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요지경에 가다

신라 왕실에서는 스님께서 나라를 걱정하시어 미래를 훤히 내다보시고 삼한 일통 후에 나라의 기틀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큰 인재(人材)를 왕실에 선물해 주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그리 생각하였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랜 세월 이 신라라는 나라를 위험에 빠트린 각종 악습과 적폐를 일소하시고자 하는 듯이 있음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되었답니다.

스님, 오늘밤에는 스님이 아니라 저에게 낭군님이세요. 타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일부러 문천교에서 떨어지셨어요. 참으로 잘 오셨습니다. 제가 풋풋한 사과가 아니고 농익은 홍시(紅柿)라서 실망하신 것은 아니시겠죠. 이 방에 들어오신 이상 오로지 저에게 모든 걸 주셔야 해요. 오늘 같은 밤은 저와 이 신라에 천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하는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봅니다.

이 방에서는 부처님도 보살님도 통하지 않는 답니다. 욕정에 사로잡힌 벌거벗은 중년의 남녀가 있을 뿐이에요. 아셨죠? 이제부터 스님이라는 호칭 대신에 출가하기 전의 이름인 서당(誓幢)이라고 부르겠어요. 설서당(薛誓幢). 신라의 자랑스러운 화랑(花郞) 설서당이 이 밤에 신라왕실의 여인이 머무는 요석궁에 드셨습니다. 이 요석궁은 미로 속에 있어서 그 누구도 쉽게 빠져나갈 수 없답니다.”

“아미타불.”

원효스님은 번개에 맞은 것처럼 정신이 반쯤 나간 듯 하였다.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요염하고 색기가 자르르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여인이 이전에 보아왔던 요석공주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부왕의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확신하고 통일 후를 걱정하는 효성이 지극한 신라왕실의 딸로 다가왔다. 자신을 스스로 불살라 살신성인의 경지에 이른 똑똑하고 당찬 여인이라고 생각하게 하였다.

‘음-. 비록 왕실에서 화초처럼 자란 여인이기는 하나 세상을 제대로 내다보는 눈이 있구나.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철딱서니가 없는 공주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당돌하고 맹랑하며, 지혜도 겸비한 왕실에서 보기 드문 여인이야. 그동안 불제자와 신도의 관계를 우리 서로가 설정한 채 지나가는 소를 바라보듯 했지만 오늘 가까이 대하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 이 정도 여인이라면 내 혼신을 기울여 하늘을 떠받칠 든든한 하늘기둥을 깎아도 될 것 같군.’

“스님, 아니 서당랑. 뭐하세요. 요석궁에 괜히 오셨다고 후회하고 계시는 건 아니죠?”

“공주님,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소승은 한번 결심한 일은 뒤로 물리거나 빼지 않습니다. 출가인의 몸으로 공주님 혼자 기거하는 방에 들어왔으니 흔적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당랑,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김흠운에게 하가하던 첫날밤이 생각나네요. 그 사람은 밤새 술에 절어 초야(初夜)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답니다. 어서. 이 거추장스러운 옷 좀 벗겨주세요. 옷을 겹겹이 껴입었더니 땀이 나서 불편해 죽겠어요.”

“아미타불. 알겠습니다.”

원효스님은 일어나 손수 요석공주의 저고리며, 치마 등 공주가 옷 벗는 것을 도와주었다. 당나라 풍의 옷을 좋아하는 요석공주는 여러 겹의 옷을 입고 있었다. 끈을 풀자 요석공주가 입고 있던 흰색과 분홍색 비단 저고리 두 벌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요석공주의 풍만한 젖가슴이 붉은 사(紗)로 된 투명한 속옷을 투과하여 스님의 시야에 들어왔다.

요석공주는 눈을 내리 깔며 스님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공주가 치마끈을 풀자 검정색 바탕에 금박으로 원앙이 수놓아진 비단 치마가 사르르 벗겨졌다. 이번에는 엷은 하늘색의 보드라운 비단 속치마가 하늘거리며 매달린 듯 보였다. 공주가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잡아당기자 하늘색 치마가 물결처럼 벗겨져 내렸다.

