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도설지 신라 추문촌당주가 되다

일곱 살에 즉위한 신라왕 삼맥종(三麥宗)이 성장함에 따라 모후 지소태후의 섭정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를 펼칠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는 이전에 사용하던 건원(建元)을 버리고 개국(開國)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쓰도록 했다. 바야흐로 청년왕 삼맥종의 시대가 온 것이었다.

그는 고구려와 백제를 압박하여 영토 확장에 나섰다. 청년왕은 이미 병법에 달통하여 군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사용하는데 제(齊)나라 군사(軍師)였던 손빈(孫賓)을 능가할 정도였다. 수시로 현장을 누비며 얻은 경험과 그를 떠받치는 백전노장들이 있어 왕은 뜻을 펼칠 수 있었다.

그의 뜻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장수는 김이사부(金異斯夫) 장군이었다. 이사부 장군은 평시는 성품이 온화하고 아랫사람을 친자식처럼 아끼는 덕장(德將)이지만 전투에 임하면 맹호로 돌변하는 용장(勇將)이며, 지장(智將)이었다.

그는 지증왕의 4세손으로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를 역임하였고 금관가야를 정복하였으며, 신라에 반기를 들고 있던 *우산국(于山國)을 꾀로 정복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의 휘하에는 월광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장수가 있었다. 파진찬 두미(豆彌), 대아찬의 서부질(西夫叱), 거칠부(居柒夫), 내례부(內禮夫)가 있고, 아찬의 비차부(比次夫) 등이 있었다. 월광은 이때 관등이 올라 제9관등인 급간(級干)의 벼슬을 하고 있었다.
* 하슬라 – 지금의 강원도 강릉
* 우산국 – 울릉도

고구려의 안장왕(安臧王)이 피살되고 양원왕(陽原王)이 귀족들과 권력 투쟁하는 사이에 고구려의 변방 수비는 허술했다. 이 틈을 노려 백제 성왕은 가야연맹을 끌어들이고 신라와 협력하여 북진(北進)하였다.

백제군은 남평양을 공격하여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욱리하 하류 주변의 여섯 개 군을 회복하였다. 동시에 신라는 거칠부 장군의 활약으로 욱리하 상류지역의 열 개 군을 점령하였다.

고구려의 영토를 빼앗은 신라군은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고구려와 내통하고 있던 신라군은 기수를 돌려 백제군이 고구려로부터 회복한 욱리하 하류 지역 6개 군을 기습적으로 점령하였다. 신라왕은 백제에게 빼앗은 지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군주(軍主)로 임명하였다.

신라에게 허를 찔린 백제 성왕은 이를 갈았다. 그는 신라에게 빼앗긴 지역을 되찾기 위하여 바다 건너 왜(倭)의 야마토와 가야연맹에 군사 출전을 요구하였다. 백제는 왜와 가야의 군대로 연합군을 구성하였다. 백제가 주축이 된 연합군은 총 삼만여 명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성왕의 목표는 관산성(管山城)이었다. 관산성만 수중에 넣으면 주변 지역을 쉽게 점령하고 곧바로 서라벌로 진격할 수 있었다. 성왕은 신라의 심장부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신라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큰딸을 신라왕의 후궁으로 보내기도 했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은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관산성으로 출전하라. 또한 적성(赤城)에 나가 있는 군대도 즉시 관산성으로 이동시켜 백제의 연합군을 막아라.”

신라왕은 백제 연합군의 심상치 않은 동태를 보고받고 명령을 내렸다. 이때 월광은 *추문촌당주(鄒文村幢主)로 잠시 적성에 나가 있었다. 신라의 지원군이 관산성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성주 각간 우덕(于德)과 부장인 이찬 탐지(耽知) 등이 힘겹게 백제군을 상대하고 있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관산성이 백제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월광도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관산성으로 이동하였다.
* 추문촌 – 경상북도 의성(義城) 지역으로 신라 시대 군사적 요충지.
* 당 주 - 당주는 신라의 지방관이면서 동시에 군단장의 기능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친 백제 성향의 가야연맹이 모두 이 전투에 참여하였으리라. 뇌주가 보낸 자객에게 원통하게 죽임을 당한 아랑과 내 아들 그리고 백조, 청조의 원혼을 달래줄 절호의 기회가 왔다.’

월광은 말 등에 앉아 아픈 과거를 떠올렸다.

“장군, 이번 전투에 제가 선봉에 설 수 있도록 해주세요.”

뒤따르던 비장 항우가 월광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자나 깨나 아랑과 태손 그리고 백조, 청조의 원수를 갚을 방법을 골몰해 왔다.

“항우야, 한쪽 팔로 전투에 참여할 수 있겠느냐?”

외팔이가 된 항우를 볼 때마다 월광은 속이 쓰렸다. 그가 비록 외팔이기는 하나 병장기를 다루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월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항우는 늘 월광의 뒤를 따르며 군공을 세웠다. 태자비 아랑이 뇌주가 보낸 자객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 항우는 혼자 살아남은 것이 월광에게 미안했다.

“장군, 이번 전투에 백제, 가야, 왜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관산성으로 출전하였다니 잘 되었습니다. 저는 전장에서 뇌주를 만나면 반드시 그놈의 목을 베어 원통하게 돌아가신 아랑 태자비님과 태손님 그리고 백조, 청조의 원한을 풀어줄 겁니다. 제가 이번 전투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꼭 복수할 겁니다. 뇌주, 그놈을 절대로 살려둘 수 없습니다.”

항우는 월광이 전선에 나가 있을 때 아랑과 태손(太孫)을 지키지 못한 것을 늘 가슴 아파하였다. 달 밝은 밤에 휘하 군부대를 이끌고 관산성으로 달려가는 두 사내는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비탄에 잠겼다.

뇌주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아랑과 태손의 머리가 절취(截取)당한 사건은 서라벌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보도왕태후는 병부령을 닦달하여 범인을 잡으라고 하였다.

범인이 잡히지 않자 신라 병부에서 항우를 피의자로 보고 잡아가 국문하였다. 항우는 한쪽 팔을 잃은 상태에서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 고통이 얼마나 큰지 차라리 아랑과 태손 그리고 백조, 청조가 피살당할 때 자신도 죽임을 당했으면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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