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몽고 공주의 질투

원나라 공주 출신 왕비가 지아비인 고려의 왕을 욕하고 하대하는 것을 아들이 보고 배운 것이었다. 왕원의 눈에 부왕은 이미 고려의 왕이 아니었다. 왕은 아들에게 고려의 왕위(王位)를 위협받는 한심한 처지가 되었 다. 안하무인인 왕비와 왕원에게 무비와 그녀의 측근들은 눈엣가시였다.

왕에게는 왕비, 정화궁주, 애첩 반주가 있었지만 왕은 무비가 궁으로 들 어온 뒤로 그녀들을 멀리하였다. 무비를 제외한 왕비나 후궁들은 나이도 많고 믿을 만한 성품이 못되었다. 왕은 왕비와 친원파 중신들을 견제하 는데 국내파만 한 세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왕이 한 달 가까이 출 타해 있다가 만월궁으로 돌아왔다.

“친정아버님 병환이 깊습니다. 친정에 다녀올 테니 그리 아세요.” 성정이 강파른 왕비는 오랜만에 사냥터에서 돌아온 왕에게 한마디 던지고 경성궁으로 돌아갔다. “과인이 왕비와 원나라에 입조할 것이다. 차비를 하라.”

왕은 왕비만 보내려고 하였으나 생각을 바꿔 왕비와 함께 가기로 하 였다. 왕의 어가(御駕)를 중신 조인규, 민지, 원경, 홀라대 등 문무 관료 팔십 명이 호종했으며, 왕비는 금은보화와 양가집 규수들을 공녀로 뽑 아 데리고 갔다. 왕 부부의 행차를 따르는 무리들만 수백 명이었다.

원나 라 황제 쿠빌라이는 징기스칸의 손자로 조용하면서도 투철한 성격의 소 유자였다. 그는 원의 제4대 황제인 형 몽케(蒙哥)가 정복 전쟁 중에 사 망하자 1260년 내몽골 지방의 상도(上都)에서 열린 쿠릴타이(忽里勒台) 에서 몽고의 제5대 황제에 추대되었다.

쿠빌라이는 어려서는 별로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낼 때 까지 툴루이(拖 雷) 가문의 핵심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그는 둘째 아들이었으며 황권 계 승에서도 모호한 위치에 있었다.

쿠빌라이는 국호를 원(元)이라 고치고 제국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등 극한지 20년 후에 남송(南宋)을 멸망시켜 대륙을 통일하였다. 북위(北 魏)나 북제(北齊)와 같이 이민족이 대륙의 일부를 차지한 경우는 있었지 만 원나라처럼 대륙 전체를 통일한 왕조는 없었다.

쿠빌라이는 대륙 남동부 연경에 도읍지 대도(大都)를 건설하였다. 그는 가을과 겨울에는 대 도에서, 봄과 여름에는 내몽골에 위치한 상도(上都)에서 지내며 원제국 을 통치하였다.

그가 건국한 원제국 중앙관제에 당송(唐宋)의 전통에 따라 중서성, 상 서성, 추밀원을 설치하여 내정, 재정, 군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쿠빌라이 는 몽고 출신이지만 중국 왕조의 군주나 다름없었다. 고려왕이 원나라의 사위가 되고 나서 원나라는 2차례에 걸쳐 왜(倭)를 정벌하기 위한 전쟁 을 일으켰다.

물론 그때 동원된 군사와 군수물자 대부분은 고려에서 동 원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왕비는 친정인 원나라에 갈 때마다 고려에서 산출한 온갖 귀중품과 강제로 차출된 공녀를 데리고 갔다. 그 피해가 어 찌나 컸던지 이때부터 고려에 조혼(早婚)이 성행하였다.

왕과 왕비가 원나라에 머무는 동안 쿠빌라이가 죽고 그의 손자인 보 르지긴 테무르가 원제국의 새로운 황제에 등극하였다. 원나라 조정에서 죽은 쿠빌라이에게 묘호로 세조(世祖)라 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황제 에 오른 테무르는 쿠빌라이의 차남인 명효태자 친킴(眞金)의 아들로 고 려 왕비 홀도로게리미실의 조카이기도 했다. 유목민인 쿠빌라이의 가계 는 무척 복잡하였다.

쿠빌라이에게는 15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이들에게 서 11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을 보았다. 새로 황제가 된 테무르의 아버지 친킴은 쿠빌라이의 여러 부인 중에서 두 번째 정후(正后)인 소예순성황 후 차브이(察必)의 소생이었다. 고려 왕비가 된 홀도로게리미실은 쿠빌 라이의 14번째 부인이며, 후궁인 아속진가돈(阿速眞可敦)의 외동딸이었다. 원나라 황실에서 홀도로게리미실은 그리 큰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원제국은 새로운 황제 테무르가 집권하였지만 황족들 간의 권력투쟁 은 계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쿠빌라이 친정 체제 때보다 변방에 대한 통 치력이 약화되는 조짐이 보이기도 했다. 고려는 쿠빌라이 사후에 특이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친원파와 국내파간의 암투는 더욱 치열하게 전 개되고 있었다.

“왕비마마, 소신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삼가가 원나라에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울적해 하는 홀도로 게리미실에게 속삭였다.

아버지 쿠빌라이의 죽음은 원나라 황실에서 가 뜩이나 낮은 그녀의 위치를 더욱 떨어트렸다. 자신을 귀여워하던 아버지 가 없으니 원나라에 정 붙일 일도 사라졌다. 대도에서 돌아온 왕비는 자 주 술을 마시며 쓸쓸한 밤을 맞이하였다. 왕은 여전히 무비를 비롯한 후 궁들뿐만 아니라 기녀(妓女)들과 살을 섞으며 열락의 밤을 보내고 있었 다. 왕비의 고독은 날로 더해갔고 한숨은 밤새 이어졌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군요. 경이 잘 엮어보세요.”

“신은 마마를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왕비의 최측근인 삼가(三哥)는 왕비가 흐뭇해하는 모습을 보며 어깨 를 으쓱거렸다. 여러 겁령구가 있지만 왕비는 삼가를 가장 총애하였다. 또한 눈치 빠른 삼가는 왕에게도 호감을 사는 바람에 왕에게서 자주 부름을 받기도 하였다.

삼장사에 불을 켜러 갔더니만 그 절 지주 내 손목을 쥐었어요…….개경에 이상한 노래가 유행하고 있었다. 제목을 삼장(三藏)이라 하였 는데 그 내용을 보면 스님이 유부녀를 유혹하여 밀통하는 내용으로 너무 노골적이었다. 자극적이고 외설스러운 내용이어서 그런지 유녀(遊女)들 입을 통하여 주루나 유곽으로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그 노래가 개경의 삼척동자들 입에도 오르내릴 만큼 유명세를 타는 데에는 무비가 연루되 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삼가에게 사위가 있었는데 고려 조정에서 낭장 벼슬을 하는 이곤(李琨)이라는 자였다. 이곤은 칠척장신에 상당한 미남 이었다. 무비가 어느 날, 개경 외곽에 있는 삼장사에 불공을 드리러 갔는 데 그 절에서 이곤과 눈이 맞아 간통을 했다는 풍문이 왜자하였다. 그 풍 문은 금방 친원파 중신들의 귀에 들어가고 그들은 무비를 비난하였다.

“전하의 총비(寵妃)가 어찌 그 같은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총비가 창녀 같은 짓을 하다니 그년을 궁궐에서 내쫓아야 합니다. *계속

 

 

저작권자 © 남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