?”
주지스님은 청년의 상의를 벗기고 물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 청년의 몸에서는 땀에 절은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초췌한 것으로 보아 제대로 먹지 못한 듯 했다. 그러나 반듯한 외모는 기품이 있어 보였다. 청년은 이틀이 지나서야 간신히 눈을 떴다.
"나무관세음보살. 스님, 제가 어떻게 여기 누워있는 것인지요?"
"나무관세음보살. 처사께서 남매 탑을 도시다가 그만 쓰러지셨습니다. 부처님의 가호가 있기를 천만다행입니다. 큰일 날 뻔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스님."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지만 현기증세가 있는 것 같아 주지스님은 그냥 자리에 눕도록 했다.
"보아하니 처사는 이곳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스님이 청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청년의 입에서 어떠한 대답이 나올 지를 기대하는 눈치다. 그러나 청년은 눈을 지그시 감고 괴로운 듯 헛기침만 하면서 아무 말이 없었다.
'으음, 분명 말 못할 곡절이 있는 게 분명하군.'
주지스님은 괜한 물음으로 청년이 번뇌에 쌓이게 한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말씨로 미루어 한양에서 왔다고 판단한 주지스님은 이 청년이 혼자 멀리 계룡산까지 들어와 탑돌이 하는 사연에 대하여 나름대로 상상해 보았다.

'혹여, 이 청년이 지난 계유년에 한양에 분 피바람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 그렇다면 충신의 혈육이 분명할 터. 청년의 눈동자에 알 수없는 슬픔과 원한이 서려있는 것으로 보아 가슴에 맺힌 한이 깊은 것 같기도 한데…….'
"스님."
청년이 조용히 주지스님을 불렀다. 주지스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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