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일(雪日)
 

김남조(1927~ )

 

겨울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김남조(1927.9.26)는 대구에서 태어났으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4년 후쿠오카(福岡) 규슈여고(九州女高)를 졸업했다.

1947년 서울대학교 문예과를 수료하고,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를 졸업했다. 1950년 <연합신문>에 시 <성수(星宿)> 등을 발표하고 문단에 나왔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김남조의 시에는 기독교적인 신앙심이 곳곳에 배어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겨울나무를 보면서 혼자 서 있는 듯 보이는 나무도 바람이 있으므로 해서 그 흔들림이 보이고, 보이지 않는 바람도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의해 그 존재가 인식되듯 사람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혼자일 수 없다는 데서 이 시는 출발한다.

“나무와 바람이 홀로가 아니라 함께이므로, 너그럽게 그리고 감사하면서 삶을 누려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이 될 것이다.눈 오는 날과 새해 첫날이라는 중의적 제목을 통해 눈 내리는 새해 첫날에 깨우친 삶에 대한 지혜를 성찰하고 있는 작품이다. 사소한(단순한) 자연 현상에서 신(神)의 섭리와 삶의 깊은 의미를 도출하고 있다.

몹시 추위를 탔던 어린 시절에 큰 마당이 원망스러웠다. 어린 손으로 온 마당의 눈을 다 쳐봐라. 동심이고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때는 눈을 먹고 눈 위에서 구르고, 백설은 순수 그 자체였다. 먼 논밭에 쌓여 있는 눈을 바라보면 세상은 한없이 아름다웠다. 모든 인간이 선량해 보였다. 그러나 지금의 눈은 각종 오염물질이 섞여 있다고 한다. 출근길이 걱정이다.

도로엔 염화칼슘이 뿌려진다. 눈은 로맨틱한 존재가 아니라 ‘위험한’ 상태를 조장하는 가치로 바뀌었다. 일체의 오염도 허락하지 않는 순수 백설 속에 일상의 삶을 잠시라도 맡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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