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해후(邂逅)

세희공주는 자신과 수어지교의 연분이 있는 청년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반년이 지나도 청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차차 마음이 조급해진 공주는 속내를 누구에게도 내비치지 못하고 속으로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세희공주는 삼세의 연을 맺고 있다는 청년이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저녁 공양을 올리고 공주는 주지 스님을 찾았다.

"나무아미타불. 아기씨, 답답하고 불안하시지요?"

공주의 속마음을 훤히 알고 있는 주지스님은 공주가 곧 자신을 찾아 올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스님, 그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신지요?"

"나무석가모니불. 그 처사는 아기씨 가슴 속에 계십니다."

"네에? 소녀의 가슴 속에 계시다니요?"

"아기씨께서 불철주야로 그 처사의 안위를 걱정하시는데 어떤 못된 기운이 그분을 해하겠습니까? 그 처사와 아기씨는 북두칠성의 탐랑성(貪狼星)의 정기를 타고 나셨으니 부부로서의 운뿐만 아니라 하늘이 주신 수명을 모두 누리실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소서."

"스님, 정말로 그 분이 저와 둘도 없는 천생연분인가요? 그리고 그 분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요?"

"나무관세음보살. 아실 것 없습니다. 혹여, 아신다 한들 가슴만 아플 뿐 입니다. 그냥 가슴에 묻어두고 사시면 먼 후일 자연히 아시게 되실 것입니다."

세희공주는 아버지 수양에게 맞서다 죽임을 당한 가족이라면 역모로 몰린 수많은 가문 중에서 대표적인 황보인 가문과 김종서의 가문을 떠올렸다. 분명 두 가문의 사람이 분명하다고 판단하고 자신과 어쩔 수 없이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할 사람이라면 나중에라도 가슴 아픈 곳을 굳이 물어보거나 억지로 알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이미 부모들의 악연에 의해 기연이 맺어진 이상 부부로 살면서 선연(善緣)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고 싶었다. 날이 갈수록 공주는 답답하고 불안하여 밤마다 불경을 대하며 청년의 무사를 빌었지만 편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거의 매일 밤을 불면증에 시달리던 공주는 다시 탑돌이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동학사에서 한 식경 거리에 위치한 비로봉 아래 남매 탑을 찾아 지아비가 될 청년의 무사를 위하여 탑돌이를 하였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 아금문견득수지 원해여래진실의 옴아라남 아라다

공주는 천수경을 독송하며 탑을 돌고 돌았다. 보통 초저녁에 시작한 탑돌이는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끝났다. 공주 혼자 탑돌이를 하게 하는 것이 건강을 해칠 것 같다고 판단한 유모도 공주와 함께 탑을 돌기 시작하였다. 밤마다 묘령의 여인이 남매 탑을 돈다는 소문을 듣고 과거공부를 하기 위하여 동학사에 머물던 대처의 학생들과 일부 스님들도 탑돌이에 동참하여 계룡산 계곡에는 밤마다 염불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졌다.

주지스님은 동학사에서 꽤 먼 남매 탑까지 가서 밤마다 탑돌이 하는 공주의 안위가 걱정되어 무예에 뛰어난 젊은 비구승 서너 명을 공주가 탑돌이 하는 주변에 은밀히 매복하여 공주의 탑돌이가 끝날 때까지 지키도록 하였다.

공주의 탑돌이가 다시 시작된 지 한 달쯤 되던 어느 봄날 초저녁이었다. 보름달이 계룡산을 온통 은빛으로 물들여 놓고 있었다. 공주가 속으로 금강경을 외며 남매 탑을 돌고 있을 때 불현듯 많이 듣던 남자의 목소리가 공주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온다 간다 말없이 떠났던 그 선풍옥골의 청년이 분명하다고 공주는 판단했다. 그러나 공주는 모르는 체 하고 계속해서 남매 탑을 돌았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공주가 목소리를 약간 높이면 남자는 공주의 목소리 보다 약간 더 높게 천수경을 독송했다.

'아, 그 분이 확실해. 나무관세음보살. 부처님, 고맙습니다. 소녀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셨군요. 부처님, 정말로 고맙습니다. 소녀, 이승을 다하는 그날 까지 부처님께 의지하고자 합니다.‘

공주의 양 볼 위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공주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청년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정체불명의 남자가 공주의 뒤를 밟으며 탑 주위를 돌자 유모는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모는 두 사람의 탑돌이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차마 끼어들 수 없었다. 공주가 갑자기 남매 탑을 돌다말고 그 자리에 멈추었다. 뒤 따르던 청년도 제 자리에 멈추었다가 예의가 아니다 싶어 공주에게 다가 왔다.

"나무관세음보살. 보살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여여(如如)하셨는지요?"

청년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녹아 있었다.

