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새로운 인연이 오다

지방에서 올라온 어떤 과거 준비생은 처음부터 시험에 뜻이 없거나 부모·형제의 강요에 할 수 없이 한양에 올라와 엉뚱한 짓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끼리끼리 모여 대낮부터 주막에서 술을 퍼마시며 소일하거나 기루(妓樓)에 파묻혀 노잣돈을 탕진하기도 했다.

또 어떤 부류들은 노름에 빠져 노잣돈을 모두 잃고 거지가 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딱한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한양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과거 준비생을 노리는 협잡꾼들이나 사기꾼들도 주막에 진을 앉아서 어수룩한 지방 유생들의 주머니를 노렸다.

주막 주변에서 기생하는 들병이나 술파는 구미호 같은 여인에게 혹하여 며칠 만에 노잣돈을 전부 탕진하고 거리를 배회하는 자도 있었고, 묘령의 여인에게 첫눈에 반하여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경을 치거나 망신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과거 준비생 중 한양의 화려한 외관과 어여쁜 양반 댁 처자들에게 눈이 멀어 엉뚱한 공상을 하는 축들도 꽤 있었다. 양반가 처녀들 꽁무니를 따라가다 하인들에게 잡혀 주먹세례를 받거나 얻어맞는 축들도 있었다. 전국에서 올라온 과거 준비생들로 한양은 어수선하였다.

공자 왈, 조즉존하고 사즉망하다. 출입무시하야 막지기향은 유심지위여인저. 공자가라사대, 잡으면 남아 있고 놓으면 없어진다. 때 없이 드나들어 정처를

알 수 없는 것이란 마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박달은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과거 준비에 전념하였다. 밤과 낮의 흐름을 잊을 정도로 책을 읽고 암송하며 과거에 반드시 합격하여 보란 듯 금봉이에게 달려가겠다고 마음먹었다. 박달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에 젊고 요염한 주모는 자주 박달의 방을 기웃거렸다.

과거를 준비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외모도 준수하고 행동도 예의 바른 박달을 젊은 주모는 은근히 눈여겨보았다. 하루 세 끼 식사도 다른 방을 쓰는 사람들에 비하여 훨씬 더 신경을 쓰며 헌헌장부인 박달을 마음에 두고 있는 듯했다.

“여보시게, 뭘 그리 열심히 하시나? 이리와 한잔하시게나. 너무 공부에만 신경을 쓰면 건강을 해칠 수 있어. 이리와 우리하고 한잔하면서 천천히 공부하세. 세월이 뭐 좀 먹나?”

같은 방을 쓰는 전라도에서 올라온 유생이 초저녁부터 술타령하며 박달에게 자꾸 술을 권하였지만, 박달은 사양하였다. 그러나 계속 사양하는 것도 실례가 될 것 같아 한 잔 받아 마셨다.

“보아하니 경상도 지방에서 올라오신 도령 같은데 쉬엄쉬엄 공부하시구려. 그러다 몸이 모두 축나겠시다. 아침부터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니 내 걱정이 돼서 그러오. 천천히 쉬면서 하시구려.”

사내는 박달 도령을 은근히 깔보는 말투였다.

“수불석권(手不釋券)하는 걸 보니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구려. 박도령은 이번이 처음인가 봅니다.”

강원도에서 온 사람이 박달에게 물었다.

“네, 첫 과거입니다. 형씨께서는 처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요? 이번이 다섯 번째라오.”

강원도 사내가 허탈하게 웃었다.

“나는 네 번째 도전이오.”

전라도 사내가 탁주잔을 비우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박도령은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준수하며 또 예의도 바르니 그동안 수많은 여인네 가슴에 불 좀 지폈겠구려.”

박달은 여인네란 말에 금봉이의 화사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지, 나에게도 여인이 있지. 아주 아리따운 여인이지. 지금 이 시각에도 나의 장원급제를 위하여 천지신명에게 지극정성으로 치성(致誠)을 드리고 있을 테지. 꼭 급제해서 금봉이 정성에 답해야 하는데…….’

갑자기 금봉이 생각이 나자 박달은 마음이 무거웠다. 생전 처음 보는 자신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는 금봉이의 아름다운 얼굴이 보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과거에 합격해야 한다. 장원이 아니라도 좋으니 입격은 꼭해야 한다.’

박달이 금봉이 생각에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박도령, 뭐하우? 어서 한잔하지 않고서?”

“네네.”

강원도 사내가 박달에게 술을 한잔 따르며 박달의 수심에 찬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고향에 여인을 두고 오셨나 보군요? 혹시, 배 속에 아이라도 만들어 놓고 온 건 아니오?”

“네에?”

“내 말이 맞는가 보우? 그럼, 안심하시우. 사내는 먼 길 떠날 때 여인들에게 일을 만들어 줘야 해. 일을…….”

“여자들은 잡념이 없어야 해. 남정네들이 객지에 나가 있는 동안 엉뚱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지. 그래서 먼 길 떠나는 남정네들은 떠나기 전에 꼭 씨를 뿌려놓아야 안심을 할 수 있거든.”

“형씨,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허어? 박도령 내말이 무슨 뜻인지 정말 모른단 말이오?”

박달은 강원도 사내의 말을 듣고 다시 금봉이를 생각하였다.

