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산골 소녀의 간절한 소원

‘으이그, 바보같으니. 내가 이런 자에게 희망을 걸어? 아니면 이쯤에서 냉정하게 포기해?’

주모는 술에 취해 옆으로 쓰러져 잠이 든 박달의 겉옷을 벗겨 주었다.

‘서방님, 안돼요. 안 돼요! 정신 차리세요. 서방님! 저의 말대로 하세요. 그냥 잠드시면 안 돼요. 제발 정신 차리세요.’

박달이 잠시 선잠에 들어 있을 때 꿈속에 금봉이 나타났다. 그런데 금봉이의 모습이 이상했다. 배가 불룩하게 나온 것이 눈에 익은 모습이 아니었다. 금봉이 하얀 손을 흔들며 박달에게 '안 된다'고 하면서 소리를 질러 댔지만 박달은 손만 내 저을 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금봉이! 금봉이! 거, 걱정하지 마요. 나 술 안 취했어요.”

“서방님, 안 돼요. 어서 일어나셔요. 어서요. 서방님!”

“나 안 취했다니까요? 걱정 말아요.”

박달은 잠꼬대를 몇 번하더니 이내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박달이 술을

이기지 못하고 취해 쓰러지자 주모는 허탈해 했다.

‘세상에나. 무슨 이런 남정네가 다 있단 말인가? 다른 사내들 같으면 나를 품어 보려고 안달할 텐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내로구나.’

박달을 유혹해 보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주모는 투덜거리며 방을 나왔다. 며칠이 거짓말처럼 지나갔다. 과거시험 보는 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꾸물거리던 하늘에서 눈발이 날렸다. 박달은 아침 일찍 주막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주모는 이틀 전부터 내부 사정으로 오늘 하루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미리 안내문을 써서 내걸었다. 새벽처럼 일어난 주모는 정성을 다하여 박달에게 아침을 차려주고 깨끗하게 다린 바지와 저고리, 도포 그리고 버선을 들고 박달의 방으로 들었다.

“서방님, 마음 편히 잡숫고 과거를 보셔야 해요. 너무 조급해 하시거나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제, 그 동안 서방님께서 갈고 닦으신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실 때가 온 거예요. 아셨죠? 절대로 조급하게 마음먹지마세요.”

주모는 박달을 서방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박달은 주모와 한방에서 잠을 잤으니 그렇게 불러도 큰 무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주모, 고맙소. 내가 당신 덕분에 호강을 하는 구려.”

“아닙니다. 저도 서방님 덕분에 새롭게 봄을 맞은 걸요.”

박달은 비록 사내들에게 술과 국밥을 팔고 있는 여자이지만 자신에게 정성을 다하여 뒷바라지 하고 있는 주모가 너무 고마웠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의 아내처럼 주모는 정성을 다해 박달의 옷고름과 버선의 대님을 매주었다.

“그럼, 다녀오리다.”

“서방님, 성균관까지 제가 서방님을 모실게요.”

“아니오. 그대는 그냥 주막에 있어요. 나 혼자서 찾아 갈 수 있어요.”

박달은 주모가 따라 나선다는 말에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는 듯했다. 한양 지리를 잘 모르는 터라 자칫 과장(科場)을 찾지 못해 과거를 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서방님, 과장까지만 갈 테니 허락해 주세요.”

주모는 이미 꽃단장을 마치고 박달을 따라 가려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듯 했다. 따라오지 못하게 하여도 뒤를 따라 올 것이 분명하였다. 박달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주모와 함께 과거 시험장을 찾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남들은 과장에 여인과 같이 간다는 것을 부정 타는 일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박달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서방니임-.”

“그럼, 밖에서 기다려야 하오.”

“그럼요. 아녀자가 감히 과장엘 어떻게 들어가요? 과거 끝나고 저녁에 서방님에게 최고의 밤을 만들어 드릴게요. 과거만 잘 보셔요. 아셨죠?”

‘금봉이 나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낙담할까? 이게 아닌데. 금봉이, 못난 남자를 용서하구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오. 내가 그대와 약속했듯이 과거에 합격하면 꼭 그대를 찾으리다. 꼭…….’

눈이 내리다 말고 그쳤다. 아직 날이 밝기 전이라 거리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뜸했다. 마포에서 걸어 과거를 보는 성균관(成均館) 명륜당까지 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마포에서 공덕동을 거처 애오개, 보신각 그리고 운종가를 관통하여 창경궁을 끼고 성균관까지 가야했다. 주모는 미리 단골손님 중 마차(馬車)가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새벽에 주막으로 오라고 하였다. 과거 시험장까지 눈길을 가려면 위험하였다. 자칫 미끄러져 개울이나 도랑에 떨어질 경우 과거시험은 물 건너가게 되기 때문이다.

“서방님, 어서 오르세요. 성균관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해요.”

“언제 마차를 준비하였소?”

박달은 두 눈이 휘둥그레 졌다.

“서방님은 다른 데 신경 쓰지 마시고 공부하신 내용만 잊지 않도록 하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고맙소.”

박달의 뛰어난 풍신이 단단히 한몫하는 순간이었다. 박달과 주모가 탄 마차가 한양의 도심을 가로질러 달렸다. 도로가 질척거려 마차가 속도를 내면 뽀얀 눈보라가 일었다.

