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무비의 정면돌파

친원파 중신들은 연일 왕을 알현하고 무비의 파렴치한 행위를 규탄하 였다. 그들 뒤에서 왕비는 숨을 죽이며 왕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러나 왕은 그 같은 소문 뒤에는 왕비와 친원파 세력들의 음모가 있을 것 으로 추측하고 짐짓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지금 개경에 나돌고 있는 삼장이라는 노래는 홀라대나 삼가 혹은 김양감 같은 자들이 퍼트리는 게 확실합니다. 그 노래는 벌써부터 떠돌던 노래인데, 노래 내용을 시비마마와 연관 지은 것은 그들이 마마를 곤란 하게 만들려고 하는 비열한 수작입니다.”

지공거(知貢擧)로 있는 송린이 침을 튀겼다. 밤에 송린의 집에 모인 국내파들은 침통한 모습이었다. 환관이면서 대장군에 제수된 도성기와 환관 최세연, 전숙, 방종저 등은 무비의 눈치를 보며 그녀의 입에서 무슨 대책이 나올지 궁금해 하였다. 이 노래로 자칫 무비가 왕의 눈 밖에 난다 면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폐하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시비마마, 무슨 묘안이라도 있으신지요?”

대장군 도성기가 무비에게 물었다.

“이런 경우에는 정면 돌파가 답입니다. 폐하께 없는 일을 만드는 자들을 잡아다 국문(鞫問)을 열라고 말씀드릴 겁니다.”

무비의 당찬 대답에 일행들은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친원파 대 신들이 직접적으로 자신들을 음해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모임이 파한 뒤에도 무비는 이곤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내가 한 달 전에 삼장사에 불공을 드리러 우연히 갔다가 돌아오는 길 에 그자를 만나 술 한 잔 마신일 말고는 특별한 것이 없는데 추잡한 노 래에 나를 결부시키다니, 참으로 치사하고 사내대장부답지 못한 자로다. 그자가 예전부터 음흉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곤 했었지만 나는 그자를 무시하고 말았지. 몽고년이 이제 나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려 하는구나. 그렇다고 내가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나쁜 년. 누가 이기나 두고 보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무비는 날이 밝자 왕을 찾아갔으나 왕은 간밤 에 연회를 열어 밤늦게까지 마신 술로 인해 늦게 기침하였다. 왕은 궁중 에서 자주 주연을 즐겼다. 왕에게 왕비와 무비, 반주가 있었지만 왕은 밖 에서 미희(美姬)들을 불러들여 주연을 즐기기도 하였다. 미희들은 대개 개경이나 서경에서 가장 잘 나간다고 소문난 기녀들이었다.

주색을 탐하는 왕은 무비 한명으로는 하해와 같은 음욕을 해소하지 못했다. 궁인이 아닌 기녀들은 왕과 밤새도록 극락과 지옥을 오르내리다가 동틀 무렵이 면 내관들의 보호를 받으며 궁성을 빠져 나갔다. 두 눈이 우멍한 왕은 무 비를 보더니 덥석 안고 이불을 덮었다. 왕의 음심은 끝이 없었다.

“폐하, 요즘 개경에 유행하는 삼장이라는 노래를 아시는 지요?”

“그렇지 않아도 과인이 그 노래 때문에 너를 부르려 하였다.”

“폐하, 그 천박한 노래는 누군가가 소첩을 음해하기 위하여 유행시키 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항간에는 회회인(回回人) 이곤이라는 자가 소첩 과 간통하였다는 해괴망측한 풍문도 돌고 있다하옵니다. 그자를 잡아다 문초해 보시면 폐하의 궁금증이 풀리실 겁니다.”

“과인은 너를 믿는다.”

“폐하, 소첩은 그 이곤이라는 자를 죽이고 싶도록 밉답니다.”

“알았다. 과인이 친히 이곤을 잡아다 문초해 보겠다.”

원나라는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이었다. 원나라 조정은 백성을 크 게 4종류로 분류하였다. 몽골족을 1등급으로 하여 지배층으로 하고 색목 인(色目人)을 2등급으로 하여 지배층으로 하였다. 한인(漢人)은 3등급 으로 여진족, 돌궐족 등 금나라 백성들이었으며, 남인(南人)은 4등급으로 원나라에게 멸망당한 남송(南宋) 백성들인데 3,4등급은 피지배 계층 이었다.

“폐하, 이곤은 소신의 사위입니다. 소신이 특별히 교육을 시켜 폐하께 충성을 다하도록 할 터이니 이번 한번만 특별히 성은을 베푸소서.”

왕이 낭장 이곤을 잡아다 친국한 결과 그가 무비와 간통하였다는 풍 문은 사실이 아님이 판명되었다. 이에 왕은 대노하여 이곤을 처형하라 고 하였으나 삼가(三哥)가 왕을 알현하고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애걸하 였다. 삼가와 이곤은 왕비가 몽고에서 데리고 온 겁령구였다.

여러 겁령구들이 있었으나 특별히 삼가는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삼가 는 원과 고려 사이에 정치나 군사적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나서서 난제를 해결해 왔다. 이에 왕은 그에게 장(張)씨 성과 순용(舜龍)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장순용과 그의 사위 이곤은 회회인이었다. 회회인은 원나라 의 백성이 된 페르시아나 투르크 등 이슬람계통의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었다. 장순용은 왕비와 왕에게 동시에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

“과인이 경의 체면을 봐서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리다.”

왕비는 삼장이라는 외설스러운 속요를 퍼트려 무비를 곤란한 지경으 로 몰아넣으려는 계획이 실패하자 크게 실망하였다. 왕비는 이번에야말 로 눈엣가시 같은 무비를 궁궐에서 쫓아내 왕의 사랑을 되찾고 싶었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애꿎은 나인들에게 짜증을 내거나 때리기도 하였 다. 그녀의 왕에 대한 분노는 더욱 커지고 질투심은 극에 달하였다.

“경은 친원파 세력들을 만나서 무비년을 제거할 묘수를 짜보세요. 왕 에게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조잘대는 그년을 나는 더 이상 보기 싫습니 다. 뾰족한 수가 없다면 자객을 시켜서라도 야지랑스러운 그년의 숨통을 끊어 놓으세요.”

“왕비마마, 송구합니다.”

회회아비 장순용은 무조건 생각 없이 왕비의 말을 듣는 꼭두각시는 아 니었다. 세상 경험이 많은 그는 왕비가 내리는 이러저러한 명령을 한번 걸러내고 다듬어 매사를 철저하게 추진하는 성격의 소유자인 반면에 홀 라대는 덤벙대는 성격이었다.

“왕비마마, 조금만 말미를 주시면 묘안을 짜보겠습니다.”

홀라대가 두 손을 비비며 왕비에게 굽실거렸다.

“두 사람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비년을 제거할 방도를 만들 어 보세요. 일을 추진하다 그년이 죽어도 좋습니다. 그년뿐만 아니라 그 년을 돕고 있는 송린, 도성기, 최세연 등 국내파 놈들도 동시에 처낼 수 있는 묘안이라야 합니다.”

궁중에서 국내파와 친원파 들은 서로 얼굴 보기를 기피할 정도로 각을 세우고 있었다. 왕이 왕비를 멀리하면 할수록 그 대립각은 높아만 갔다. 왕비에게는 무비뿐만 아니라 후궁 반주와 왕이 궁궐 밖에서 불러들이는 기녀들 역시 응징의 대상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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