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새 출발

“서방님, 시장하시죠?”

“아니오. 부인과 유모가 시장할 텐데......”

“아기씨, 조그만 더 가면 주막이 나올 거예요. 조금만 참으세요.”

큼지막한 보퉁이를 머리에 이고 뒤따르던 유모가 보퉁이 속을 뒤지더니 호리병을 꺼내 공주에게 건넸다. 간밤에 마시고 남은 술이었다. 만약을 위해 유모가 챙겨둔 것 이었다.

“서방님, 목이 마르실텐데 이거라도 한 모금 마시세요.”

“하하하하. 유모께서 참으로 사려가 깊으시네요. 고맙습니다.”

사내가 맛있게 술로 목을 축이고 나자 두 팔을 하늘로 쳐들어 보이며 기운이 솟는 시늉을 해보였다. 공주는 그런 사내가 미덥기도 하고 한 백년 함께 할 낭군이라고 생각하니 가슴 뿌듯했다. 자꾸만 간밤의 일이 생각나서 공주는 수줍음과 창피함에 고개를 푹 숙이고 땅 바닥만 쳐다보았다.

사내는 이미 여러 차례 여인의 체취를 맡아보았지만 공주는 처음으로 남자를 느꼈고 열락을 맛보면서 이승에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만 보고 알아왔던 세상이 아닌 감각과 공감대의 형성이 가능함으로서 전혀 색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에 공주 역시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이제까지 삶이 고귀한 신분의 소녀였다면 앞으로 펼쳐질 삶은 거칠고 사나운 인생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자신의 미래를 조용히 점치고 있었다.

‘아, 어마마마가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하실지…….’

공주는 자신이 혼인을 하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엿한 한 사내의 지어미가 되었다는 기쁨보다 왠지 슬픔이 엄습해 왔다. 주지스님의 말에 최면이 걸려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치룬 혼인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좋든 실든 한 사내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부인, 어서 길을 재촉합시다.”

“서방님, 어디 정해둔 곳이라도 있는지요?”

“…….”

“이리 무작정 가는 것보다 어느 장소를 정해놓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정한 곳은 없지만 주지스님께서 동쪽을 향해 가라고 해서 걷기는 합니다만.”

“서방님, 주지스님께서 주신 편지를 이쯤에서 뜯어보셔도 좋을 듯 한데요?”

그때서야 사내는 자신의 품안에 있던 편지를 생각해 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고 혹시 편지 안에 무슨 비밀이 적혀있으면 가던 길이 더딜 수도 있다고 판단하였다.

“부인, 편지는 주막이나 어디 좀 더 편한 곳에 가서 읽어 봅시다. 이제 막 계룡산을 빠져 나온 것 같은데 멀리 간 뒤 읽도록 해요.”

“서방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고맙소. 부인.”

“자, 어서 가던 길을 가십시다.”

사내가 앞장서고 뒤에 공주와 유모가 따랐다. 산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것처럼 점점 더 알 수 없는 미로 속으로 들어갔다. 사방에 진달래가 피어 마치 산불이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름 모를 산새들이 지저귀고 초록 옷으로 단장한 산마다 상큼한 냄새를 풍겼다. 산봉우리에 구름이 휘감겨 있다가 바람에 서서히 자리를 내주기도 하고 계곡으로 밀려 내려와 산골짜기 풍경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기도 하였다.

“서방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요. 이런 산속에서 속세의 일을 모두 잊고 한 백년 파묻혀 살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공주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사내의 의중을 물었다.

“나도 부인과 같은 생각이오. 우리 산천경계 뛰어난 곳에 터전을 잡고 한 백년 살아 봅시다. 속세는 너무 어둡고 무거운 일들이 많은 곳이오. 미래에 태어날 우리 아이들에게도 홍진(紅塵)의 일에 얽매여 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사내가 걸으면서 뒤따르는 공주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자 공주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공주는 남편이 된 사내가 분명 자신에게 말 못할 사연이 있을 거라 생각하였지만 지금 당장은 알고 싶지 않았다. 먼 훗날 자연히 알게 될 것이고 그때 사내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 주면 될 거라 생각했다.

“서방님, 소첩 이제 서방님에게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앞으로는 지난 일을 모두 잊고 새 출발하도록 해요. 처음 서방님 얼굴을 뵐 때부터 수심이 많은 분 같았습니다. 소첩 또한 많은 근심 걱정거리가 있습니다만 이제부터 모든 것 훌훌 털고 오로지 서방님 한 분만 의지하고 살렵니다. 부디 소첩의 뜻을 저버리지 마소서.”

공주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며 걷던 사내는 콧등이 시큰거렸다. 대충은 아내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 지체 높은 신분일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이제 부부가 된 입장에서 옛일은 소용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부인, 염려하지마세요. 내 부인을 죽을 때 까지 은애하리다.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부인 말대로 우리는 한 배를 탔으니 지난 일일랑 모두 잊고 미래만을 생각하며 삽시다.”

“고마워요. 서방님.”

“아니오. 부인은 나에게 아주 소중한 존재요. 내가 부인을 처음 봤을 때 뭔가 말할 수는 없지만 끈끈한 그 무엇인가를 느꼈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우리가 이렇게 부부가 된 것도 모두 숙연이라는 주지스님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아직은 더 살아 봐야 하겠지만 난 주지스님의 말씀이 차차 현실이 되어가는 것 같아 오히려 두렵습니다. 그 분은 살아있는 부처 같기도 하도 도인(道人)같기도 합니다.”

