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년 정월 2일 입춘(壬子年正月二日立春)
 

이황(1501~1570)

黃卷中間對聖賢(황권중간대성현)/ 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소식)/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막향요금탄절현)/ 없음을 향해 옥장식 거문고 줄이 끊어질 것을 한탄 마오

(시감상) 이황(李滉 연산군7년~선조3, 양력 1502.1.3)은 예안(禮安 지금의 안동시)에서 진사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퇴계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가 사망했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이우에게 학문을 배웠고, 1528년에 소과(小科)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534년 식년시(式年試)에서 문과(文科)의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성균관 대사성, 공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고,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퇴계사절요(退溪書節要) 등의 저서가 있다.

조선 성리학 발달의 기초를 형성했으며, 주리론(主理論) 전통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이다. 천원 신권에 그의 초상화와 도산서원과 매화그림이 인쇄되어 있다.


이황은 매화를 무척 좋아했고, 매화에 관한 시를 72제(題) 107수나 지었다. 매화시첩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대부분 매화시는 두향과 결별하고부터 쓴 것이라고 한다. 관기 두향과는 첫 번째 아내 허씨와 둘째 아내 권씨와 사별하고 독신으로 단양군수로 있을 때 만났다.

두향은 시·서·화에 뛰어났으며 거문고도 잘 연주했다. 두향은 9개월 만에 풍기군수로 발령을 받고 떠나는 이황에게 자신을 데려갈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관리는 관기를 데려갈 수 없다는 법 때문에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두향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분매(盆梅)를 정표로 주었다.

이황은 그 화분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돌보았다고 한다. 이 시는 1552년(명종7년) 이황이 52세 때 작품이다. 일설에 의하면 두향이가 안부를 물어오자 답신형식으로 써 보낸 시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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