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다

항몽을 주장하던 고려 무신정권의 마지막 권력자인 임유무(林惟茂) 가 황제 왕식(王植)의 밀명을 받은 홍규(洪奎) 등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무신정권이 사라지면서 40여 년간 지속되던 원(元)과의 지루했던 전쟁 이 종식된 것이다.

고려 조정은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였고 태자 왕거(王昛)가 볼모로 원나라로 가야 했다. 외면상 오랜만에 고려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불안정한 평화를 담보로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 돼야 했으며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고려의 황제는 왕(王)이라 호칭되었다. 태자는 세자(世子)로, 황제 스 스로 호칭인 짐(朕)은 고(孤)나 과인(寡人)으로 바꿔야 했다. 또한 관제 (官制)는 축소하거나 원나라와 비슷하게 정비해야 했다. 이로써 대외적 으로 고려의 국격이 현저히 낮아지고 말았다.

고려에 몽고의 풍습이 유 행하였고 원나라에도 고려양이란 이름으로 고려의 풍속이 바람을 일으 켰다. 세자 왕거는 고려왕 왕식과 순경왕후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원나 라에 볼모로 가 있는 동안 23살이나 어린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忽必烈) 의 막내딸인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과 혼인하였다.

왕거는 이 미 14년 전에 정화궁주(貞和宮主)와 혼인하여 아들까지 두고 있었다. 원나라가 고려를 완전히 통합하지 않고 부마국으로 삼은 이유는 원나 라가 공주를 통해 고려를 간접적으로 다스리는데 편한 점이 많다고 판단 해서 였다.

무인정권에서 막 벗어난 상태에서 장차 왕위에 오를 세자 왕 거에게 원나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에 충분했다. 원나라의 막강한 힘 에 국내에서는 맞설 세력이 없었다. 1274년 고려왕 왕식이 붕어하자 고 려 조정에서는 그에게 원종(元宗)이라 시호를 내렸다.

세자 왕거는 원나라에 있다가 부왕의 뒤를 이어 고려 제25대 왕에 등극하였다. 왕거는 원나라에 오래 있던 탓에 원의 풍습과 문화에 익숙해 져 있었다. 그가 고려로 귀국할 때 변발에 호복 차림이었는데 그를 본 신 료들과 백성들은 큰 충격을 받고 탄식하며 목 놓아 울기도 하였다.

원나 라 황제 쿠빌라이를 아버지로 둔 왕비의 권세는 지아비인 고려왕보다 크 고 막강했다. 고려 조정은 왕비 홀도로게리미실을 원성공주(元成公主) 라 하고 그녀를 경성궁(敬成宮)에 거처하게 하였다.

또 그녀에게 경상도 안동 경산부(京山府)를 탕목읍(湯沐邑)으로 하사 하였다. 그녀는 겁령구(怯怜口)라 하여 원나라에서 자신이 부리던 사속 인(私屬人)들을 데리고 고려에 들어왔다. 왕비와 겁령구 들은 고려에서 도 몽고 풍습을 유지하였고 이에 일부 고려인들은 그들의 풍습을 따라 하기도 하였다. 왕비는 재산 증식에 크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고 려에서 산출되는 잣, 인삼, 도자기를 원나라에 수출하여 막대한 이득을 얻었으며 고려의 모시 제조에도 욕심을 냈다. 한 사찰에서 왕비에게 흰 색 모시를 선물했는데 모시의 질이 곱고 아름다워 왕비는 절에서 모시를 짜는 여인을 강제로 데려와 일을 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왕비는 연회를 좋아하였다. 친정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그녀 는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면서 밤새 연회를 즐겼다. 고려인이라도 그녀 와 친분이 있는 자는 죄를 지어도 금방 풀어주었다. 동시에 그녀는 성격 이 매우 엄하여 아무리 측근이라도 조금의 잘못도 용서하지 않았다.

