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령 전설<15>꿈이 이루어 지다(하)

‘아아, 달빛에 비친 선녀의 모습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간밤에 있었던 일은 꿈이 아니었어. 내가 정말로 나무꾼이 된 것인가?’

박달은 한별 아가씨의 청초한 모습에 넋이 나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대개의 여인은 밤과 낮에 모습에 차이가 있게 마련이지만 한별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낮에 보는 그녀의 모습이 밤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참으로 빼어난 미인이구나. 이런 산골에 어찌 선녀가 살고 있을까? 내 고향 풍산 고을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미색(美色)이야.’

박달은 속으로 감탄하면서 간밤에 숫처녀를 품은 자신에게 대견해 했다.

“도령님, 편히 주무셨는지요?”

“덕분에 아주 잘 잤어요. 간밤에 내가 큰일을 벌인 거 같습니다.”

박달은 간밤의 일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는 한별 아가씨를 똑바로 바라보기가 민망했던지 자꾸 헛기침만 했다. 한별의 양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닙니다. 제가 원한 일이었습니다. 너무 괘념치 마셔요. 어서 세수하시고 들어가셔요. 아침상들이겠습니다.”

얼굴이 빨개져서 돌아서는 한별의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박달이 세수를 마치고 방으로 들자 그녀는 아침상을 들고 사랑체로 들었다. 그녀는 상을 들고 들어오면서도 박달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간밤의 흥분이 아직도 그녀의 두 뺨에 아련히 남아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젯밤에 허겁지겁 먹었던 저녁 밥상하고는 너무나 달랐다. 정갈한 밥과 산촌에서 보기 힘든 여러 가지 반찬들이 박달의 시선을 끌었다.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서먹하던 사이에서 이제는 심신의 완벽한 합일로 두 사람은 겉보기에 부부 사이나 다름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변한 사정은 두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이면서 행복이었다. 박달은 상을 들이고 나가려는 한별의 손을 잡았다.

 

“어머나! 도령님, 어서 아침 드시지 않고요?”

“아니요. 그대를 바라만 보아도 나는 배가 부르오.”

박달이 가냘픈 한별의 손을 잡고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무엇을 강하게 갈구하고 있었다. 첫날밤을 치른 신랑이 사랑스러운 신부의 손을 잡고 구애(求愛)하는 모습이었다. 한별은 가슴이 떨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도령님, 어서 아침 드셔야지요. 국이 식겠어요. 어서요.”

한별이 박달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으나, 박달은 슬며시 손에 힘을 주었다. 손을 빼려다 말고 그녀는 박달의 두 눈울 자세히 바라보았다.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의 현재 욕망과 신실한 마음이 들어있기에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진실성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박달의 눈씨는 물레방앗간에서보다 더 강렬했다. 한별 아가씨는 그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심장이 쿵쾅거리며, 금방 몽롱한 기분에 휩싸였다. 물레방앗간 욕망의 불꽃이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사그라지지 않은 불꽃이 다시 피어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이리 와요.”

박달이 한별을 이불 속으로 잡아끌었다. 아직 박달의 온기가 남아 있는 아늑한 이부자리였다. 박달이 거칠게 한별을 이부자리에 눕혔다. 박달의 몸짓에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아이, 도령님, 아침인데…….”

한별이 입에 손을 물고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박달은 개의치 않았다. 박달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순식간에 나신(裸身)이 된 한별은 부끄러워 몸을 옆으로 구부렸다.

“밤이면 어떻고 아침이면 어떻소? 내 그대를 사랑하는 데 무엇이 걸림돌이 된단 말이오?”

한별은 집안에는 두 사람 말고 아무도 없기에 언행에 특히 조심하려고 애썼다. 어른들이 없는 한낮에 그녀는 더욱 조심스러웠다. 행여 박달이 자신의 조신하지 못한 행동을 책잡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박달의 거침이 없는 몸짓에 그녀는 박달의 기분이 상할까 우려하여 순순히 응해주었다. 두 사람의 거친 호흡과 속삭이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랑채는 금방 열기에 휩싸였다.

혼기가 찬 여식과 과객만 남겨둔 채 집을 비운 한별의 아버지 대호는 은근히 딸과 박달 사이에 어떤 미묘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박달에게 첫눈에 반한 대호가 박달을 대하는 행동으로 미루어 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박달을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았다.

“도령님!”

“한별, 죽는 날까지 그대를 잊을 수 없을 거요.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하늘이 맺어준 천생연분입니다. 나나 그대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내용으로 몽중인과 부부의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 인연은 실제로 현생에서 나와 그대가 맺어지기를 바라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 이제는 나는 나보다 그대를 더 위하고 은애할 것입니다.”

박달의 뜨거운 입김이 한별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도령님, 정말로 그리하실 거지요?”

“사나이가 한 입으로 두말을 하겠소? 과거에 급제하면 제일 먼저 그대를 보러 달려올 것이오.”

“저는 도령님을 믿겠습니다. 이제부터 도령님이 소를 사슴이라 하시면 저도 그리 알겠습니다. 콩을 팥이라 하시면 그런 줄 알겠습니다. 저를 잊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절대로요.”

“걱정하지 마오. 내 어찌 그대를 잊을 수 있단 말이오. 단순히 그대를 안아 보려고 하는 허언(虛言)이 절대 아니오. 우리는 천지신명님께서 맺어주신 사이가 틀림없습니다.”

간밤에 동네 사람들을 신경 쓰면서 치르던 물레방앗간 정사에 비하면 이부자리가 깔린 사랑채에서는 누구의 시선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박달의 거친 몸짓에 한별은 몸을 비틀면서도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박달의 부드러운 한별의 손길이 닿았을 때 그녀는 전율하면서 이 순간이 제발 꿈속의 운우(雲雨)가 아니기를 간절히 빌었다.

분명히 꿈이 아니었기에, 꿈속의 임이 현실에 나타났기에 한별은 아무 거리낌 없이 박달을 맞았다. 마치 그녀가 오래전부터 그리해 오던 것처럼 단단한 사내를 온몸으로 맞으며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의 의미를 박달은 아직 알지 못할 것 같았다. 박달의 뜨거운 입김이 뽀얀 나신을 희롱하며, 극락을 향해 달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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