"나무대자대비관세음보살마하살. 처사님께서 드디어 돌아오시었습니다."

공주는 고개를 푹 숙이고 청년을 똑바로 올려다보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와락 끌어안고 왜 그동안 아무 연락도 없이 어디 갔다 왔느냐고 큰소리로 따져 묻고 싶었다. 눈물이 자꾸만 볼을 타고 내려와 점점 더 공주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한참동안 공주는 그 자리에 장승처럼 멈춰 서서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길면서도 짧은 침묵이 흘렀다.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된 공주는 눈물을 닦고 천천히 청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운 얼굴이었다. 수많은 밤을 잠들지 못하고 안위를 위하여 기도를 올렸던 늠름한 사내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두 삶의 시선이 일직선상에 고정된 채 한참동안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보살님, 전 보다 더 어여뻐졌습니다. 미안합니다. 어쩔 수 없이 동학사를 떠나 방랑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안해요.’

‘거사님, 보고 싶었어요. 행여나 거사님이 어찌되면 소녀는 세상 살 의미가 없어지는 거나 같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다시 거사님을 뵈니 가슴이 벅차오르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환희가 제 가슴 가득합니다. 고마워요. 이렇게 소녀 앞에 나타나 주셔서요.’

"보살님, 전보다 더욱 원숙해 지셨습니다. 그 동안 저는 강원도 금강산과 남도를 돌고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었고 좋은 구경도 많이 하였습니다. 말없이 떠나 송구합니다."

청년이 무거운 침묵을 깼다.

"그러셨군요. 소녀, 처사님의 안위가 무척이나 걱정되었습니다."

'나의 안위? 그러면 이 여인도 나와의 숙연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일까?'

"나무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 보잘 것 없는 저를 걱정해주시는 보살님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저도 방랑길에 오르면서 보살님 생각을 늘 하고 있었습니다. 보살님의 화사한 미소가 제 가슴에 한 가닥 희망이었습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정말로 고맙고 고맙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거사님, 이 모두가 부처님의 자비입니다.”

동학사를 떠날 때 궁중의 여인들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은 여인의 모습을 기억해낸 청년은 여인의 신분이 궁금했다. 혹여 자신을 유혹하여 관가에 넘기려는 수작을 꾸미는 여인이 아닌지 또는 정말로 왕실과 연관이 있는 여인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하여 죽은 여인의 혼령이 한 말이 생각났다. 그 여인의 말에 의하면 지금 자신의 앞에 서있는 여인 역시 자신과 천생연분이 틀림없었다.

"저어,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청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네에, 처사님 어려워 마시고 말씀하세요."

청년은 한참 뜸을 드리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부처님을 믿는지요?"

"나무관세음보살. 처사님, 삼천대천시방세계(三千大天十方世界) 어디에도 대자 대비한 부처님이 아니 계신 곳이 있나요? 제 몸속에 부처님이 계신걸요. 처사님 가슴 속에도 역시 부처님이 계실 것이고요. 그러니 어찌 부처님을 믿고 안 믿고 가 어디 있겠는지요?"

청년은 불심이 깊은 여인의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기뻤다. 자신도 부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모시고 있는 터라 여인의 말은 청년은 큰 용기를 얻었다.

"달빛이 보살님을 더욱 아름답게 하네요. 아마, 저 달 속에 살고 있다는 항아님께서 행여 보살님을 보시고 질투라도 할까 걱정됩니다."

공주는 청년의 말에 속으로 피식 웃으며 청년이 보기 보다는 매우 밝고 건전한 성격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숲속에서 공주를 그림자처럼 호위하고 있는 서너 명의 비구스님들이 남녀의 정겨운 모습을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동학사를 떠나 강원도와 남도를 유랑하면도 한시도 보살님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보살님께서 이곳 동학사에 오시던 날 밤부터 보살님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관군들이 이곳에 나타나자 죄 많은 이 사람은 몸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보살님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아, 그래서 박 위장이 나타난 그날부터 보이지 않았구나.'

"처사님, 주지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소녀는 처사님과 삼세의 숙연으로 끈끈하게 맺어졌다고 합니다. 소녀, 처사님을 처음 뵐 때부터 어디선가 많이 뵌분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청년은 당장 자신이 김종서 장군의 손자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아직은 앞에 있는 여인에게 자신의 속을 내비치기가 조심스러워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보살님, 밤이슬이 차갑습니다. 이제 하산하심이 어떠하신지요? 제가 보살님을 모시고 내려가겠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네에, 이제 소녀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내려가야지요."

공주는 합장을 하고 달빛에 촉촉이 젖은 청년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살며시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던가 공주의 시선이 청년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아아, 선풍도골이로다. 어쩌면 이리도 잘난 사내가 이런 깊은 산사(山寺)에 있단 말인가?'

공주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도 청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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