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 계림국의 태후, 고구려 왕비를 꿈꾸다

첨해이사금은 이찬 장훤(長萱)을 *서불한(舒弗邯)으로 삼아 국정을 맡기고 양부(良夫)를 이찬으로 삼았다. 궁궐 근처에 남당(南堂)을 짓고서 그곳에서 주로 국정을 처리했다.

*서불한 -계림국 17관등 중의 1등 관위로 우벌찬(于伐飡), 각간(角干), ·이벌찬(伊伐飡)이라고도하였다.

첨해이사금 즉위 이듬해 사벌국이 계림국에 반기를 들고 백제에 귀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계림국은 우로(于老)를 파견하여 전쟁을 벌여야 했다. 계림국은 겨우 사벌국을 제압했지만, 왜국의 침입으로 심각한 상황을 맞기도 했다.

이때 왜 열도는 산과 섬에 의지하여 30여 개의 읍락국가(邑落國家)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야마타이국(邪馬台国)이 가장 강력하여 열도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다. 히미코(卑彌呼) 여왕이 야마타이국을 다스렸는데 그녀가 죽고 뒤를 이어 현재는 이요(壹與) 여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공주야, 네가 나라를 위하여 큰일을 할 때가 된 듯하구나.”

“모후,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소녀는 얼른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일은 꼭 사내들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쩌면 사내들보다 여인네들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남자가 아니다. 제왕의 이불 속에서 세상의 모든 일이 정해지기도 하고 없었던 일이 되기도 한단다.”

그미는 바르게 자란 석정 공주를 바라보며 대견해 했다. 아비 없이 자란 탓에 행여 성격이 삐뚤어지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다. 그미의 큰딸 수로부인은 내해이사금과 혼인하여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지만, 이제는 미망인이 되었다. 그미는 고구려에 첩자를 보내 고구려 왕실의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그미가 고구려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백제와 왜국의 침략을 막강한 고구려의 힘을 빌려 막아보려는 셈속이 있어서였다. 또한, 최근 들어 이매 계열의 외손들이나 박씨 족벌(族閥)들의 움직임이 감지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머지않아 계림국에서 피바람을 부르는 정치적인 대격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그미를 더욱 초조하게 했다.

“모후, 소자도 모후의 말씀을 잘 모르겠습니다.”

“이사금께서는 당연히 모르실 테지요. 이 어미만큼 남삼한과 대륙 그리고 주변국들의 정세(政勢)를 잘 아는 이가 또 누가 있겠습니까? 군주가 된 지 사 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이사금도 권력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입니다.”

“모후, 아직도 소자는 정치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미는 갑자기 첨해이사금이 덩둘해 보이자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공주는 이 어미와 함께 고구려로 가자. 지금의 계림국은 내외 우환으로 폭풍 전야와 같은 상태다. 네가 조국을 구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 같다. 이일은 어미가 하룻밤 만에 결정한 게 아니다. 지난 수년 동안 수백 수천 번도 더 고민하고 번민한 결과다. 너희 남매는 무조건 어미의 말에 이의를 달지 않고 따라주기를 바란다.”

“모후, 공주를 고구려 태왕에게 바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이제야 그미의 말귀를 알아들은 첨해이사금이 놀란 안색으로 물었다.

“모후, 소녀는 모후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하오나, 고구려 태왕 정도면 궁궐에 이미 여러 명의 절세가인이나 아름다운 비빈(妃嬪)이 있을 터인데, 소녀를 가까이하지 않으면 어찌하나요?”

“여인이 사내를 후리는 일은 얼굴로 하는 게 아니다.”

그날부터 그미는 석정 공주에게 규방의 비술(祕術)을 전수하였다. 그미는 이미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상태로 귀족사회의 사내들 취향과 그들의 기호(嗜好)를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고구려, 백제, 계림국 왕실 사내들의 최대관심사는 영토확장을 위한 주변국 정복 전쟁이 아닌 *어녀술(御女術)이었다. 특히 자신이 영웅호걸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호기를 부리는 사내들의 경우에는 여인의 호감을 사고 잠자리까지 이어지는 신비한 묘술을 터득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그림을 잘 보아라. 남녀의 그것은 세상을 창조하는 신묘한 영물이란다. 여인은 본 임무인 후손을 생산하고 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다음 단계란 바로 지아비가 지극한 행복감을 맛보게 해줘야 한다. 아무리 얼굴이 예쁘더라도 비단 금침 위에서 지아비의 혼을 빼놓지 못하면 쫓겨나게 된다.”

“모후, 망측스러워요.”

석정 공주는 그미가 보여주는 규방 비술이 그려진 화첩(畫帖)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어머니와 딸이 묘한 그림을 보며 사내를 어찌하면 단박에 자신의 사람을 만들 수 있는지 연구하는 모습이 무척 낯설었다. 딸에게 운우(雲雨)의 기교를 가르치는 그미나 배우는 석정 공주나 얼굴을 붉히기는 마찬가지였다.

 * 어녀술 - 잠자리에서 남성이 여성을 다루는 기술.

 “잘 들어봐라. 방중술이란, 음양(陰陽)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올바른 교접을 통해 인간의 기(氣)를 원활하게 유통시켜 천수(天壽)를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것이 핵심이란다. 즉,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억압하거나 방종하게 사용하지 않고 올바르게 발산하면 음양의 이기(二氣)가 조화를 이루어 불로장수할 수 있단다.

지나치게 방사를 가져도 안 되고 그렇다고 무조건 금욕을 해서도 안 된다. 규방술은 철저하게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게 목적이고 남녀의 관계를 그 수단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철저히 본질에 접근해야 규방술의 진정한 뜻을 이룰 수 있단다.”

“모후, 소녀는 아직 사내를 받아들인 적이 없습니다. 항간에는 남녀가 관계하기 전에 어떤 묘약을 쓰면 좋다고 하는데, 그 묘약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석정 공주는 사내와 관계를 맺지 않았을 뿐 그 방면에 상당한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미도 딸이 사내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석정 공주는 온상에서 자란 화초(花草)와도 같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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