마지막 속곳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비단으로 된 것인데 속살이 다 보였다. 스님은 고개를 돌리고 자리에 앉았다. 원숙한 여인의 육덕이 꿈틀거리는 속곳 안에서 화산 열기보다 더 뜨거운 불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공주가 촛불 하나를 입으로 불어 껐다. 화려하게 장식된 큰 방에 촛불이 움직일 때마다 남녀의 그림자가 춤을 추었다.

“서당랑, 우리 건배해요. 그대가 든 술잔에는 술 대신 당나라에서 수입한 차로 우려낸 차가 담겨 있어요. 출가인의 신분이라 격에 맞게 준비하였답니다. 저는 신선들이 마신다는 유하주(流霞酒)를 마실 거예요. 오늘밤 우리 두 사람은 천상에 올라가 선남선녀가 되는 겁니다.

옛날에 서왕모(西王母)가 신궁(神弓)인 예(羿)에게 선물한 복숭아를 예의 처 항아가 몰래 훔쳐 먹고 달나라 섬궁(蟾宮)으로 도망을 갔다지요. 저는 오늘 항아(姮娥)가 된 기분으로 서당님을 모시려 합니다.”

요석공주는 술이 오르는지 양쪽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불자가 선랑(仙郞)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합니다.”

“서당님, 이 요석궁이 서왕모가 살고 있는 곤륜산 요지(瑤池)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서왕모의 딸 요희(瑤姬)랍니다.”

요석공주는 평소에 당나라에서 수입된 도교에 관한 서적들을 자주 접하여 도교에도 상당한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소승은 오늘은 부처님을 잠시 잊고 도교의 지존인 태상노군(太上老君)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소승이 달포 전에 꿈속에서 서왕모가 보내온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어머나. 그래요. 스님은 서왕모와 친하신가 봐요.”

“가끔 몽중(夢中)에서 뵙곤 하지요.”

원효스님은 유쾌하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얼마나 크던 지 밖에서 안을 몰래 훔쳐보던 간전이의 애간장을 녹였다.

“서당랑은 정말로 모르시는 게 없네요. 유불선에 달통하셨어요.”

“유불선은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종교이니 통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거지요. 오늘은 이 서당랑이 신선이 되어 공주님을 데리고 곤륜산(崑崙山) 곳곳을 누비며 새로운 경험을 해볼까 합니다.”

“어머나. 서당랑, 말로만 듣던 꿈속의 산이며, 서왕모께서 거주하신다는 그 산을 정말로 구경시켜주신다는 거에요?”

“신라의 사내들은 일구이언하지 않는답니다.”

원효스님은 부처님 명호를 부르지 않고 합장만 하였다.

“그렇군요. 그럼 어서 술은 마시고 몽롱한 상태에서 꿈길을 달려보고 싶어요. 서당랑, 오늘밤 저는 죽었다고 생각할게요.”

“저는 원래 오늘밤 서당랑과 곤륜산의 요지로 날아가 요지경 속을 두루 다니며, 이전에 맛보지 못한 지극한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요석공주는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는지 말이 약간 어눌했다.

“수미산을 오르든 혹은 곤륜산을 오르든 극락은 매한가지랍니다.”

“어머나, 그래요. 그럼, 오늘밤에는 곤륜산을 다녀오고 내일은 수미산에 가면 되겠네요.”

“공주님, 상상의 산을 가려면 역시 상상력이 풍부해야 하겠지요.”

원효스님은 요석공주를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했다.

“걱정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공주님은 소승이 시키는 대로 따라하시기만 됩니다. 아직은 이르니 좀 더 여흥을 즐긴 후에 시작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어머. 그래요? 전 무조건 서당랑이 시키는 대로 할게요.”

요석공주는 이미 이성을 잃은 듯 원효스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소승이 잔을 올리지요.”

원효스님이 금빛이 찬란한 술병을 들었다.

“제가 스님, 아니지 서당랑이 따르는 술잔을 다 받아보네요. 제 잔에 술이 넘치고 서당랑의 정이 듬뿍 담겨야 이 나라가 편안합니다.”

“그렇습니다. 공주님 잔이 미주(美酒)로 차고 넘쳐나야 신라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원효스님은 즉답으로 요석공주의 환심을 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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