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신라의 청년 당나라 전장에 뛰어들다

“장한지고. 과연, 하늘의 문창성이 신라에 강림한 것이 맞도다. 이는 최씨 가문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신라의 자랑이며, 만백성에게는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도다. 즉시 최치원에게 과인의 치하를 전 하는 친서를 보내도록 하시오.”

신라왕 김응렴은 해운의 장원급제 소식을 접하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질투심 많은 진골 출신 중신들은 애써 모르는 척 하였다.

“부인, 그동안 고생 많았소이다. 이제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치원이 십년 걸릴 줄 알았던 장원을 사년이나 앞당겨 차지하였습니다.”

견일은 지어미의 손을 잡고 그간의 공을 치하하였다.

“나무아미타불. 두 분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출가인 현준도 본가를 찾아와 부모님을 격려하였다. 지아비와 출가한 아들의 축하를 받으면서도 해운의 어머니는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소식 을 듣고 최씨 문중의 사람들이 견일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최씨 문중 사 람들뿐만 아니라 조정의 벼슬아치와 견일과 친분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 람들 그리고 서라벌 사람들이 몰려들어 견일의 집은 발 디딜 틈이 없었 다. 견일은 몰려드는 축하객들을 위하여 소를 잡고 술과 음식을 준비하 였다.

당나라 시인이며 해운 최치원의 문우인 고운(顧雲)은 시를 지어 벗의 빈공진사과 장원을 축하하였다. 함께 신라에서 유학 온 동료들도 해운의 장원을 다 같이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다.

발해 출신 유학생들은 한동안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하였다. 그러나 해운이 18세란 어린 나이 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당 조정에서는 해운에 대한 관직 임명을 미루었다.

그는 낙양에 머물면서 당나라 시인묵객들과 어울려 창작에 전념하였 다. 해운은 금체시(今體詩)에 관심을 가지고 창작을 하였고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때 지은 시가 부 5수에 시 100수, 잡시부 30수로 모 두 3편을 이루었다.

빈공진사과 장원이라는 영광도 잠시였다. 금방 모든 영광이 사라지는 듯 하였다. 해운은 날로 더해가는 외로움을 함께 할 사람이 곁에 없다는 것을 가슴 아파하였다. 빈공과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였기 때문 에 장원 급제하였더라도 당나라에서는 크게 대우해주지 않았다.

국자감 을 나온 해운은 당나라 관아에서 문서를 작성해 주거나 고관들의 글을 대필해주며 근근이 밥벌이를 하는 어려운 처지였다. 2년 후, 해운은 강소성 (江蘇省) 선주(宣州) 율수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해운의 기대와 달리 현위는 미관말직이었다. 낯선 고장에서 벼슬하기란 녹녹치 않았다. 해운이 신라인이라는 것이 지방 고을을 다스리는데 큰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심정을 그의 글에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내가 이름도 모르는 당나라 촌구석에서 미관말직이나 하려고 그 고생 을 하였단 말이냐? 이것은 아니다. 내가 꿈꾸었던 삶이 아니야. 차라리 신라로 돌아가 벼슬을 하는 게 좋겠어. 그러나 자식의 금의환향을 기대 하고 계실 아버님과 어머님, 형님 그리고 수많은 서라벌 사람들을 생각 하면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해운은 여러 날 동안 심각하게 자신의 장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당나라 사람들은 외국인을 은근히 천시하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해운은 현위 직을 그만 두고 더 높은 관직을 오르기 위해 박사굉사과(博士宏詞科)라 는 시험을 준비하기 위하여 종남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후 황소가 일으킨 전란으로 인하여 박사굉사과가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해운은 절망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 그나마 나오던 봉급이 끊기 자 당장 숙식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해운은 양양(襄陽)에서 이위(李蔚)의 문객(門客)으로 들어가 밥을 얻어먹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자 시험도 포기하고 벼슬자리를 찾아 나섰다.

“회남절도사 고변을 내가 잘 알고 있네. 자네를 소개해 줄 테니 자기소개서와 공직 신청서를 나에게 써주시게.”

고운이 해운에게 관직을 추천하였다. 사고무친의 해운은 고운의 제의 를 무시할 수 없는 처지였다. 만약 황소의 반란군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당나라 관리를 역임하였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해운은 문우인 고운을 통해 회남절도사 고변(高騈)에게 관직 청원서와 자기 소개서를 제출하였다. 고운은 이미 고변의 참모로 일하고 있었다.

이때가 황소가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전역이 전란에 휩싸여 있을 때였 다. 고변이 황소의 난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게 되자 고운도 함께 참전하 였다. 해운은 곧 고변의 관역순관이 되었다.

고변이 황소의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통이 되고 해 운은 그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표(表), 서계(書啓), 격문(檄文) 등의 문 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고운의 소개로 절도사 고변의 참모가 된 해 운은 차차 안정을 찾아갔다. 학철부어(涸轍鮒魚)의 다급한 상황에서 벗 어난 해운은 물을 만난 고기와 같았다.

고변은 태위로 승차되었는데 정 승의 반열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감사의 표문을 해운에게 의뢰하였다. 또한 그는 해운에게 다양한 공문서 작성 및 보고서 등을 위임하면서 해운은 고변의 깊은 신임을 받게 되었다. 해운은 행운아였다.

절도사 겸 제도행영병마도통인 고변은 최치원을 절도사 직속의 관역순관에서 도통순 관으로 바로 승진시켰다. 그는 황제에게 상주하여 해운이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내공봉(內供奉) 등 세 개의 직첩을 제수 받게 하고 포상으로 비어대(緋魚袋)까지 하사받도록 주선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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