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하늘이 해운을 돕다

 팔낭은 말에 거침이 없었다. 천상의 여인들이라 이리도 해박하단 말인 가? 고운은 대취한 상태에서도 취하지 않은 척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백, 두보, 유종원도 넘을 수 없다? 그뿐인가?”

해운의 문장이 당나라의 자존심인 이백과 두보 그리고 유종원 보다 위 에 있다는 말에 고운은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 고운은 또 술 두 잔을 단 숨에 비웠다. 고운이 잔을 비우고 팔낭에게 격황소서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구낭이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해운님의 문장은 글자 하나하나에는 귀기(鬼氣)가 서려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해운님은 문창성(文昌星)의 화신으로 잠시 인간 세계에 내 려와 계십니다. 문창성은 북두칠성 네 번째 자리에 있으면서 인간 세계 에 존재하는 모든 문장과 글을 주관하는 문신(文神)이랍니다.

낮밤을 새 우시며 완성하신 격황소서는 만고에 빛날 명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장만으로는 황소를 곧바로 주살하기 어려우니 소녀들이 주문을 가미 해드리고자 합니다.”

“주문이라?”

이번에는 잠자코 듣고만 있던 해운이 관심을 보였다.

“그 방법은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해운은 4년 만에 자매들과 마주하였지만 기분이 묘했다. 이 양주 땅에 50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장씨 자매와 인연이 있거나 그녀들의 친족이 살 고 있는 것도 아닌 것으로 미루어 자매가 그 먼 곳에서 이곳 양주까지 온 것은 분명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방금 전까지 기분이 상 해 있던 고운은 과음한 탓으로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해운, 우리 건배하자고.”

“고운 너무 취했네. 오늘은 그만하세.”

“아니야, 나도 두주불사라고. 아직 서너 동이는 더 마실 수 있어. 우리 옆에 경국지색의 절세가인들이 있는데 내 어찌 술을 마다할 수 있으리.” 자매는 고운에게 쉴 새 없이 술잔을 안겼다. 고운이 억지로 술 서너 잔 을 더 마시더니 이내 탁자에 엎드려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고운이 잠이 들자 자매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고운을 옆방으로 옮겼다.

“저희 자매가 사년 만에 수재님을 뵙습니다.”

“오, 과연 율수현에서 뵙던 장씨 가문의 두 선녀님이 맞는군요. 반갑습 니다. 그때 헤어진 뒤로 두 분을 다시는 못 만나는 줄 알았습니다. 양주 땅에서 다시 만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고운이 잠자리에 들었으니 이제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해운은 크게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저희 자매는 수재님을 돕고자 불원천리 예고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많이 놀라셨지요? 저희가 수재님을 찾아온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선녀님들이 나를 돕는다? 그리고 나를 찾은 이유가 있다?”

4년 전 초현관에서 해운과 운우의 정을 나눈 뒤로 팔낭과 구낭은 500 년 만에 율수현의 무덤 속에서 나와 천상에 들었다. 인간도 아닌 귀신의 몸으로 문창성의 정기를 받는 기적은 3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하는 매 우 드문 일이었다.

북두칠성은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는 별로 특히 죽음 을 중요시하여 망인의 업장을 판단하여 윤회와 해탈의 문을 열어주기도 한다.

비록 자매가 귀신이 되기는 하였지만 처녀의 몸으로는 태상노군과 서왕모가 있는 선계(仙界)에 들 수 없었다. 문창성의 정령인 해운과 초 야를 가짐으로써 자매는 비로소 천상계에 들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 다. 천상에 거주하면서도 팔낭과 구낭은 하계에서 보낸 초야의 남흔여열 (男欣女悅)의 감동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해운이 율수현위를 사직하고 한 동안 직업도 없이 이리저 리 떠돌며 문객생활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였다. 마침 황소가 민란을 일 으키자 자매는 지상의 정인(情人)인 해운을 내려다보며 해운이 전란으 로 화를 입을까 걱정하였다. 천상에서는 해운이 지상에서 하는 모든 일 들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상세히 알 수 있었다. 해운이 제도행영병마도통 인 고변의 명을 받아 격문을 쓰게 되자 자매는 해운을 돕기로 하고 잠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아, 그리되었군요. 음침하고 답답한 땅속에서 나와 승천하셨으니 참으로 잘 된 일입니다. 여선이 되신 것을 감축 드립니다.”

“저희가 승천하여 여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북두칠성의 정기를 타고 나신 수재님 덕분입니다.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팔낭과 구낭이 예의를 갖추어 해운에게 공손히 절을 하였다. 선녀의 절을 받는 해운은 이것이 생시인지 꿈인지 분간이 안 갔다.

“수재님께서 올린 격문을 고변 병마도통께서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돌아가시면 이 주사(朱砂)를 섞어 먹을 간 다음 격문을 다시 작성해서 올리세요.”

팔낭이 계란만한 붉은 유리병을 해운에게 건넸다. 병 안에는 붉은 주 사가 들어있었다. 그것은 도사나 신선들이 요사스러운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闢邪)나 귀신을 쫓는 축귀의식 때 사용하는 특수한 물질과 같았다. “주사를 섞은 먹으로 글을 쓰면 글씨가 붉게 변하지 않겠습니까?”

해운이 병을 흔들어 안에 든 붉은 물질을 살펴보았다.

“아닙니다. 글자는 검정색으로 나타납니다. 글자 한자 한자가 주문(呪 文)이 되고 독이 묻은 비수가 되어 황소가 수재님의 격문을 보는 순간 그의 심장에 깊이 박히고 눈이 멀 것입니다.”

해운은 자매가 자신의 필력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아 퍽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해운의 속마음을 눈치 챈 구낭이 입을 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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