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왕자와 전군들

청산유수 같은 요석공주의 달변에 부왕 김춘추와 보희부인, 이모 문명왕후 그리고 여러 왕자, 전군들은 말문이 막혔다. 늘 어린 여동생이라고 보았던 요석공주의 오라버니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무엇보다 부왕인 김춘추와 이모 김문희 왕후는 지금까지 자신들이 요석공주를 잘못 알고 있었다고 판단하였다.

“요석공주야. 이리 가까이오너라. 이 아비가 그 동안 너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네 지아비가 조천성에서 전사한 뒤로 내가 아비로서 한 일이 없구나. 오늘 공주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비가 부끄럽구나. 네가 사내대장부로 태어났다면 유비의 제갈공명이나 유방의 장자방 뺨쳤을 듯 싶구나. 이 아비가 공주에게 술을 한잔 내리겠다.”

김춘추는 요석공주의 말에 넋이 나간 듯 보였다.

“아버님, 고맙습니다.”

“얘야, 그동안 정말로 미안했구나. 너의 깊은 속을 몰랐구나. 앞으로는 네가 자주 이 아비를 찾아와 말동무라도 해주렴. 지존의 자리는 정말로 외롭단다. 법민과 인문 그리고 모든 왕자들이 앞으로 너에게 큰 버팀목이 되어줄 것 이야.”

“아버님에게는 두 분 어머님이 계시잖아요. 소녀가 어찌 감히.”

“어쩌면 말하는 것도 이리 예쁠꼬.”

김춘추는 보석을 가까이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무관심에 깊이 후회하는 눈치였다. 김춘추는 연거푸 술 석잔을 요석공주에게 내렸다.

“폐하, 공주가 술을 잘 못하옵니다.”

보희부인이 동생 문명왕후 눈치를 한번 보고 속삭였다.

“부인, 괜찮소. 부녀가 처음 수작(酬酌)을 하는 겁니다. 짐이 오늘 공주의 말을 듣고 눈과 귀가 번쩍 뜨였소이다. 너무 괘념치 마오.”

“언니, 폐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그 동안 고타소 공주의 죽음으로 폐하께서 무척 우울하고 적적해 하셨어요. 내일부터는 요석공주가 폐하를 즐겁게 해드려야 할 것 같아요.”

요석공주의 야무진 말에 대전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왕자, 전군들은 듣거라. 짐이 요석공주를 서둘러 원효스님에게 혼인을 시킬 것이다. 짐의 판단이 옳다면 요석공주는 장차 신라의 동량지재를 탄생시킬 것 이다. 그러니 지금 이후부터 너희들은 요석공주를 깍듯하게 대하듯 할지어다. 이 말은 짐의 지엄한 명이니라. 알아듣겠느냐?”

추상같은 김춘추의 명령에 여러 왕자들은 머리가 방바닥에 닿을 정도로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저희 두 자매는 폐하의 명을 받잡겠나이다.”

눈치 빠른 문명왕후 김문희가 김춘추의 비위를 맞추었다.

“아버님, 소자 법민을 비롯한 아우들은 아버님의 지엄하신 명을 받들겠나이다. 장차 통일된 제국, 신라의 기둥을 생산할 요석공주를 정성껏 보호하고 원효스님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왕자들과 지소 공주는 다시 한 번 부왕을 바라보며, 머리를 조아렸다.

“오냐. 오냐. 법민이와 여러 왕자, 전군들을 믿으마.”

“아버님, 소녀도 언니를 곁에서 보필하겠습니다.”

“그래. 지소야. 너는 언니와 잘 지내야 한다. 그동안 언니와 잘 지냈을 테지만, 이 아비의 뜻을 오늘 알았을 테니 앞으로는 더욱 더 마음을 나누며 지내거라.”

김춘추는 어린 지소공주를 무릎에 앉히고 등을 다독거렸다.

“아버님, 소자 개지문. 누이동생을 그리 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친 오라비로서 앞으로 동생을 더욱 가까이서 챙기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너희들이 비록 전군(殿君) 같기는 하나 이 아비에게는 법민이나 문왕이처럼 다 같이 소중하고 귀한 자식들이다. 누이동생을 잘 보호해주거라. 또한 원효스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거라. 법민은 내일 날이 밝으면 예부(禮部)와 협의해서 요석공주와 원효스님의 혼인 사실을 공포하거라.”

김춘추는 개지문, 지원 등 두 전군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버님께서 예전에 안 하시던 말씀을 하시며, 요석공주와 개지문, 지원 형제에게 크게 관심을 보이시네. 우리 형제들의 효심이 마음에 안 드시는가? 요석공주를 중에게 시집보내시겠다는 부왕의 심사를 이해할 수가 없네, 아무리 나라의 인재를 얻는 일이라 하여도 그렇지 중에게 공주를 하가시키겠다는 말씀이신가? 그것참, 알 수가 없네. 부왕이 노망이 드신 게 분명해. 킁-.’

부왕 김춘추의 행동을 말없이 바라보던 여섯째 왕자 김노차(金老且)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록 배가 다른 동생이지만 김노차는 평소 요석공주를 남몰래 은애(恩愛)하고 있었다. 김노차와 김개지문, 둘은 여러 명의 왕자들 사이에서도 무척 친하게 지내면서 자주 요석궁에 드나들었다. 그렇다보니 자연 요석공주와 각별한 정을 나누고 있었다.

“여봐라. 나인들은 술과 맛있는 음식을 잔뜩 대령하렷다. 짐이 오늘밤 왕자, 전군, 공주들과 취하도록 마시고 싶구나. 속히 대령하렷다.”

신라의 영웅 김춘추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의 명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죽음이 뒤따랐다. 김춘추는 후덕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지만 냉정한 승부사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친자식이라도 자신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가차 없이 제재를 가하였다. 그러나 한번 믿고 정을 주면 끝까지 책임을 지는 성격의 소유자 였다.

“벌도리 스님. 소문 들었어유?”

“아미타불. 개보스님, 무슨 소문을 말하는 것인지요?”

“아따, 스님은. 서라벌 사는 분이 맞아유?”

“나무석가모니불. 허허, 무슨 소문인데 그러는가요?”

서라벌의 크고 작은 불사(佛舍)에 속한 불제자들은 모이면 요석공주와 원효스님 이야기뿐이었다.

“글쎄 김춘추 둘째딸 요석공주가 원효 스님에게 시집을 간다고 합디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유? 그것도 진골(眞骨) 신분의 여인이 육두품 밖에 안 되는 설씨(薛氏) 가문에 시집간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유.”

“나무관세음. 그것참.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구만요.”

요석공주가 원효스님에게 하가한다는 신라 예부의 발표는 서라벌을 요동치게 하였다. 서라벌뿐만 아니라 신라 전역의 불교 종단(宗團)에서 이단아(異端兒) 취급을 받는 원효스님이 요석공주와 혼인을 한다는 조정의 발표는 서라벌 사람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청불 스님, 요석공주가 원효스님에게 하가(下嫁)한다네.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그것도 진골 신분의 여인인 신라의 공주가 육두품 밖에 안 되는 설씨(薛氏) 가문에 시집간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나무광세음. 천지가 개벽할 일이네 그려. 살다보니 별 일을 다보네.”

“지존께서 아마 실성이라도 하신 게 틀림없어. 어떻게 공주를 속승(俗僧)에게 하가를 시킨다는 거야. 말세로세. 말세야.”

스님들은 쉬는 시간이면 삼삼오오 모여서 밖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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