“서방님, 주지스님은 소첩의 어머니와 오랫동안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분입니다. 앞으로 살다가 어려운 일이 닥치거나 해결하기 곤란한 문제가 발생하면 주지스님을 찾아뵈려고 합니다. 서방님과 이 소첩의 가슴속에 부처님을 모시고 계시니 주지스님의 말씀은 곧 부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될 듯합니다.”

“맞습니다. 그분은 생불(生佛)이 틀림없습니다. 그 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내 부인 말대로 하리다.”

“고맙습니다. 서방님.”

부부의 연을 맺기 전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에 대하여 가슴 졸이며 궁금해 하였고 수많은 밤과 낮을 그리움으로 수놓아야 했다. 이제 부부의 연을 맺고 실과 바늘이 되어 하세월 좋은 시절을 보내는 일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세 사람은 동쪽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쉬어가자고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주지 스님이 가급적 멀리 떠나가라고 했으니 다리가 아프고 힘이 들더라도 갈 수 있는데 까지는 걸어야 했다. 개울을 건너고 산을 넘고 동네를 관통하기를 십여 차례 세 사람의 인내에 한계가 다다를 무렵이었다. 갑자기 유모가 소리쳤다.

“아기씨, 저기 주막 같은데요?”

유모가 가리키는 쪽을 두 사람도 동시에 쳐다보았다. 삼거리 양지바른 곳에 초가집이 있는데 하얀 깃발에 주막(酒幕)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시간으로 보아도 아침과 점심의 중간 사이 같았다. 유모가 주막이라는 확신이 들자 앞장서서 걸었다. 보퉁이를 이고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에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부인, 저 주막에 들려 요기 좀 하고 갑시다. 다리도 아플 텐데요?”

“아닙니다. 소첩보다 서방님께서 밤새 한 잠도 못주시고 뜬 눈으로 밤을 보내셨는데요.”

“아니, 부인께서는 밤새 안 주무시고 내 얼굴만 바라보았나 봅니다?”

“서방님께서는 새벽닭이 울 때 까지 주무시지 못하고 뒤척이셨습니다.”

“그럼, 부인께서도 못 주무셨구려.”

“…….”

앞서가던 유모가 주막 안으로 들어서자 평상에 앉아 술과 국밥을 들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유모와 뒤에 있는 두 사람에게 쏠렸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텃세가 심한 지방 같아 보였다. 체격이 건장한 텁수룩한 수염의 사내가 공주 일행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남자는 도포에 갓을 썼고, 곁에 있는 여인은 화사한 치마저고리에 새댁같이 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경계의 눈빛을 띠고 있는 것이 마치 무슨 죄를 짓고 쫓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주모, 방 있어요? 우리 주인나리 내외분께서 잠시 쉬었다 가실 건데요.”

“아따, 방이야 얼마든지 있으니 어서 들어오시구랴.”

“국밥 세 개하고 탁주 한 사발 얼른 준비 좀 해줘요.”

“저기. 가운데 있는 방으로 드슈. 내 얼른 상을 준비 할 테니. 참, 잠시 쉬었다가더라도 방 삯은 하룻밤 잔거나 마찬가지유. 알았우?”

“헐, 염병. 그놈의 인심하고는. 알았으니 얼른 국밥이나 말아오구랴.”

“주모, 여기가 어디요?”

“아따, 나리하고는. 여기가 옥천 땅이지 어디유? 옥천인지 모르고 오셨단 말이유?”

“옥천? 그럼 계룡산에서 꽤나 멀리 온 듯 한데......”

“부인, 어서 방으로 듭시다.”

“서방님, 밖에 있는 남자들 눈빛이 심상치 않아요. 그냥 나가서 다른 곳을 찾아보던 지요?”

“걱정 마세요. 내 이래 뵈도 문무(文武)를 겸했습니다. 시골뜨기들 눈빛이 날카롭다고 하나 내 완력은 못 당할 것이요. 너무 염려 마오.”

사내의 말에 약간 안심한 공주는 방으로 들었다. 빈방에 퀴퀴한 남정네들 냄새가 코를 찔렀다. 두 평 남짓한 방에 때에 찌든 무명 이불과 베개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손님들이 방을 떠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유모가 얼른 방안을 정리하고 두 사람이 편히 앉아서 쉴 수 있도록 하였다.

“아기씨하고 서방님은 잠시 눈 좀 붙이셔요. 눈이 많이 충혈 되어 보여요. 쇤네는 나가서 바깥 동태 좀 살피고 올게요.”

“유모 곧 국밥이 들어 올 텐데.”

“걱정하지마세요. 주모한테 이러저러한 것 좀 물어보려고요.”

“조심해요, 주모. 밖에 있는 남자들 눈빛이 사납던데…….”

“걱정 마세요. 아기씨.”

유모가 방에서 나가고 두 사람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갑자기 고요한 공간에 두 사람만 남게 되니 분위기가 어색했다. 새벽녘까지만 해도 억누를 수 없는 젊음을 활활 불태웠지만 피로가 엄습해오는 마당에 간밤의 일은 사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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