‘배 속에 아이를 만든다?’

박달은 술을 마시며 금봉이와 처음 만난 밤 나눈 사랑을 그려보았다.

‘그때가 참으로 좋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마치 꿈을 꾼 것처럼 황홀하고 너무 기분이 좋았었어.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리고 밤에도…….’

박달은 여인과 사랑하는 법만 알았지 남녀가 자주 사랑을 나누다 보면 아이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아기는 정식으로 혼인을 올리고 난 뒤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적으로 삼신할머니가 부부가 몰래 자는 방에 갖다 놓는 줄 알고 있었다. 늘 공부만 하던 박달은 여인의 오묘하고 복잡한 신체 구조와 기능에 관하여 잘 몰랐다.

‘설마 몇 번 나눈 사랑에 아기가 생기려고?’

“형씨, 하나만 물어볼게요.”

“응? 물어보시구려.”

두 사내가 의아한 시선으로 박달 도령을 바라보았다.

“아녀자들 배 속에 아기가 생기는 것은 삼신할머니가 점지해야 생기는 거 아닌가요? 혼인도 하지 않은 처녀에게는 절대로 아기가 생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박달의 말에 두 사내는 갑자기 배를 움켜잡고 벌렁 누워 박장대소하였다.

‘거참 이상한 사람들이네. 내 말이 뭐 잘못되었나? 웃긴 왜 웃는단 말인가?’

“맞아, 맞아. 삼신할미가 점지하지 않으면 절대로 아기가 생기지 않지.”

전라도 사나이가 다시 포복절도하며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박도령 고향 처녀에게 씨라도 뿌리고 온 거여?”

“네에? 씨라뇨?”

‘이런 바보 같은 녀석. 공부만 하느라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강원도 사나이는 박달의 순진한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뽀얗고 보들보들하고 따뜻하며 촉촉한 밭에 걸쭉한 씨를 안 뿌렸느냐고?”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두 사내는 방바닥이 꺼질 정도로 발을 구르며 배꼽을 잡았다. 갑자기 박달은 바보가 된 느낌이 들었다.

“저는 도무지 무슨 말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 그만 책을 볼 테니 두 분은 계속 말씀 나누세요.”

박달이 자리로 돌아와 앉아 책을 폈다.

“박도령, 한 잔 더하시오.”

“아닙니다. 명심보감을 읽어보려고요. 시험이 다가오니 자꾸 암기하고 있던 내용도 생각이 안 나서 큰일입니다.”

“그러지 말고 한잔 더 하시구려.”

박달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책을 펴고 소리 내어 읽기 시작하자 두 사나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박달에게 곁눈질하며 자기들끼리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 녀석이 어수룩한 척하지만 분명 고향의 처자에게 씨를 뿌려놓고 온 게 분명해.”

“맞아. 아까 얼굴을 보니 수심이 가득 차 보였어.”

“저런 멍청한 녀석하고는…….”

두 사람은 자기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을 마셔댔다.

자왈, 총명사예도 수지이우하고, 공피천하라도 수지이양하고 용력진세라도

수지이겁하고 부유사해라도 수지이겸이니라.

공자가라사대, 총명하고 생각이 뛰어나도 어리석은 체하여야 하고, 공이 천하를 덮을 만하더라도 겸양하여야 하고, 용맹이 세상에 떨칠지라도 늘 조심하여야 하고, 부유한 것이 사해를 차지했어도 겸손하여야 하느니라.

“염병할! 저놈이 우리보고 들으란 소리 같네.”

강원도에서 온 사내가 술 한 잔을 비우더니 중얼거렸다.

“우리같이 뒷줄이 없는 사람들은 백날 공부해야 별수 없더구먼. 빌어먹을 놈의 세상 같으니. 이미 과거의 장원급제는 다 정해진 일인데 공부는 해서 무엇 한단 말이여. 이보시게! 우리 오늘은 그동안 공부하느라 머리도 아프고 하니 술이나 질탕하니 마시자고.”

전라도 사내가 강원도 사내에게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하자 강원도 사내도 맞장구쳤다.

“동감일세. 이미 장원급제는 영의정 등 삼정승 자제나 친인척들에게 배정되었을 텐데, 힘들여 공부해봤자지.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라고. 그리고 공부도 쉬엄쉬엄해야 하지. 저러다 눈감으면 코 베어 가는 이 한양 바닥에서 병이라도 덜컥 나는 날에는 도로아미타불이지. 암, 그렇고말고.”

전라도에서 온 사내가 박달을 한번 흘낏 바라보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난 한양 올라오기 전에 우리 동네 윤초시댁 셋째를 건드려 놨는데 걱정이 된 다우.”

강원도 사내가 은근히 자랑하였다.

“난, 우리 아버지가 예뻐하는 우리 집 종년을 건드려 놨는데, 혹시 고것이 아버지에게 고자질했을까 봐 걱정이라네. 그 애 거시기가 엄청나게 차지고 쫄깃한 것이 사내들은 한번 맛보면 환장하지.”

전라도 사내가 자랑스러운 듯 말하였다.

‘아아, 저 사람들이 한양까지 와서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는구나. 그러나 나는 금봉이와 고향의 어머님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이번 과거에 꼭 합격해야 해.’

박달은 두 사내의 음탕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책을 읽었지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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