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유유자적 여강을 유람하다

조포나루를 떠난 배는 가는 듯 마는 듯 지루하게 한양을 향해 천천히 북서쪽을 향했다. 강 양편으로 보이는 늦가을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오다 멀어지기도 하였다. 바람이 약해 사공들이 노를 저어보았지만 겨우 어른들 걷는 속도로 배가 흘러 갈 뿐이었다.

늦은 오후에 박달을 태운 배가 이포나루에 접어들었다. 바람이 없어 배는 가는 둥 마는 둥 강 위에 둥둥 떠 있었다. 멀리 우측 편으로 높게 솟아있는 파사산(婆娑山)이 늦가을 단풍으로 알록달록한 옷으로 갈아입고 오고가는 배들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서서히 날이 저물어 가고 있는데 강바람마저 불어와 손님들은 옷깃을 여며야했다. 이포나루는 여주의 금사와 대신 고을 사이에 있는 나루터로 예로부터 한양을 오가는 배와 나그네들이 쉬어가는 유명한 곳이었다. 나루터에는 수십 척의 황포돛배가 정박해 있는데 옹기를 가득 실을 배, 한양으로 가는 세곡선(稅穀船)과 어선들이 뒤 엉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강바람에 나부끼는 돛대의 깃발이 푸드득 소리를 내며 펄럭이는 장면은 마치 전쟁터로 출병을 앞둔 병사들 같기도 했다. 바람이 점점 세차게 불기 시작하자 서천에서 먹장구름이 파사산 꼭대기를 삼켜 버렸다. 곧 이어 먼 하늘에서 우르릉거리며 포효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일자 이포나루에 정박한 배들이 서로의 뱃머리를 받으며 출렁거렸다. 사공들은 배를 단단히 정박 시키려고 이리 저리 뛰어 다니며 소리쳤다. 어떤 사공들은 배에 실린 물건을 등에 지고 내리기도 하고 비에 대비하여 물건이 젖지 않게 유지(油紙)를 덮느라 분주했다.

“자, 오늘 저녁은 이곳 이포나루에서 해결해야 할 듯합니다. 하늘이 꾸물거리는 걸보니 비가 내릴 것 같습니다. 손님 여러분 저기서 저녁 드시고 술도 한잔 드시고 다시 배에 오르도록 하세요. 비가 많이 내리면 이곳 객줏집에서 하룻밤 묵어도 되겠습니다. 배는 내일 아침 해 뜰 무렵 출항하겠습니다. 밤에는 암초들이 있어 위험합니다.”

사공이 손님들에게 소리쳤다. 사공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빗방울이 후드득 거리며 떨어졌다. 비가 내리자 손님들은 빨리 내리려고 나루 쪽으로 몰려들었다.

“염병할. 웬 비가 내린담. 에이, 오늘은 저 이포나루 색주가에 들어 질탕하니 계집 엉덩이를 주무르며 막걸리나 한잔해야겠는 걸. 박도령, 어떤가? 나하고 색주가에 들러 한잔 하시는 게?”

김청이 괴나리봇짐을 지고 배에서 내리며 박달을 향해 손짓을 하였다. 어젯밤 흥호에서 만난 대길이 형님 같은 사람을 또 만날까 두렵기도 하고 금봉이 보고 싶기도 하여 박달은 배에 남아 있으려고 하였다. 점심 때 조포 나루에서 괴나리봇짐에 넣어 둔 주먹밥이 있어서 저녁 한 끼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늦가을이지만 강바람은 초겨울 날씨 같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박달은 비를 피해 객실 안으로 들어가 괴나리봇짐을 풀었다. 밖에서는 사공들이 배에 실린 물건들을 비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유지(油紙)를 덮느라 이리 저리 뛰어 다니며 부산하게 움직였다. 번쩍하고 번개가 치는가 싶더니 세상을 집어 삼킬 듯 천둥이 고막을 때렸다. 혼자 객실에 앉아 주먹밥을 꺼내 먹던 박달은 괜히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금봉이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텁텁한 탁주를 함께 나누며 사랑가를 부르고 미래에 대한 설계를 하면서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번개와 천둥소리가 뱃전을 때리면서 박달의 심기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싱숭생숭한 분위기 속에서 도무지 주먹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젊은 사공 한명이 들어오더니 호롱불 아래서 혼자 앉아 주먹밥을 먹는 박달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도령님은 나루터에 안 나가보세유? 이포나루에는 기가 막힌 색주가가 있어유. 요지경이 따로 없구먼유. 나가서 구경해 보시면 마음에 드실거구만유. 작부들도 상당히 미색(美色)이라구유.”

