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삼합경의 증광시

“도령님, 한잔 드셨으면 저에게도 한잔 주셔야지요?”

“응? 그, 그래야 하는 거지요?”

‘아니 이 사내가 정말 숙맥인가? 아무리 공부만 하는 사내라고 하지만 몰라도 너무 모른다 정말. 이거 괜히 시간 낭비하는 거 아닌가 몰라. 외모는 그럴듯한데…….’

주모는 혼자 중얼거리며 박달이 건넨 잔을 단 숨에 비우고 다시 박달에게 술을 가득 따라 건넸다.

“너무 많이 마시면 내일 공부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 나는 그만 마시겠습니다. 이만, 일어날게요. 주모, 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

박달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주모는 펄쩍 뛰면서 박달의 소매를 잡아 다녔다.

“박도령님, 이 야심한 밤에 여인의 가슴에 불을 지펴놓고 그냥가시면 어떻게 해요? 불을 꺼주시고 가시던지 하셔야지요?”

주모가 입을 삐죽 내밀면서 투정을 부렸다.

‘불? 무슨 불? 내가 불을 지폈나?’

“내가 언제 불을 지폈다고요?”

‘이 도령이 진짜로 멍청이네. 미치겠네 정말. 내 입으로 말을 해야 알아들을 것인가?’

주모는 눈을 흘기면서 박달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진한 분 냄새가 확 풍겨오면서 박달은 정신이 아득했다.

“박도령님, 저는 그동안 박도령님을 깊이 생각해왔어요.”

“네에?”

박달은 잠시 정신이 혼몽하여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정신을 차리고 주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박도령님이 처음 우리 주막에 오셨을 때 저는 환생한 제 서방님이 오시는 줄 알았어요.”

‘환생한 서방?’

“주모는 혼자 아니오?”

“혼자 맞아요.”

길게 한숨을 내쉰 주모는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였다. 주모는 혼자 술잔을 따라 단번에 마시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서방은 죽었어요. 서너 해 전에 병으로 죽었어요.”

“저런! 주모에게 그런 아픈 사연이 있었군요. 무얼 하시던 분이신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나요?”

박달이 주모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우리 서방도 과거를 준비하던 책상물림이었습니다.”

‘아아, 그래서 주모의 방에 서책이?’

“그러면 저 서책들은 낭군께서 읽던 책이겠군요?”

박달이 서책들이 놓여있는 탁자를 가리켰다.

“보셨군요. 저 서책들은 우리 낭군이 죽기 전까지 읽던 책이랍니다. 아마 죽지 않았으면 지금 쯤 한 벼슬하고 있을 텐데…….”

주모는 중인(中人) 집안에서 태어나 몰락한 양반집으로 출가하였다. 시댁에서는 수십 년간 벼슬아치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위기를 느낀 시부는 가문을 중흥시키기 위하여 불철주야 아들을 과거에 매달리게 했다. 부부는 방도 따로 쓰며 오로지 지아비가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하였다.

시댁에서는 그런 며느리를 어여삐 여기게 되었지만, 과거 합격 소식은 요원하기만 하였다. 부부생활을 엄격하게 절제하여 슬하에 자식도 없으며, 지아비가 과거에 합격할 때까지 후세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지아비는 과거를 볼 때마다 낙방하여 낙방거사(落榜居士)란 불명이 붙었다. 여인은 지아비를 독려해가며 이를 악물고 뒷바라지 하였다.

공부에 별로 재주가 없던 남편을 채근하며 공부에 전념케 하기를 수년, 남편은 그만 낙방만 하다가 어느 봄날, 합방하다가 복상사(腹上死)하고 말았다. 멀쩡하던 남편이 복상사하자 여인은 시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던 여인은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털어 주막을 열었고 주막을 찾아오는 유생들을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 색기가 많은 여인은 박달처럼 헌헌장부의 사내가 찾아들기를 은근히 기대했었다.

어느 늦은 가을날 죽은 남편과 외모가 비슷한 박달이 주막을 찾았다. 주모는 박달에게 이러저러한 것들을 물어보고 박달이 총각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주모의 관심이 호기심으로, 호기심은 어느덧 박달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변하고 말았다.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주모는 기회가 되면 자신의 심정을 박달에게 알리고 싶었다.

“박도령님, 비록 주막에서 술이나 파는 여자지만 저는 뜻이 크답니다.”

“아, 그래요?”

“우선 한 잔 더 받으시고 이야기 나눠요.”

주모가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박달에게 술잔을 건넸다.

“주모, 오늘은 너무 늦은 거 같은데요?”

“박도령님 말씀을 들으니 고향에는 처자식도 없고 노모 한분만 계신 듯 한데요. 노모께서 박도령님을 뒷바라지하시기 너무 힘들 것 같네요. 빨리 과거에 입격하셔서 노모님을 봉양하셔야 하잖아요. 이번 과거에 꼭 합격하세요.”

‘주모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그래서, 그래서 말씀인데요.”

주모는 뜸을 들이며 박달의 눈치를 한번 살폈다.

“그래서요?”

