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주모의 지고한 순정

“주모, 고마워요.”

“도령님, 오늘 밤, 주막 영업이 끝나고 잠시 찾아뵈면 안 될까요?”

‘오늘 밤?’

“과거가 코앞이라 공부에 전념해야 할 밤에 시간을 내 달라니요?”

“박도령님이 너무 공부에만 매달려 있다 보니 몸이 많이 축난 것 같아서 씨암탉을 잡아 푹 고아 드리려고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는 병이 나고 말거에요. 아셨죠? 주무시지 말고 기다려주세요.”

손님들이 밀려들자 주모는 주방 보조하는 여인네 두 명을 더 두었다. 손님이 많아 주모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지만, 주막의 봉놋방에서 과거를 준비하는 유생들에게는 고역이었다.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주모는 장기간 유숙하던 손님이 방을 비우자 박달을 그 방으로 옮기게 하였다. 혼자 사용하기에 충분히 넓고 깨끗한 방이었다. 뒤채에서 서쪽으로 맨 끝 쪽에 있는 봉놋방이라 남의 눈에도 쉽게 띄지 않았다.

그런 박달을 두고 다른 과거 준비생들은 박달이 돈을 더 내고 독방을 쓰는 줄 알고 부러워하였다. 짐이라고 해봐야 서책 몇 권과 옷 두벌이 전부였다. 박달은 우선 강원도와 전라도에서 온 두 사내와 방을 따로 쓰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이제 부터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주모는 박달에게 방을 옮겨주고 음식에 더욱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영업을 마친 주모는 늦은 밤 인삼을 넣어 푹 고은 삼계탕을 맛깔스런 찬과 함께 정성껏 차려서 박달의 방으로 들었다.

한 눈에 보아도 주모가 얼마나 박달에게 신경을 쓰는 지 알 수 있었다. 고향에서 과거를 보러 떠나기 전에 어머님이 정성을 다해 고아 준 바로 그 음식이었다. 박달은 주모가 해온 음식을 앞에 두고 잠시 고향에 계신 노모를 생각하였다. 이 시각에도 자식의 무사안일과 과거의 급제를 위하여 노심초사하고 계실 노모였다. 갑자기 박달은 눈시울을 붉혔다.

“왜요? 어서 드시지 않고요? 요즘 공부에만 전념하느라 몸이 많이 상해 보여요. 어서 이것 좀 드셔보셔요. 입 안이 깔깔하면, 탁주 한잔 먼저 드세요.”

박달은 젊고 예쁜 주모가 따라주는 탁주 한 사발을 단숨에 비웠다. 탁주 맛이

꿀맛이었다. 매일 공부에만 전념하느라 잊었던 술이었다.

“주모,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으리다.”

“은혜라니요? 우리 주막에서 장원급제가 나왔다는 소문나면 저도 좋고 도령님도 좋은 거 아니겠어요?”

“그렇지요. 나도 좋고, 이 주막도 유명해져서 좋고.”

“식기 전에 드세요.”

박달은 주모가 정성껏 마련해 온 삼계탕을 들었다. 주모는 마치 박달 도령의 아내라도 된 것처럼 닭고기를 먹기 좋게 찢어서 박달 앞에 놓아 주었다. 그런 주모를 바라보는 박달은 가슴이 뭉클해지며 고향의 노모와 벌말의 금봉이를 떠올렸다. 박달은 삼계탕을 먹다 목이 메었다.

“주모도 같이 들어요.”

“저는 도령님이 드시는 거만 보아도 배가 불러요.”

주모의 붉고 촉촉한 입술 사이로 가지런하고 하얀 치아가 사랑스럽게 보였다.

“나 혼자 들기가 좀 뭣해서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많이 드세요.”

주모는 박달 옆에 앉아서 홀짝거리면 술잔을 비웠다. 주모의 발그레한 얼굴이 마치 잘 익은 사과 같았다.

“이번 과거에는 자신 있으신 거죠?”

“글쎄요. 치러봐야 알겠지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셨는데 합격하셔야지요. 저는 과거에 한이 맺힌 여인이랍니다. 며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남편이 과거 공부하다 유명을 달리했어요. 저는 과거 준비하는 분만 보면 돕고 싶어요. 물론 도령님처럼 제 마음에 드는 분이라야 하겠지만요.”

주모는 자작을 하면서 가슴에 맺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런 주모를 보자 박달은 며칠 전 밤 주모에게 야박하게 대했던 것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주모, 그때는 내 미안했소. 밤도 늦고 남녀가 유별하다고 배워서요.”

“아닙니다. 그날 제가 술에 취해 박도령님에게 실례를 했어요.”

“아니오. 내가 사내답지 못했어요.”

“지나간 이야기인걸요. 도령님, 저는 진심으로 도령님 뒷바라지를 해드리고 싶어요. 이건 저의 순수한 마음입니다. 제 청을 거절하지 마세요.”

주모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박달에게 말하였다.

“주모, 나는 과거가 끝나면 이 주막을 떠야 합니다. 그러니 나에게 너무 많은 정을 쏟으려 하지 마세요. 세상에서 가장 끊어내기 어려운 것이 정이라 들었습니다. 이러다 내가 주모에게 정이라도 들까 걱정이 됩니다.”

