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귀녀(鬼女)와 운우지정을 나누다

 ‘한 쌍의 밝은 옥이요, 두 줄기 서기 어린 연꽃이로다.’

해운은 두 여인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얼른 고개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하자 두 여인도 고개를 숙여 해운에게 응대하였다.

“저희 자매가 수재님을 뵙습니다.”

“바다 건너 신라에서 온 보잘 것 없는 말단 관리입니다. 제가 외람되게 도 어찌 선녀님들을 만나리라 기대나 했겠습니까? 제가 애틋한 마음에 서 지은 시였는데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두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희는 율수현 초성향 장씨 가문의 딸들입니다. 선친께서 호족으로 부유하였고 무척 사치하셨습니다. 언니 나이 열여덟, 제 나이 열여섯 살 때 선친께서 저는 소금 장수, 언니는 차(茶)장수와 강제로 혼인시키려 하였습니다. 저희 자매는 신랑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앞날을 걱정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울화병이 나서 갑자기 세상을 하직 하게 되었답니다.

지난 오백년 동안 저희 무덤 앞을 지나가는 사내는 수 도 없이 많았지만 모두가 저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행히 수재님을 뵈오니 기상이 금오산(金鼇山)같이 빼어나시어 현묘한 세상의 진리를 함께 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세 사람의 인연은 하늘이 맺어주신 게 틀림없습니다.”

해운이 두 여인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수재님, 저희 자매를 이해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해운은 팔낭과 구낭을 초현관으로 초대해 밤새 술을 마시며 시를 지어 유쾌한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술이 몇 순배 오고가고 모두 얼근 하게 취하자 취금이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흥을 돋웠다. 해운과 두 여인 은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끌리는 춘정이 솔솔 피어오르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새벽이 되어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옛날 한나라 범양 사람 노충(盧充)은 최소부의 무덤가에서 사냥하다 가 선연(善緣)이 있어 최씨녀를 만났고 후한 시대의 완조(阮肇)는 신선 술을 익히다 두 가인을 얻어 배필로 삼았다 했습니다. 두 낭자께서 허락 하신다면 좋은 인연을 만들고 싶습니다.”

해운의 말에 두 여인은 흔쾌히 승낙하였다. 해운은 너무 기뻐서 깨끗 한 베개 세 개를 나란히 놓고 이불 한 채를 덮고 누우니 밤새 그 즐거움 을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이 함께 어울려 태산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深海)로 빠져들면서 밭은 숨을 토해 내기 도 하였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게 마련이었다. 물이 끓다가 모두 증발해 버리면 순식간에 주변은 불길에 휩싸이면서 오묘한 경지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물에서 불이 나오고 그 불속에서 잘 정제된 정수가 솟아나오기도 하였다.

비록 두 개의 음과 하나의 양이 비율로 맞지 않을 것 같지 만 두 개의 음이 한 덩어리가 되어 다른 하나의 양과 합쳐지면서 유일무 이(唯一無二)의 지극한 열락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무극의 상태도 결 국은 음양 혹은 양음에 기인하여 유(有)로 화하기도 하고 무(無)가 되기도 한다.

삼라는 눈에 보이는 것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나 혹은 생 이 있거나 생각이 없는 것이나 두개의 상합(相合)으로 귀결된다. 청춘 남녀의 찰나는 너무 허무하였다. 새벽 첫닭이 울면서 동이 트기 시작하 였다. 팔낭이 정색을 하고 앉더니 해운에게 심원음(深遠音) 1) 으로 말하였다.

지극한 즐거움 뒤에는 허전함이 오고 별리는 오래가고 상봉은 순간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빈천한 지위를 떠나 모든 사람들이 가장 힘들고 가 슴에 통한으로 남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희 자매와 수재님 사이에 는 생사(生死)라는 담장이 가로막고 있어 가야하는 길이 다릅니다. 저희 는 밝은 낮을 부끄러워하며 청춘을 헛되이 보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수재님과 함께한 이 밤으로 인하여 저희 자매의 오백년 한을 풀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서왕모께서 우리 자매를 여선의 자리에 앉혀 주실 것 같습니다. 수재님과 함께한 잠자리가 참으로 좋았는데 헤어져야 하니 너무나 아쉽고 슬픕니다.

만일 수재님께서 저희 무덤 앞을 지나가시거든 무덤에 고운 시선 한번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해운은 자신 있게 대답하 였다. 자매의 눈에는 눈물이 갈쌍갈쌍하였다.

“두 분은 슬퍼하지 말아요. 언젠가 나 역시 천경(泉扃)에 들게 됩니다. 그 전에 자주 만나야지요. 하룻밤은 너무나 아쉽고 미련이 남습니다. 내 가 이 고장에 있는 한 두 분의 유실(幽室)을 자주 찾아 보살필 겁니다.”

해운의 말이 끝나자 자매가 일어나 해운에게 울면서 절을 하고 금방 연기처럼 사라졌다. 다음날, 해운은 자매의 쌍분을 찾아 하루 종일 멍하 니 앉아 주고받은 시를 읊조리며 허탈해 하였다.

“해운, 뭘 그리 장시간 골똘히 생각하시는가, 어디 불편하신가?”

해운이 두 낭자를 보고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자 고운은 해운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 아무것도 아닐세. 잠시 옛 생각이 나서.”

“두 분 대인 어르신, 소녀들 잔 받으셔요.”

팔낭이 해운에게 술을 따르고 구낭은 고운의 빈 잔을 채웠다. 해운은 떨리는 손으로 술을 받으면서도 아무래도 귀신에 홀린 기분이 들었다.

1) 심원음(深遠音) - 말소리가 뱃속에서 울려나와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리게 함.

 독한 술이 또 서너 잔 뱃속으로 들어가자 해운은 취생몽사의 상태가 되 고 말았다. 그 상태에서도 해운은 두 여인의 정체를 확실히 알고 싶었다.

‘이 두 여인이 사람인가? 아니면 귀신인가? 귀신이라면 내가 즉석에서 시를 지어 비석에 붙여 놓은 7언 율시 중 둘째와 여덟 번째 시구(詩句) 를 알 테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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