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언약

주변에서 풀벌레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어려서부터 다니던 길이라 눈을 감고서도 달릴 수 있지만 밤길을 혼자 걷는 것은 다 큰 처녀에게는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행여 불량기 있는 사내들을 만나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물레방앗간에 거의 도착하였지만 박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계신 걸까? 혹시 나를 기다리다 집으로 돌아가신 건 아닐까?’

금봉은 동네 사람들이 지나갈 수도 있기 때문에 큰 소리로 박달을 부를 수도 없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찾았지만 박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인기척을 느끼고 물레방앗간 뒤편에 숨어있던 박달이 금봉의 모습을 확인하고 살며시 나오며 속삭였다.

“금봉이, 여기요.”

“아! 도령님.”

“이리와요.”

“도령님, 누가 보기 전에 어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요. 마을 사람들이 볼까 걱정돼요.”

금봉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박달에게 손짓을 하였다.

“그런데 어디로 간다? 난 이곳을 잘 모르는데…….”

“도령님, 방앗간 안으로 들어가요.”

“그럴까? 그런데 밤에 방앗간으로 누가 오는 사람은 없겠지?”

“이 밤에 누가 오겠어요? 요즘 추수기라서 낮일 하느라 모두 피곤할 텐데요. 물레방앗간이 가장 안전하고 동네 사람들 눈에 뜨일 일이 없어요.”

다행히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금봉이 안으로 들어와 방앗간 문을 잠갔다. 어제 잔득 쌓여있던 볏가마니가 많이 없어진 것으로 보아 낮에 방아를 찧은 것 같았다. 바닥에 멍석이 깔려있었고 한쪽으로 짚단이 놓여있어 앉아서 쉬기에 적당했다. 박달이 금봉이 앉기 편하게 멍석 위에 짚을 깔아주었다. 그때 물레방앗간 밖에서 안의 동정을 살피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방앗간에 바짝 붙어 있었다. 검은 그림자는 숨을 죽여 가며 안의 동정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물레 돌아가는 소리만 둔탁하게 들렸다.

“여기 앉아요.”

“아니에요. 도령님도 앉으세요. 저녁은 어떠셨어요?”

“아주 잘 먹었어요. 임금님이 잡숫는 수라보다 훨씬 훌륭할 거요.”

“어머? 도령님도. 놀리시면 싫어요.”

“아니요. 정말이오.”

“자, 이리 가까이 와요.”

“아이,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이 방앗간 안에 우리 둘 밖에 없는데 보긴 누가 본단 말이오?”

자연스레 금봉은 박달의 품에 안겼다. 박달의 입김이 금봉 볼을 타고 목덜미로 전해지자 금봉은 전율하며 모든 것을 박달에게 맡겼다. 순식간에 달궈진 두 청춘은 이곳이 동네 어귀에 있는 물레방앗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대담한 행동으로 이어졌다. 밖에서 안을 살펴보려던 검은 그림자는 애를 태웠다. 방앗간 안이 컴컴하여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남녀의 밀어(蜜語)를 나누는 소리와 신음은 들을 수 있었다.

“금봉이-.”

"도령님-.”

졸졸거리며 흐르는 물소리와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에 묻혀 남녀의 신음은 잘 들리지 않았다. 때마침 문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방앗간 안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신혼 둘째 밤을 맞이하듯 박달은 천천히 금봉을 열락으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금봉은 박달이 힘들지 않도록 응해 주었다. 박달은 마른 침을 넘기며 차차 호흡이 거칠어졌다. 금봉은 박달의 손길이 닿을 때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도령니임-.”

그때 동산 위로 반달이 올라왔다. 달빛이 물레방앗간 문틈으로 하얗게 새들어 오면서 물레방앗간 안이 희미해졌다. 사내의 등줄기가 푸르게 빛나고 여인은 가늘게 숨을 내쉬며 사내의 손길에 전신을 내 맡긴 채 할딱거렸다. 밖에서 안의 신음에 정신이 몽롱해진 검은 그림자는 통탄하고 있었다.

‘금봉이와 그 과객이 정을 나누고 있는 게 분명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십 수 년을 공들인 보람이 물거품이 되었구나. 이일을 어쩌란 말이더냐? 조신하고 얌전한 줄 알았던 금봉이가 저런 여자였더란 말이냐? 아냐. 내가 잘못 들었을 거야. 이건 아니야.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검은 그림자는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차마 소리 내어 울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검은 그림자는 그 자리에 더 있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마을을 향해 갔다.

“이대로 천년만년 흘러갔으면 좋겠어요.”

긴 여운을 만끽하면서 금봉이 박달의 가슴에 안겨 행복에 겨워하였다.

“나도 그런 생각이 굴뚝같아요. 사랑하오.”

“도령니임-.”

달이 동산 위로 한참 올랐을 때 사내의 긴 신음에 이어 여인의 가냘픈 신음이 이어졌다. 방앗간 안은 뜨거운 열기로 다시 덥혀졌다. 물레방아는 쉬지 않고 쿵덕거리며 돌고 돌았다. 달콤한 시간 뒤에 긴 침묵이 이어졌다. 금봉은 뜨거운 열기와 열락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어 했다. 박달이 땀으로 젖은 금봉을 꼭 안아주었다.

“도령님, 저를 잊지 않으실 거죠?”

“내가 어찌 그대를 잊을 수 있겠소? 저 달님이 내려다보시고 계시잖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아니, 저승에 간다한들 그대를 어찌 잊을 수 있겠소. 염려하지 말아요. 어제도 말했잖소. 과거에 급제하면 제일 먼저 그대에게 달려오겠노라고.”

박달은 아쉬움을 천천히 삭히고 있는 금봉낭자의 촉촉한 가슴을 안아 주었다.

“도령님-.”

금봉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흐느끼자 박달도 코끝이 찡해왔다.

“울지 말아요. 다 큰 처녀가 울면 어떻게 해?”

“고마워서 그래요. 저처럼 보잘 것 없는 산골 소녀를 그리 대해주시니 너무나 고마워서 눈물이 나는 걸요.”

“울지 말아요. 우리는 한 오백년을 산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요.”

“도령님-.”

금봉낭자는 박달의 품을 파고들면서 마치 어린 아이 처럼 흐느꼈다.

“울지 말래도요.”

“도령님, 이제부터 도령님의 모습을 영원히 가슴에 간직하고 살 거예요. 그러나 도령님께서 한양으로 떠나고 나면 전 어찌 살아가야 할지 겁이나요.”

“어찌 살다니? 여태껏 잘 살아오지 않았소?”

“그런 것이 아니라. 꿈에서 뵌 도령님이 떠나고 나면 저는 희망이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리고?”

“도령님이 한양에 가셔서 과거에 급제하면 다시는 저를 찾지 않으실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런 말 하지 마오. 사내가 어찌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단 말이오. 절대 그런 일 없을 터이니 걱정하지 말아요.”

“알겠어요. 저는 불철주야 도령님께서 과거에 급제하도록 천지신명님에게 빌고 빌게요.”

“고맙소. 내 꼭 과거에 급제해 그대의 정성에 보답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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