젊은 사공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박달도령의 눈치를 보았다.

“그래요? 얼마나 예쁜데요?”

박달이 호기심이 일어 젊은 사공에게 되물었다.

“여기 작부들은 인심도 후해서 말만 잘하면 그냥도 준다구유.”

‘그냥 준다니? 뭘 그냥 준다는 말인가?’

박달이 사공을 빤히 바라보았다.

“뭘 그냥 준다는 겁니까?”

'도령이 숙맥인가?'

"가보시면 알아유."

"도대체 뭘 그냥 준다는 건지 원."

“도령님은 참 순진하기도 하네유. 얼른 나가 보세유. 볼 것도 많고 맛 볼 것도 많아유. 또 여기 작부들은 다른 나루터에 비해 젊고 화끈해서 하룻밤만 끌어안고 자면 삭신이 다 녹아든다구유.”

젊은 사공은 또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음흉하게 웃었다.

‘참말로, 이상한 사공이구먼. 색주가 포주와 짜고 손님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나? 왜 자꾸 색주가 타령을 하는 거야? 아까는 김청이도 색주가 타령을 하더니. 심심한데 한번 나가 구경이나 해볼까?’

박달이 문을 열자 금방 전까지 장대처럼 쏟아지던 비가 이슬비로 변해 지짐대며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밤이면 예고 없이 자주 비를 뿌려댔다.

박달은 배에서 내려 이포나루를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황혼 속에서 청사초롱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환하게 빛을 발하였다. 한양, 충청도, 강원도에서 올라온 배들을 타고 내린 사내들로 이포나루터는 북적거렸다. 술에 취해 갈 짓자 걸음을 걸으며 흥얼대는 사람도 있고, 술값이 모자라는지 젊은 주모(酒母)에게 멱살을 잡히고 사정을 하는 광경도 목격되었다. 분위기는 여느 홍등가처럼 묘한 느낌을 들게 하였다.

화장을 진하게 한 어떤 작부들은 상인이나 배꾼들을 호객하기 위하여 색주가 대문 앞에 죽 늘어서서 히죽거리며 손짓을 했다. 작부들은 만만해 보이거나 눈이 마주친 사내들에게 달려들어 팔을 잡아끌기도 하였고, 치마를 반쯤 걷어 올려 속곳을 은근히 내보이며 허여멀건 허벅지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작부들은 별의별 행동과 말로 사내들을 노골적으로 유혹 하였다. 그 모습을 차마 똑바로 바라 볼 수 없어 박달은 두 눈을 땅에 고정 시키고 걸었다. 그러나 희한한 광경을 공짜로 볼 수 있는 것도 자주 있는 것이 아니어서 박달은 슬며시 고개를 들어 작부들을 힐끔거리며 훔쳐보았다.

‘참말로 요지경(瑤池鏡)이로구나. 여인들이 속곳을 내보이며 사내들을 유혹하다니. 그런데 주막에서 싸구려로 몸을 파는 들병이와 차원이 다른 걸. 젊은 사공의 말대로 들병이들 보다 훨씬 예쁘고 감칠맛 나게 구는걸 보니 보통 여우가 아닌 게 틀림없을 거야. 조심해야지. 그렇지만 꽤 볼만할 구경거리인걸. 고향에서 생전 보지 못한 볼거리가 이곳에는 널렸구나. 어디 가서 간단히 요기라도 해야 하는데......’

박달이 작부들 앞을 막 지나가려고 하자 한 여인이 박달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이고, 잘생긴 오라버니도 이 춘화를 보러 오신 거죠? 저를 따라 오셔요. 아주 잘해드릴게요. 우리 색주가는 술값이 싸고 음식도 맛있으며 예쁜 아이들이 많다고 소문이 자자한걸요.”

여인은 박달의 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국밥이나 먹으러 왔소이다. 그러니 이 팔 놓으시오.”

“잘 생긴 오라버니, 왜 이러셔요? 저를 따라 오시면 도화경(桃花境)이 펼쳐지

는 아주 멋진 곳으로 가실 수 있어요.”

“이 팔 놓으시라니까.”