“천지신명님! 오늘 우리 박달 서방님께서 과거를 보시는 날입니다. 박달 서방님께서 꼭 장원급제 하도록 도우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 소녀, 이렇게 간절히 비옵나이다. 박달 서방님을 굽어 살펴주소서.”

‘어이구 청승이다. 청승…….’

새벽에 일어나 천지신명께 지성을 드리는 딸의 모습에 봉양댁은 시큰둥한 얼굴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렇지! 오늘이 박달 도령이 과거를 본다는 날이지. 꼭 합격해야 하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몸이 찌뿌둥한가?’

최대호는 박달의 과거합격에 희망을 걸었다. 그는 박달이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평동으로 찾아오는 꿈에 젖어 담배를 쪽쪽 빨며 북녘 하늘을 응시했다.

“천지신명님, 부처님, 조상신님, 박달 서방님께서 장원급제하시도록 도아주세요. 이번에 꼭 장원 급제하셔야 합니다. 아니면, 소녀 너무 힘들 것 같아요. 제발, 박달 서방님께서 어사화를 꽂고 저희 집에 오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답니다. 제발 이 소녀의 소원을 들어 주세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금봉은 짬만 나면 천지신명에게 비손하였다. 며칠 전부터 몸이 무겁고 찌뿌둥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그것이 무슨 징조인지 알지 못했다. 성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산골 처녀는 다가올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상하다. 여태껏 이런 일이 없었는데, 왜 몸이 이렇게 무겁지? 이상하네. 누구한테 물어 볼 수도 없고…….’

금봉이는 몸살이나 감기 기운이 있어 잠시 몸이 무거우려니 가볍게 생각하였다. 간밤에 시랑산에 내리기 시작한 눈이 벌말을 온통 하얗게 만들어 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웃집과 소통할 수 있는 길만 겨우 내놓고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야 했다.

“아, 어쩌나? 오늘은 이등령을 올라갈 수 없겠네.”

이삼일에 한 번씩 금봉이는 혼자서 이등령에 올라 맥없이 북녘 하늘을 바라보곤 하였다. 혼자서 이등령까지 올라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아침을 들고 집을 출발하면 점심때가 되어야 이등령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벌말 사람들은 그런 금봉이를 두고 열녀가 나왔다고 쑤군거리면서 별의별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 냈다.

“얘야! 오늘은 이등령에 가지 말거라. 눈이 내려 길도 미끄럽고 위험하니 그냥 집에 있으렴.”

최대호는 딸이 눈보라 속을 뚫고 이등령에 오를까 걱정 되었다. 그러나 금봉이에게는 웬만한 눈은 문제가 되지 못했다. 오늘도 금봉이는 아침 식사를 마치면 이등령에 오를 참이었다.

“금봉아, 오늘은 집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이렇게 길이 미끄럽고 날씨도 추운데 오늘은 집에 꼭 붙어 있거라.”

“네에-.”

금봉이는 부모의 걱정에 간신히 대답하였다. 아침을 들고 금봉이 부모는 건넛마을 김초시 회갑 잔치에 참석하기 위하여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면서도 최대호는 딸에게 밖에 나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임이 계신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리기 위한 산골 처녀의 열정은 누구도 가로 막지 못했다. 부모가 집을 나서자마자 금봉이는 옷을 단단히 껴입고 이등령으로 향했다.

‘집에만 있을 수 없어. 서방님 소식을 들으려면 이등령에 올라가 봐야해. 북녘에서 날아오는 기러기들이 서방님 소식을 전해줄지 모르잖아. 서낭당에도 가야해. 서낭신에게 서방님이 장원급제 하게 해달라고 빌어야지.’

금봉이 집 밖으로 나오자 사방이 온통 백색의 세상이었다.

“아아, 너무 눈이 부시다. 이렇게 서설(瑞雪)이 내린 날 우리 서방님은 꼭 장원급제하시겠지. 천지신명님, 고맙습니다. 소녀의 소원을 들어주셨나 봅니다. 이런 날 소녀는 집안에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소원을 빌러 가옵니다.”

금봉이 눈보라를 헤치고 서낭당에 들러 간절하게 박달의 장원급제를 빌었다. 산등성이에서 불어오는 눈보라가 금봉이의 치맛자락을 휘감았다.

운종가에 들어서니 눈을 뒤집어 쓴 보신각(普信閣)이 박달 일행을 맞았다. 이른 아침인데 불구하고 육의전은 사람들로 붐볐다. '명주전골', '조개전골', '갓전골', '바리전골', '소금전골', '종이전골', '벙거짓골' 등 한양의 유명상가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는데 상인들이 모두 나와 도로에 쌓인 눈을 치우느라 난리법석이었다.

“마부님, 좀 더 빨리 갈 수 없겠어요?”

"왜유? 늦었어유?”

마부가 주모를 돌아보았다.

“오시(午時)에 과거가 시작되기 때문에 *사시까지는 성균관의 명륜당까지 들어 가야해요.”

“알았수. 주모도 성질이 꽤나 급하시우.”

주모가 마부에게 채근하자 마부는 주모와 박달의 얼굴을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채찍을 들어 말의 엉덩이를 향해 내리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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