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부 – 계림국 사위가 된 중천태왕

졸본은 주몽 추모왕과 소서노(召西弩) 왕비가 합심하여 고구려를 건국한 신성한 장소였다. 그곳에는 추모왕의 사당을 비롯하여 초기 고구려의 도읍지의 흔적이 산재해 있었다. 고구려의 왕도(王都)가 국내성이지만 역대 태왕들은 권좌에 오르거나 국태민안을 비는 행사 때면 반드시 졸본을 방문했다.

그미가 10년 전 딸 석정을 태왕에게 시집보내기 위하여 함께 국내성에 왔다가 석정 공주뿐만 아니라 그미 역시 태왕의 정인(情人)이 되었다. 태왕에게는 이미 연나부 출신의 정비인 연(椽)씨가 있었으나, 추가로 그미까지 정비로 맞이하는 등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태왕의 생모이자 후비가 된 전태후를 비롯한 연왕비, 잠후(蚕后), 주후(周后) 등은 태왕의 처분에 할 말을 잃고 원통한 심정을 술로 달래거나 잡기에 몰두하며 하릴없이 무료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렇다고 태왕이 그녀들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잊은 것은 아니었다.

태왕은 그미가 석정 공주와 고구려에 왔을 때 첫눈에 반했다. 그미는 고구려에 달포쯤 머물다가 계림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첫눈이 내릴 때쯤 첨해이사금과 함께 고구려에 입조(入朝)하였다. 그때 태왕은 그미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하고 두 사람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그미와 부부의 연을 맺은 태왕은 곧이어 석정 공주와도 혼례를 치렀다.

계림국의 처지에서 보면 보통 경사가 아니었다. 계림국의 옥모태후가 고구려 태왕의 왕비가 되고, 석정 공주는 태왕의 후궁이 되니 이보다 더한 경사가 어디 있을까? 그미는 이제 계림국의 태후이면서 동시에 대제국 고구려의 정식 왕비였다. 그미는 고구려와 계림국을 드나들며 두 나라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계림국에 흉년이 들면 태왕은 수백 척의 배에 곡식을 가득 실어 보내 계림국 백성을 구호하였다. 또한, 백제나 말갈(靺鞨) 혹은 왜국이 계림국을 침입하면 즉시 막강한 고구려 군대를 파병하여 계림국을 보호하였다. 그미와 딸 석정 공주가 고구려에서 계림국의 안녕을 위해 애쓰고 있을 때 정작 계림국 군주 첨해이사금은 서라벌의 귀족들 사이에서 점점 정치적으로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그미가 계림국에 돌아와 운 공주를 출산했을 때 태왕은 마차 수백 대 분의 선물을 서라벌로 보냈다. 또한, 목수와 인부들을 서라벌로 보내 그미가 거처할 궁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거나 새로 지어주기도 했다. 그미는 태왕 덕분에 자신이 거처할 궁이 완성되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태왕을 초빙하였다.

태왕의 비빈들은 그미가 국내성을 비운 틈을 타 태왕의 환심을 사려고 온갖 수작을 부렸으나, 태왕은 그미가 빨리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터였다. 그미가 보낸 초대장을 받아 든 태왕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미로부터 초대장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비빈들은 태왕이 계림국으로 행차하면 그미의 치마폭에 싸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하였다.

“폐하는 대제국 고구려의 지존이십니다. 잠시도 권좌를 비우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서라벌에 가시려면 소첩도 함께 데려가소서.”

“폐하, 소첩은 일구월신 폐하 한 분만 바라보고 살고 있는데, 갑자기 계림국에 가시겠다니, 기가 막히고 가슴이 울렁거려 금방 죽을 것만 같습니다.”

“폐하는 소첩의 지아비입니다. 서라벌에는 옥모 왕비 한 명뿐이지만, 국내성에는 여러 명의 비빈이 있습니다. 절대 서라벌에 가시면 안 됩니다.”

연왕비와 주후, 잠후 등 비빈들은 대전으로 몰려들어 행여나 태왕이 자신들을 버리고 계림국으로 갈까 봐 울면서 하소연했다. 지난 10년 동안 비빈들은 그미의 미모와 태왕을 사로잡는 규방 비술에 기가 질려 함부로 말도 하지 못하고 눌려 지내야 했다. 게다가 태왕이 계림으로 떠난다면 태왕의 총애를 회복할 기회를 영영 상실하는 게 아닌가 우려하였다. 그미가 국내성에 없는 지금이 비빈들에게는 태왕을 유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짐이 서라벌에 가는 것은 옥모 왕비를 보러 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계림국은 고구려의 신하국으로 짐이 친히 순방하여 그곳 백성들이 어찌 살아가는지 살피고자 합니다. 신하국이 잘 살아야 짐의 마음도 편안합니다. 비빈들은 제발 짐이 하는 일에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빈들이 태왕의 완고한 고집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전태후가 태왕에게 울면서 읍소(泣訴)했다.

“폐하, 소첩은 폐하를 낳은 생모이며, 동시에 폐하의 자식을 낳은 지어미입니다. 계림국으로 떠나시려거든 소첩을 죽이고 떠나세요. 옥모가 지난 십여 년 동안 폐하의 총기(聰氣)와 정기(精氣)를 모두 흡수하여 폐하의 옥체가 많이 망가졌습니다. 고구려는 폐하 혼자 다스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조정의 수많은 신하와 지방장관들은 폐하의 윤허가 있어야 국정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잠시도 도성을 비워서는 안 됩니다. 국정이 혼란스러우면 동천 태왕 때처럼 위나라 관구검(毌丘儉)이나 위지해(尉遲楷)같은 자들이 고구려를 침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꼭 가시겠다면 소첩을 죽이고 가세요. 이 지어미를 땅속에 묻고 가세요. 그렇지 않으면 소첩은 높은 누대에 올라가 투신할 것입니다.”

전태후는 이내 대전에 벌렁 누워서 대성통곡하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비빈들은 돌아서서 키득거리며 태왕의 반응을 살폈다. 처지가 난처해진 태왕은 헛기침만 하며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지속되고 있던 차에 국상 음우(陰友)가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 전태후와 비빈들의 말씀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옵니다. 계림국은 변방 소국이옵고 고구려는 대륙 한가운데 있는 대국입니다. 대국의 군주가 소국을 순방하는 일은 신하들에게 위임하시옵고 부디 자중하셔야 하옵니다. 소신이 보기에도 폐하께서는 지난 십여 년 동안 몰라보게 옥체가 부실해진 듯 합니다. 잠시 운우지락을 통한 음양의 조화를 멀리하시고 옥체를 튼튼히 하소서.”

국상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태왕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리 국상이지만 비빈들이 보는 앞에서 태왕을 민망하게 하는 언사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음우는 비빈들의 편에 서서 죽음을 각오하고 태왕에게 주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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