왕 과 혼인한 다음해 9월 그녀는 아들을 낳았고 이름을 왕원(王 謜 )이라 하 였다. 왕자를 낳고 얼마 후 왕은 아들을 낳은 기념으로 축하연을 열었다. 연회에서 왕비와 왕의 첫 번째 부인 정화궁주의 자리가 같은 위치에 놓 이게 되었다. 왕비는 정화궁주의 자리를 아래로 옮기도록 하고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술을 따르게 하였다.

왕이 보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던 해, 왕 내외가 개경 부근 흥왕사(興王 寺)에 행차하였다. 왕비는 겁령구 출신인 시종 홀라대(忽刺 歹 ), 삼가(三哥) 등을 시켜 흥왕사 경내에 있던 금탑(金塔)을 궁궐로 옮기도록 하였 다. 흥왕사 주지와 승려들이 거칠게 반대하였으나 왕비는 모르는 척하 였다.

또 왕 부부가 개경 서쪽 인근의 천효사(天孝寺)를 방문하였을 때 였다. 이때 왕이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궁으로 돌아갔다. 왕비는 환궁하여 왕에게 욕을 하며 지팡이로 왕을 구타하기도 했다.

왕비가 고려의 모든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왕은 정사(政事)에 흥미를 잃고 미녀들과 음주와 가무, 사냥 등에 빠져들었다. 그럴수록 왕 과 왕비 사이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전라도 태인(泰仁)은 백제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충절의 고장이었다.

이곳 출신 송군비(宋君斐) 장군은 20년 전 차라대(車羅大)가 이끄는 몽고군이 전라도 연안 도서를 침공하자 이를 저지하고 적장 4명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송군비 장군의 문중 인사들 중 송린(宋璘), 송송래, 송분 등이 고려 조정 내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왕을 지지하는 국내파의 중심이 되어 가고 있었다.

또한 태인에는 백제시대부터 터를 잡고 살던 허씨(許氏)들이 살고 있 었다. 현종, 문종, 선종, 예종, 인종, 의종의 왕비와 후궁이 모두 태인 허 씨의 후손이었다. 허씨들 중에서 일부가 인주 이씨로 역성(易姓)하였고 그 중 이자겸의 딸들이 왕비로 간택되면서 그는 권세를 잡기도 했다.

송 씨와 허씨들이 단합하여 점차 고려 조정의 실세로 부상하였다. 이 고장 출신인 궁인 시무비(柴無比)는 그들의 세력을 등에 업고 왕의 사랑을 독 차지 하였다.

태인 지방에서 정읍사, 선운산, 방장산, 지리산 등 흥겨우면서도 웅장 한 백제 노래가 전승되고 있었다. 궁인 시무비는 본래 전라도 태인에 사 는 시씨(柴氏)의 딸인데 빼어난 미인이었다.

게다가 가무(歌舞)에 있어 서는 고려에서 그녀에게 대적할 여인이 없었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재주는 왕의 눈에 들었고 곧 애첩이 되어 총애를 받게 되었다. 왕에게는 무비가 궁에 들어오기 전부터 반주(盤珠)라는 여인이 있었지만 나이가많았다.

무비가 왕의 총애를 입게 된 배경에는 환관이면서 장군의 직첩 을 받고 왕과 무비를 그림자처럼 호위하는 도성기(陶成器)가 있었다. 도 성기 역시 태인이 고향으로 일찍부터 무비와 교류가 있었다. 그는 음악 적 소질이 뛰어나 무비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쳤다.

“무비야, 과인은 네가 있어 하루하루 힘든 줄 모르고 살고 있다. 언제 나 과인의 곁에 있어야 한다. 네가 곁에 없으면 왠지 허수하고 불안하다. 오늘밤은 저 달이 도라산(都羅山)을 환하게 밝히는구나. 과인을 위하여 가무를 보여줄 수 있겠느냐?”

왕이 무비의 나긋한 허리를 껴안고 잔을 비웠다.

“폐하, 당연히 소첩이 폐하를 기쁘게 해드려야지요. 저 달님도 폐하와 소첩의 연희를 구경하러 나오셨나 봅니다. 그리고 폐하, 요즘 너무 새침 해 하세요. 왕비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원나라의 간섭은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용기를 잃지 마시어요. 소첩은 언제나 폐하의 곁에 있을 것이 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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