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여강(驪江)을 구경하다

여인 때문에 과거시험에 낙방하였다고 판단한 대길은 여인에게 삼 년만 있으면 틀림없이 과거에 장원급제할 테니 한 번만 더 뒷바라지를 부탁하였지만, 여인은 냉정히 거절하였다. 여인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긴 것이었다. 대길은 충격을 받고 여인과 그 여인의 정부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날 밤, 대길은 비수를 품고 담장을 넘어 여인이 잠든 방을 기어들었다.

여인은 마침 새로운 정부(情夫)와 단잠에 빠져 있었다. 대길은 비수를 뽑아 휘둘렀으나 여인에게는 상처를 입히고 정부의 목숨을 빼앗았다. 대길은 그 길로 방물장수로 변장을 하고 하삼도(下三道)를 전전하다가 지금의 주막에 숨어들어와 머슴을 살게 되었다. 대길은 박달에게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해 주면서 박달에게 신신당부하였다.

“박달아, 너는 여인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상이라 특별히 주색(酒色)에 특히 조심해야 한다.”

“형님, 잘 알겠습니다.”

“여인은 술과 같아서 맛을 알면 알수록 자신도 모르게 점점 빠져든단다. 한번 맛을 들이면 웬만해서는 여인의 지옥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어렵지. 여인은 어머니이며, 아내이며 또한 요부(妖婦)이기도 하다. 또 여인은 누이 같기도 하다가 측은한 여동생 같기도 해. 너처럼 고향을 떠나 객지를 헤매고 있는 나그네에게 여인은 독충(毒蟲)일 수 있단다. 나도 처음 고향을 떠나 만난 여인을 내 손으로 죽이게 될 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지. 박달아, 다시 한번 부탁한다. 나는 이미 글렀으니 네가 반드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너희 집안뿐만 아니라 풍산의 우리 고향 마을 어르신들에게 기쁨을 안겨 드리도록 하거라. 나는 요즘도 너처럼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단다. 네가 반드시 입격(入格)하여 나의 아픔까지 어루만져 주었으면 한다.”

대길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눈물은 그동안 거친 삶을 살았을 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대길이 형님, 그래도 고향은 잊지 마세요. 아직도 대길이 형님을 기억하는 가족과 지인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 고맙구나. 그러나 아직은 내가 고향을 찾을 때가 아니란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가 되면 고향을 찾아 조상님들에게 그간의 불효를 고하려 한단다.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대길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술잔을 비웠다. 박달은 한때 마을의 희망이었던 고향 형님의 처지에 가슴이 아팠다.

‘나도 집을 떠나 과거 길에 오르면 금봉이라는 낭자와 정분을 나누었지. 그러나 금봉은 대길이 형님이 말하는 요부이거나 독충은 절대로 아니야.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착하고 예쁜 처녀야. 그러나 내가 떡하니 과거에 합격하면 수많은 독충이 달라붙을지도 모르지. 아무리 많은 독충이 나에게 달라붙어도 나에게는 금봉이가 있는 한 그들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야. 절대로…….’

“박달아, 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형님, 고맙습니다. 저에게 여인에 대하여 경각심을 주었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부디 몸 건강하시고 만수무강하세요.”

“자네 볼 면목이 없어. 나야 이제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끝이지만 앞날이 구만리 같은 자네는 부디 장원급제하여 고향에서 고생하시는 노모와 마을 분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선사하시게. 부디, 내 말 명심하고…….”

“네.”

박달은 고향 형과 늦은 밤까지 수작하면서 과거와 한양의 생활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새벽이 되어 배로 돌아온 박달은 쉽게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초췌한 고향 형님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다음날, 배는 새벽 물안개를 뚫고 한양을 향해 돛을 올렸다. 흥호 앞 강나루에는 한양에서 소금과 가재도구 등 생활필수품을 잔뜩 실은 상선(商船)과 지방에서 한양으로 공물과 세미(稅米)를 실은 배들이 뒤엉켜 혼란스러웠다.

“저기 저 우측에서 나오는 지류가 섬강(蟾江)이라 합니다. 강원도 횡성 봉복산에서 발원하여 횡성과 원주 문막 부론을 거쳐 이곳 여주 강천(江川)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데 하류에 두꺼비를 닮은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요. 이곳은 물이 맑고, 모래사장이 하얗고 주변에 빼어난 풍광으로 유명하답니다. 그리고 좌측에서 흘러드는 지류는 청미천이라고 하는데 용인 땅 문수봉 계곡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장호원과 음성을 거쳐 이곳에서 남한강과 만나지요. 이곳이 세 강이 만난다 하여 저기 보이는 저 부락을 삼합리(三合里)라 한답니다. 이 고장은 땅이 기름져서 쌀이 아주 유명하지요.”

나이가 많은 사공이 뱃머리에 서서 동양화처럼 스쳐 지나가는 풍광을 보며 침을 튀겼다. 초행길의 사람들은 사공의 말을 귀담아듣지만 김청처럼 자주 물길을 왕래한 사람들은 귀찮다는 듯 앉아서 멍하니 파란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금방 물안개가 걷히면서 따가운 가을 햇살이 배 위로 꽂혔다. 사공들이 배 위에 포장을 쳐서 햇볕을 가려 주었다. 배는 때마침 불어오는 동남풍에 의지하여 순항하였다. 배가 두 식경 쯤 가니 빼어난 절경이 이어지면서 아늑한 절이 나타났다. 그러자 김청이 일어나더니 아는 체를 했다.

