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후손에게 잊혀진 고려의 영웅들

왕원의 명령에 개경은 벌집 쑤셔놓은 듯 시끄러웠다. 순식간에 무비와 국내파 대소신료들이 왕비 모살죄(謀殺罪)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무 비를 비롯한 국내파들은 손 쓸 틈도 없었다. 다음날, 해가 뜰 무렵 감옥 에 잡혀온 자들이 50여명이 넘었다.

윤길손, 이무, 소윤, 승시용, 송신단, 김인경, 문완, 장우, 김근, 전숙, 방종저 등 무비의 측근들도 모두 잡혀 왔 다. 일단 잡혀온 자들은 불문곡절하고 곤장부터 맞아야 했다. 곤장 열대 만 맞으면 건장한 사내라도 거의 혼절 상태가 되기 마련이었다.

왕은 왕 비의 장례를 치르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밤마다 주지와 육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아침에 세자는 감옥에 갇혀 있는 무비를 찾아왔다. “세자, 부왕의 총애를 입은 나를 어찌 이렇게 대할 수 있습니까?”

“이년, 아가리 닥치지 못할까? 네년의 사주를 받은 무당년이 어마마마를 저주하고 초비라는 년을 시켜 어마마마를 독살했으렷다. 네년과 네년 의 측근들은 대역죄를 지었다. 모두 참수할 것이다.”

“세자, 무엇을 잘못알고 있습니다. 나와 왕비마마의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왕비에게 해가 되는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느냐? 연희라고 하는 나인이 모두 불었다.”

왕원은 무비에게 달려들어 죽일 듯 길길이 날뛰었다. 곁에서 있던 측 근들이 말리지 않았으면 당장 칼로 무비를 해쳤을 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태였다.

‘연희, 그 애까지 숨겼어야 하는 건데……. 나의 불찰이로다. 이렇게 된 마당에 우리 국내파를 구명해 줄 사람은 폐하 밖에 없어. 어서 폐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해.

그러나 어떻게 폐하께 이 사실을 알려드려야 하나. 답답한 노릇이구나. 만약 연희가 모든 사실을 불었다면 나를 포함하여 우리 국내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게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

무비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연희가 배신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다. 믿었던 시비(侍婢)에게 허를 찔리고 만 것이었다. 형조 앞마당에 추국장이 마련되었다. 추국은 국왕이 직접 강상(綱常)의 죄를 지은 자나 대역죄 같은 중대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시행하게 되어 있었다.

왕이 참 석할 수 없는 경우에는 왕명을 받아 시행하는 것임을 알리는 절차가 있 어야 하나 왕원은 모든 절차를 생략한 채 직접 추국을 주도하였다. 세자는 추국장을 열면서도 부왕에게 일절 보고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중신들은 한두 번 세자에게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말을 했으나 세자는 중신들의 말도 무시해 버렸다. 계속해서 국내파 소속으로 알려진 대소신 료, 내시, 궁인 그리고 일반인들 까지 추국장으로 잡혀왔다. 이미 그 수가 200여명을 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전부터 친원파 들이 파악하고 있던 명단에 근거하여 잡혀온 것이었다. 추국장에 끌려온 자들은 곤장을 치는 장면과 비명에 겁을 집어먹고 반쯤 정신이 나가있는 상태였다.

“도성기, 네놈은 환관으로 있다가 부왕이 장군이라는 직책을 주었더니 간악한 년에게 빌붙어 감히 국모인 어마마마를 음해하였도다. 네 죄를 인정하느냐?”

“나는 몽고여인을 국모로 둔 적이 없소. 탐욕스럽고 무례한 몽고여인을 고려에서 제거하려 했을 뿐이오.”

세자는 도성기의 말에 펄펄 뛰었다.

“김근, 네놈은 중랑장의 벼슬을 하면서 무엇이 아쉬워서 국모를 시해하는 역모에 가담하였느냐?”

“나 역시 무지하고 탐욕스러운 몽고의 천한 여인을 내치려 했을 뿐이 오. 나에게 국모란 정화궁주 밖에 없소이다. 또한 원나라 대도에 머물며 몽고인들에게 아부하고 충성하는 자를 고려의 왕세자로 생각해본 적도 없소이다. 내가 생각하는 고려국의 왕세자는 궁주의 아드님이신 강양공 왕자(王滋)님이시오.”

왕원은 김근의 말에 크게 충격을 받고 휘청거렸다. 왕원은 고려의 세 자 신분임에도 늘 원나라에 가 있는 것이 마음의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 었다. 김근이 그의 아픈 곳을 건드리고 말았다. 하루 종일 잡혀온 자들에 대한 국문이 이어졌는데 그들의 비명이 만월궁의 담장을 넘어 개경 저자 거리 까지 들렸다.

“세자가 국내파들을 잡아다 국문을 한다는군.”

“여러 명 죽겠군. 왕비가 독살 당했다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무비와 도성기, 최세연 등 왕을 지지하는 자들이 벌인 일이래요.”

“미인박명이라고 하더니 아이고, 절세가인 시무비가 아깝구나.”

“왕비를 저주하고 굿을 한 무녀를 잡기 위하여 군사들이 아랫녘으로 내려갔대. 또 왕비가 먹는 음식에 독을 탄 초비라고 하는 나인도 잡으려 고 군사들이 뒤를 쫓고 있다는 군. 그들이 잡히지 말아야 하는데.”

“그 두 여인들이 잡히면 일이 만천하에 드러나겠구먼.”

“세자가 오기 전에 원나라에 부역한 놈들도 모조리 죽였어야 하는 건데, 참으로 아쉽게 되었네 그려.”

“원나라에 가 있던 왕원이 무슨 자격으로 추국장은 연다는 거요? 부왕 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마치 자신이 왕이 된 것처럼 행동하다니 참으로 망조로다.”

개경의 백성들은 궁성 앞에 모여 소문으로 들은 이야기를 나누느라 웅 성거렸다. 소문은 점점 더 크게 확대되어 개경 저자거리에 금방 왜자했 다. 사나흘 동안 궁성은 피비린내와 비명이 난무하여 신료들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일을 봐야 했다.

초비와 무녀 천옥을 잡으러 갔던 군사들 이 나흘 만에 돌아왔다. 천옥과 초비는 어찌나 매를 심하게 맞았는지 이 미 반쯤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네년은 온갖 사악한 방법으로 고려의 국모인 왕비마마를 저주하였으렷다. 이실직고 하면 정상을 참작해주겠다.”

“나는 고려 백성의 피와 살을 먹고 사는 몽고의 악녀를 저주했을 뿐이 오. 그 몽고 여인은 고려의 국모가 아니오. 고려 백성들의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소.”

왕원은 분을 참지 못하고 칼을 빼서 단칼에 무녀 천옥의 목을 베었다.

“네가 초비라 하였느냐? 너는 모후가 가장 신임하였거늘 어찌 인두겁을 쓰고 어마마마를 독살하였더냐?”

“소인은 고려 왕비를 해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고려 백성의 등골을 빼먹는 몽고의 악녀를 단죄하였을 뿐입니다.”

초비는 이미 삶을 포기한 듯 했다.

“네년의 악행을 이미 다 알고 있거늘 감히 독사의 혓바닥을 놀려 나를 속이려 들어? 이년을 인두로 지지고 살을 발라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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