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성황신에게 빌다.

“도령님, 저 길로 곧장 올라가면 이등령이 나와요.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영남지방 선비들이나 장사치들이 이 길을 지나가면서 이 성황당 앞에 잠시 서서 각자의 소원을 빌곤 한 대요. 제가 도령님의 장원급제를 빌었으니 부디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고마워요. 내, 그대를 생각해서라도 꼭 과거에 합격하리다.”

“도령님, 꼭, 꼭 장원급제하셔야 해요.”

“고맙소.”

박달은 금봉이를 꼭 안아 주었다.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인연을 맺은 금봉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박달은 꼭 안고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저는, 저는 도령님 떠나시면 못 살 것 같아요.”

“무슨 소릴 그리 심하게 하오?”

“모르겠어요. 괜히 눈물이나요.”

“걱정 말아요. 내 사내로서 그대와 안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리라.”

“고마워요. 도령님-.”

“울지 마오. 금방 성황신께 모든 일이 잘되게 빌어놓고 울면 어떡하오?”

“죄송해요. 도령님.”

“사랑하오. 만약 내가 그대를 버린다면 나는 천벌을 받을 거요. 저 성황신님이 지켜보고 계시잖소. 내 꼭 과거에 합격하여 그대를 보러 오리다.”

“고마워요. 저는 도령님이 한양에 과거보러 가신 뒤에 이곳 이등령에 올라 저 먼 북녘 하늘을 올려다보며 도령님을 그리워할 거예요. 도령님이 다시 이곳 벌말을 찾는 그날 까지 이곳에 서서 한양이 있는 곳을 바라볼 거예요.”

“이리와요. 이 바위에 잠시 앉아요.”

박달이 어른 세 사람 정도 앉을 수 있는 바위를 가리켰다. 박달과 금봉이 바위에 나란히 앉아 산 아래 아득하게 펼쳐진 북쪽을 내려다보았다.

“저기 좀 보오. 저렇게 아름답게 단풍이 들어 산하를 봐봐요. 산불이 난 것처럼 만산에 홍엽(紅葉)이 가득하지 않소?”

박달은 손을 들어 시야에 들어온 늦가을의 산과 들을 가리켰다.

“도령님, 이곳 이등령은 슬픈 역사가 많이 간직된 곳이에요.”

“나도 대충은 들어 알고 있어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를 건국한 왕건에게 천년의 신라를 통째로 받치기 위하여 서라벌에서 출발하여 이 고개를 넘어 갔다는 슬픈 역사가 있다고 하는 이야기.”

박달은 고향에서 스승이 한양 가는 지도를 펴놓고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박달이 신이 나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도령님, 신라의 왕이 천년왕국을 왕건이란 사람에게 넘겨줄 때 얼마나 가슴이 쓰라렸을까요? 생각만 해도 그 왕이 측은해요. 그 왕에게 여러 명의 자식들이 있는데 그중에 마의태자라는 분은 아버지의 듯을 따르지 않고 금강산에 들어갔다는 전설도 들은 것 같아요.”

금봉이도 신이 난 듯 자신이 알고 있는 이등령에 관한 전설을 들려주었다.

“그 뿐만이 아니지. 경순왕이 나라를 받치고 이 근처 어디에 궁을 짓고 살았다고 하던데…….”

“아, 맞아요. 여기서 가까운 방학에 궁뜰이라고 전해지는 곳이 있어요. 그 왕께서 그 궁들에 이궁(離宮)인 동경저(東京邸)를 짓고 살았었데요.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그때는 그곳이 시끌시끌했을 거예요. 저도 몇 번 가보기는 했지만 인생무상이라는 느낌만 받고 돌아오곤 했어요.”

금봉은 말을 마치자 멀리 북녘 하늘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 이곳은 외적을 물리친 곳이기도 하다지요?”

“도령님, 저보다도 우리 고을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계세요?”

“그런가? 지금의 조선이 건국하기 전에 고려라는 나라가 있었지. 지금부터 대략 삼백년 전쯤 될 거야. 북방에 거란이란 오랑캐 나라가 있었어. 그 거란이라는 나라가 십만 대병을 고려에 보내 금수강산을 짓밟았지. 원주와 지난 충주에 침입하자 전군병마사였던 김취려(金就礪)라는 장군이 이곳에 복병을 두어 멋도 모르고 이 재를 넘어오던 거란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고 하지. 그러니 이 고개가 호국의 장소이면서 고려 병사들의 피땀이 어린 곳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 역사적인 장소에 나와 그대가 호젓하게 여유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 조상님들에게 괜히 죄송스럽기도 해.”

박달은 처음 와본 이등령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곁에서 박달 도령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금봉은 존경의 눈빛으로 박달을 바라보며, 수정 같은 두 눈을 깜빡거렸다.

“도령님, 그 이야기 말고 소녀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슬픈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또 다른 슬픈 이야기?”

“네에.”

“이왕이면 즐거운 이야기가 듣기 좋을 텐데…….”

“이상하게 이 고개에는 즐거운 이야기보다 슬픈 전설이 얽혀있어서 저도 마음이 아파요. 도령님, 수양대군에 대하여 잘 아세요?”

“잘 알지. 그 분은 비록 조선의 왕을 지낸 분이지만 욕심이 너무 많은 분이야. 세종임금의 아들로 태어나 그분의 형님이신 문종대왕이 승하하시자 어린 노산군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지. 그런데 야심가였던 그는 어린 왕을 좌우에서 보필하던 중신인 황보인과 김종서를 죽이고 권력을 잡고 얼마 후에는 상감을 상왕이라는 구실로 물러나게 한 뒤 자신이 임금의 자리에 앉지.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세월이 지나갔으면 좋겠지만 얼마 안 되어 상왕 인 노산군을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터지게 돼. 사육신이라 분들이 상왕을 다시 옹위하려다 발각되어 삼족이 멸하는 비극이 벌어지지. 그러자 수양대군은 상왕이었던 노산군을 영원 청령포로 귀양 보내 그곳에서 죽이는데 그때 그 상왕이었던 비련의 노산군이 죄인이 되어 이 고개를 넘었다고 알고 있어.”

박달 도령은 마치 어제 일어난 일을 이야기 하듯 말하였다.

“어머나! 도령님은 과거 공부만 하신 게 아닌가 봐요? 역사에 대해서도 너무 많이 아세요. 공자님과 맹자님만 아시는 줄 알았어요.”

금봉은 자세히 알지 못했던 이등령에 대한 전설을 박달 도령을 통하여 듣자 감격해 했다.

“한번 들어 보려오?” 박달도령은 목청을 가다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도령님, 그 시는 저도 얼핏 들은 기억이 나요.”

“이 시는 그 당시 의금부도사였던 왕방연(王邦衍)이 상감인 수양대군의 명에 따라 영월 청령포에 있던 노산군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하고 돌아오는 길에 참담한 심정을 읊은 것이랍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분은 너무 억울하게 돌아가셨어요.”

“경순왕, 노산군. 두 분과 많은 신하들은 이 고개를 넘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괜히 마음이 우울하고 무거워요.”

“너무 우울해 할 필요 없어요. 이미 다 지나간 전설들인데요.”

“그래도. 소녀의 마음은 몹시 아프답니다. 앞으로는 이 고개에 그런 슬픈 이야기가 생기지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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