박달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박도령님, 만약 이번 과거에 합격하셨다하여도 벼슬을 제수받기까지 한참을 더 계셔야합니다. 초시(初試)에 합격하시더라도 내년 봄에 복시(覆試) 그리고 최종적으로 상감마마 앞에서 보는 전시(殿試)까지 세 단계 모두 합격해야 하는데 도령님께서는 모든 준비가 되셨는지요? 그때까지 한양에 계시면서 차근차근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준비? 준비라……. 훈장님은 초시에 합격하면 곧바로 내려오라고 하셨는데?’

박달은 멀거니 주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외람된 말씀이지만 만약에 도령님께서 운이 없으시어 낙방이라도 하시면 어찌하시게요? 그냥 낙향하시려고요? 그리하면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의 얼굴을 어찌 보시려고요? 이번 증광시에서 고배를 마시면 다시 삼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혹시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면 치르는 별시(別試)라도 보셔서 합격해야합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적어도 일 년 이상을 한양에 기거하셔야 하는데 준비가 안 되신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주모의 말의 거침없었다. 과거에 대하여 정확히 알고 있는 주모에게 박달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게 알고 있던 과거 제도에 대하여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주모가 두렵게 느껴졌다. 그는 주모가 보통 여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박달은 초시에 붙기만 하면 모든 일이 다 되는 줄 알았다.

‘이 여인이 과거제도에 대하여 훤히 꿰뚫고 있구나. 나는 공부만 하였지 주모처럼 자세한 과거제도에 대하여 잘 몰랐어. 보통 여인이 아니구나. 하기야 낭군이 과거공부하다 죽었다니 그럴 만도 하겠지. 주모 말대로 이번 과거에 입격하지 못하면 어찌하나? 빈손으로 고향에 내려갈 수도 없으니…….’

주모의 말을 듣고 있던 박달은 한숨을 내 쉬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한잔 더 하시지 않고요?”

주모는 박달의 잔에 술을 따르려하였다.

“아니요. 공부해야하는 시간에 이렇게 그대와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인다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아요.”

박달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령님은 참으로 순진하세요. 제가 잡아먹기라도 할까봐 그러세요?”

주모는 상기된 얼굴로 박달을 빤히 쳐다보았다. 주모의 눈동자에 박달의 잘 생긴 얼굴이 아로 새겨져 있었다.

“아, 아니 그, 그것이 아니고…….”

수많은 과거준비생을 지켜보았고, 낭군이 과거를 준비하다 죽어 낭패를 본 주모는 과거시험에 대하여 박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박달은 과거에 합격하면 금방이라도 벼슬을 제수 받아 고향으로 가는 줄 알았다. 주모 말대로 좀 더 머물면서 두 번째 시험인 복시를 준비하여야 했고, 최종 전시까지 마치려면 상당한 시간과 돈이 필요했다. 박달은 초시 결과만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계획을 고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초시에 합격하면 우선 고향에 내려가 어머님께 알려야 하고 금봉이도 만나야 해. 그리고 다시 한양으로 올라와 복시와 전시를 준비해야지. 그러나 만약에 낙방하면 어찌하누?’

박달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또 한숨을 토해냈다.

“자, 한잔 더 하셔요. 도령님. 오늘은 밤도 깊었으니 술 한 잔에 모든 잡념을 털어버리고 푹 주무세요.”

박달의 마음속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주모는 그의 고민을 간파하고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 온 대개의 과거 준비생들이 당장의 눈앞의 결과만을 생각하고 올라오기 십상이어서 과거에 불합격 할 경우를 대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주모는 잘 알고 있었다.

“주모, 마음이 무겁소.”

박달은 한잔 술에 은은히 취기가 오르자 주모가 고마웠다. 자신은 생각도 해보지 못한 앞일까지 주모가 걱정해 주자 박달은 점점 주모에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멀리 평동에서 자신의 과거 급제를 위하여 불철주야 천지신명에게 지성을 드리고 있을 금봉이 생각에 마음이 우울해졌다.

“그렇겠지요. 시험 볼 날은 다가오는데. 왜 안 그러시겠어요? 과거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하겠지요.”

주모의 말대로 박달은 술 한 잔 마시고 잡념을 모두 털어내고 싶었다.

“딱 석 잔만 들겠소.”

“석잔 도 좋고 넉 잔도 좋아요. 이렇게 잘생긴 도령님 옆에 있으니 너무 기분이 좋네요.”

박달은 주모가 건네주는 술잔을 마다하지 않고 계속 마셔댔다. 한잔이 두 잔이 되고 석잔 이 되고 열 잔이 되었다.

‘배경도 없고 힘도 없는 내가 이번에 과연 합격할 수 있을까?’

박달은 술기운에 그만 정신이 몽롱해졌다. 주모가 건네주는 잔을 쉴 새 없이 받아 마신 결과였다. 앞에 앉아 있는 주모가 금봉이로 보이기도 했다.

“서방님, 한잔만, 딱 한잔만 더 하셔요. 네에?”

무의식중에 주모의 입에서 서방님 이란 말이 튀어 나왔다.

‘서방님?’

박달은 의식이 흐릿해지면서 졸음이 쏟아졌다.

“서방님, 이렇게 술이 약해서 어떻게 해요? 사내는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옆에 여인네가 있으면 책임을 져야죠. 박달 서방니임 -.”

‘난, 난 금봉이 서방이지 당신 서방이 아닌데…….’

술 취한 박달이 혼자서 중얼거렸지만 주모는 박달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말아 듣지 못하고 남아있는 술을 따라 마시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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