박달이 여인의 팔을 뿌리치려고 하자 여인은 더욱 힘을 주어 박달의 팔을 잡고 색주가로 잡아끌려고 하였다. 옆에 있던 여인도 가세하여 박달을 강제로 끌고 가려 하였다.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오. 이 팔 놓으라니까요.”

박달이 소리 지르며 뿌리치자 두 여인이 마지못해 잡았던 팔을 놓으며 박달에게 눈을 흘겼다.

“원, 문둥이 촌놈에게 정을 한번 주려고 하니까 꼴값을 다 떠네.”

“그러게 말이여. 촌것이 여간 내기가 아니겠어.”

여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 박달에게 비아냥댔다. 박달은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겨 마을 안쪽으로 갔다. 조금 더 들어가니 주(酒)자가 쓰인 하얀 깃발이 보였다. 평범한 나그네들이 안심하고 들어갈 수 있는 주막 같아 보였다. 포장이 쳐진 주막 안마당에 평상이 서너 개 놓여 있는데 평상 위에는 사공으로 보이는 젊은이들 서너 명씩 국밥과 탁주를 마시고 있었다.

“주모, 여기 국밥 하나 말아주시오.”

“과거를 보시러 가는 유생이신가 봐요? 정말로 헌헌장부이시다.”

‘어디를 가나 여인들 때문에 못살겠네. 빨리 국밥이나 먹고 배로 돌아가야 겠어. 괜히 여기서 어슬렁거리다가 김청이와 마주치면 곤란하니까.’

“국밥 대령이요.”

주모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국밥을 한 그릇 말아왔다. 그리고 시키지도 않은 막걸리도 큰 사발에 찰랑찰랑 넘칠 정도로 가득 담겨져 상에 올려져 있었다. 박달과 주모의 눈이 마주 쳤다.

“이건 헌헌장부님께 그냥 드리는 거예요. 과거에 떡하니 붙으시고 고향 가시는 길에 한번 들려 주십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거니 괘념치 마시고 드세요. 우리 주막은 과거 보시러 가는 분들에게 후한 인심을 쓴답니다.”

‘이런, 어제도 공짜 술을 마셨는데......’

박달은 미안하여 괜히 머리를 긁적거렸다.

“고맙소. 내 고향 가는 길에 한번 들리리다.”

“이렇게 잘 생긴 도령님은 처음입니다. 나중에 고향 가시는 길에 꼭 한번 들려주세요. 그때는 더 한 걸로 질펀하게 대접할게요.”

'더 한 걸로? 더 한 게 뭐지? 갈수록 요지경 속이로구나. 내가 구미호들이 집단으로 사는 소굴에 들어 온 느낌이야.'

주막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한 박달은 서둘러 주막을 나섰다. 비는 그쳤지만 밤공기는 썰렁했다. 배에 오르니 성이 덜 찬 젊은 남자들이 술과 안주를 사가지고 와서 주거니 받거니 떠들며 마시고 있었다. 박달은 객실 한편에 자리를 잡고 일찌감치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오지 않아 눈만 멀뚱히 뜨고 곁에서 떠드는 소리를 억지로 들어야 했다. 찬바람이 틈 사이로 들어왔다. 두루마기를 입고 누웠지만 배 안은 추운 느낌이었다. 한참 있으려니 김청이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술이 어량한 것을 보니 꽤나 마신 듯 했다.

아침 일찍 이포나루를 출발한 배는 양평 두물머리를 경유하여 이틀 후 오후에 한양의 마포나루에 도착하였다. 늦가을의 한양은 쌀쌀했다. 노잣돈이 넉넉하지 못한 박달은 서강의 마포나루 가까운 곳에 짐을 풀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하여 세 명이 함께 쓰는 봉놋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함께 방을 쓰게 된 사내들은 전라도와 강원도에서 올라 온 유생들인데 한양 올 때 배에서 만났던 김청과 같이 공부에는 별로 마음에 없는 듯 했다.

옆방에도 지방에서 올라온 과거 준비생들이 짐을 풀고 밤낮으로 책을 읽으며 과거 준비에 전념하고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집안의 자제 중 여유가 있는 과거 준비생은 괜찮은 시설이나 좀 더 나은 주막에 기거하면서 시험 준비를 하였다. 또한 한양에 친인척이나 연줄이 있는 과거 준비생들은 친인척 집에 머물면서 좀 더 편안하게 과거 준비에 전념할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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