"저 절은 여주 신륵사라고 하는데 봉미산(鳳尾山) 남쪽 자락에 자리 잡은 고찰입니다. 신라 시대 원효대사(元曉大師)의 꿈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들어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그 연못에 살고 있던 9마리의 용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원효대사가 이레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들이니 아홉 마리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륵사(神勒寺)라는 절 이름에 관한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하나는 고려 말 우왕 때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馬岩)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신기한 굴레를 씌워 굴복시켰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 하여 신력(神力)의 신(神)과 제압의 뜻인 륵(勒)자를 합쳐 신륵사라고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창건 이후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이곳에서 입적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고 사세가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개의 고찰이 깊숙한 산속에 자리 잡은 것에 반해 신륵사는 야트막한 봉미산에 등을 대고 남한강 상류인 여강(驪江)의 푸른 물줄기와 드넓은 들판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을 떨쳐왔지요.

봉미산이 비록 야트막하게 솟았지만 두 팔을 벌린 형세로 두 팔은 본신(本身)의 청룡과 백호 줄기가 되어 신륵사의 양기를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높이로 환포하며 에워싸고, 사찰 앞으로는 남한강 줄기인 여강이 좌수도우하며 유유히 흘러간답니다. 내룡(內龍) 맥의 끝자락이며 이곳 양기의 중심이 되는 지점에는 신륵사의 가장 핵심건물인 극락보전이 배산임수(背山臨水)로 자리를 잡았고, 이를 중심으로 절집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원래 경기도 광주 땅에 영면해 계시던 세종임금의 영릉(英陵)이 예종 임금 때 이곳 여주 지방으로 천장 된 후 영릉의 원찰(願刹)로 지정되어 절은 사세가 더욱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고 여주는 부에서 주(州)로 승격되는 계기가 되었다지요. 신륵사가 비보사찰로 불리는 이유는 앞을 흐르는 남한강 상류인 여강의 수류(水流)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강의 드센 물줄기가 휘돌면서 강월헌(江月軒)이 있는 청룡 끝자락을 그대로 치는 이른바 반궁수(反弓水) 형세랍니다. 5

여강 물줄기가 계속 치고 때려 침식이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며, 동시에 수해를 예방하거나 꼭 진압해야 할 장소에 절묘하게 탑들이 자리를 잡았답니다. 이처럼 지세의 약점이나 흠결을 보충하거나 보완하는 것, 혹은 지나치게 드센 기운을 눌러주는 시설물들을 세워 그 약점을 없애는 방법을 풍수에서는 ‘비보(裨補)’라고 하는데 특히 보완하고 보충하는 시설물이 사찰일 경우에는 이를 ‘비보사찰(裨補寺刹)’이라고 한답니다.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인 강월헌 부근에 다층전탑(多層塼塔)과 삼층석탑이 있는데 그 탑들이 여강의 홍수에 대비해 항상 경각심을 갖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수류를 진압하는 역할을 기대하는 의도를 가지고 이곳에 세운 바로 풍수비보탑이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이 탑들이 주목받는 이유이고, 이 탑들 때문에 신륵사를 비보사찰로 더욱 이름나게 한 것입니다.“

배는 신륵사 앞 여강(驪江)을 지나 조포(潮浦)나루에 도착하였다. 강의 풍경은 한 폭의 산수화였다. 김청은 신륵사의 내력에 대하여 꿰뚫고 있는 듯했다.

"선달님은 여주분이 아니신데 어찌 그리 이 고장에 대하여 훤히 아세요?"

박달이 신기해하자 김청은 껄껄 웃기만 했다.

"나처럼 이 고장 저 고장 흘러 다니다 보면 귀동냥을 하게 된답니다."

"선달님에 비하면 저는 우물 안 개구리 같습니다."

박달과 김청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 덧 중화(中火) 시간이 되었다.

“자, 여러분, 점심을 드셔야 하니 저기 조포 나루에서 간단히 요기를 마치시고 다시 배에 오르세요.”

박달은 산천경개가 빼어난 여강의 경치에 취하여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잊고 말았다.

‘이렇게 빼어난 경승지(景勝地)가 있다니, 참으로 비경(秘境)이로다. 이 고장에 사는 백성들은 선택된 사람들이 틀림없어.’

혼자서 경치에 도취해 중얼거리던 박달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자 그들 뒤를 따라 내렸다. 조포 나루 역시 아침에 출항한 흥호 못지않게 번화한 지역이었다. 수 없이 늘어선 크고 작은 주막과 객사 그리고 난전, 잡화상, 대장간, 배를 수리하는 곳 등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조포 나루는 이포나루, 광나루, 마포나루와 함께 조선 시대 경기 충청 강원도 지역의 공물과 농산물 등을 실어나르던 상선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여주 지역의 상권이 형성된 나루였다.

“여기 국밥 한 그릇과 탁배기 한 잔 주시도.”

박달은 주막에 들렀다. 주모는 큰 엉덩이를 흔들어 대며 손님을 맞고 있는 젊은 주모에게 음식을 주문하였다. 곁에 김청이 늘 함께 하는 일행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박도령, 이리 와서 한잔하시구려.”

김청이 박달에게 손짓을 하였다.

“아닙니다. 선달님, 저도 탁배기 한잔 주문했습니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많이 드세요.”

박달은 얼른 식사를 마치도 조포나루터로 나왔다. 인심 좋고 미인들이 많이 출생한다는 여주에 발길을 닿은 박달 도령은 기분이 좋았다. 방금 마신 술은 이 고장 쌀로 빚은 탁주였다.

‘나중에 벼슬을 하다가 나이 들어 퇴직하면 이 고장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다. 그 곁에 금봉이 있으면 금상첨화가 될 터인데… *계속

저작권자 © 남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