박달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제가 도령님 뒷바라지를 하면 안 될까 해서요.”

“네에? 내 뒷바라지를 한다고요?”

박달은 깜짝 놀라며 주모의 붉고 촉촉한 입술을 바라보았다. 입술이 너무 탐스러워 박달은 하마터면 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고 싶었다. 박달은 머리를 흔들었다.

‘이 여자 미쳤나? 외간 남자에게 뒷바라지를 하겠다니? 주모가 대취하여 실성을 한 건가? 그런데 주모가 어째서 여인으로 보이는 걸까?’

“제가 박도령님 이 주막에 계시는 동안 서방님처럼 모시면 안 될 까요?”

주모는 재차 말하고 발그레하게 변한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박달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무리 취중이라고 해도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주모의 말을 못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박달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모의 방을 나왔다.

“박도령님!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해요?”

박달은 주모의 방에서 나와 얼른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주모의 말에 박달 도령의 가슴은 벌렁 거렸다.

‘아니, 뭐 저런 바보 멍청이 같은 남자가 다 있어?’

주모는 방을 나가는 박달을 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는데 마다 여인들 때문에 못살겠구나. 길 떠나기 전에 훈장님께서 나에게 여난(女難)을 조심하라고 하셨고, 흥호에서 만난 대길이 형님도 역시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 두 분의 말씀이 딱 들어맞는 것도 같은데......’

박달은 두 사내가 코를 골며 잠에 빠져있는 봉놋방으로 돌아와 누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술에 취하기는 했지만 가까이서 본 주모의 미모에 박달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벌말에서 자신의 급제만을 바라며 주야로 천지신명께 비손하고 있을 금봉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그리만 해준다면 나야 손해 볼 게 없지. 그러나 사내가 지조 없이 근본을 모르는 객지의 여인에게 함부로 내조(內助)를 받을 수도 없는 일이지. 세상에 공짜 밥은 없어. 금봉이 나의 이 같은 사정을 안다면 기절할 텐데…….’

박달은 깊은 새벽까지 전전반측하였지만 머리는 점점 더 맑고 잠은 멀리 달아나 있었다.

‘주모가 한 여름 향기 진한 꽃이라면, 금봉이는 매화나 진달래 같은 여인이야. 한 여인은 너무 향기가 진하고 또 한 여인은 고매하면서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지. 하지만 주모도 가만히 살펴보면 상당히 예쁜 여인인데…….’

박달은 서서히 올라오는 음심(淫心)을 잠재우느라 일어나 앉았다. 두 사내들의 코고는 소리와 발고랑 내가 좁은 봉놋방에 가득하였다. 박달은 일어났다 누웠다 반복하면서 여러 잡념에 휩싸였다.

‘주모의 말대로 모르는 척하고 뒷바라지를 받아 볼까? 노잣돈도 얼마 안 남았는데. 주모의 뒷바라지를 받게 되면 우선은 먹고 자는 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는데…….’

주모의 촉촉하고 붉은 입술에서 진한 체취가 풍겨오는 듯 했다. 능금처럼 빨갛게 익은 주모의 뺨이 떠오르며 단단한 박달의 심사를 뒤흔들었다.

‘안 돼. 안 돼. 절대 그럴 수 없어. 금봉이와 한 약속을 지켜야 돼.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그까짓 돈 몇 푼에 지조를 팔면 안 돼.’

박달이 잡생각으로 잠을 청하지 못하다가 깜박 잠이 들 무렵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과거 보는 날이 정해졌다. 이번에 보는 과거는 증광시(增廣試)로 3년에 한번 꼴로 보는 식년시(式年試)가 아닌 세자가례경(世子嘉禮慶)과 역적토벌의 자축(自祝) 그리고 원자(元子) 탄생의 삼합경(三合慶)으로 치러지는 부정기 시험이었다. 곳곳에 과거를 알리는 방이 붙었고 한양의 저잣거리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번 증광시는 세 가지 경사스러운 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이백여 명 이상을 뽑는 다고 하여 그 어느 때보다 과거 준비생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한양 전체가 과거에 몸살을 앓을 정도로 과거가 장안의 주요 화제로 등장했다.

‘잘되었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과거에 전념하자. 꼭 합격해서 고향의 노모를 편안케 해드려야지. 금봉이에게도…….’

박달은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읽었다. 함께 방을 쓰는 두 사내는 그런 박달의 행동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박도령, 한잔하자고.”

“딱 한잔만 하시구려. 우리끼리 마시기 뭣하네.”

“아닙니다. 저는 머리가 좀 아파서요.”

“머리 아플 때는 술이 최고여.”

“암! 그렇고말고, 술이 최고지. 최고고 말고.”

박달은 두 사람의 말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렸다. 도대체 두 사람은 왜 시간과 돈을 낭비하며 고향을 떠나 한양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박달에게 그 두 사내는 참으로 한심하고 할 일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함께 봉놋방을 사용하는 첫날부터 두 사내는 매일같이 술타령이었다.

그냥 잠자코 술이나 마시면 되겠지만 옆에서 글을 읽고 있는 박달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음담패설을 안주 삼아 술타령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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