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뜬금 없는 파주문월

말이 길게 울음소리를 내더니 속도를 내기 시작하였다. 창경궁을 끼고 마차가 경쾌하게 달렸다.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의 창경궁 문을 지키는 문지기 들이 박달이 탄 마차를 바라보았다.

붉은색과 푸른색의 철릭을 입고 긴 칼을 차고 대궐 문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멋진 수문장의 모습을 박달은 그만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서설이 내려 온통 지붕이 하얗게 변해버린 창경궁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자 박달은 만감이 교차했다. 조선의 권력을 상징하는 대궐이었다.

* 사시(巳時) - 오전 9시 ~ 11시 사이.

박달이 그리도 보고 싶어 하는 대궐이 눈앞에 있었다. 높고 길게 이어진 대궐의 담장이 감히 평민들에게는 출입이 허락될 것 같지 않았다. 궁궐 내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전각의 높은 용마루가 근엄하면서도 거만하게 보였고, 대당사부(大唐師傅) 삼장법사 하늘의 망나니 손행자(孫行者) 그리고 저팔계(豬八戒) 등 어처구니들이 추위에 덜덜 떨면서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박달에게는 신비하게 다가왔다.

‘아! 과연 대궐은 굉장하구나. 내가 과거에 합격하면 대궐을 들락거리며 나랏일을 볼 수 있을 테지. 그러기 위해서 오늘 과거에 꼭 합격해야 해. 합격하여 나중에 벼슬을 하게 되면 저 대궐에서 나라님, 왕자, 공주들 그리고 무수한 궁녀들을 볼 수 있겠지.’

박달은 스쳐 지나가는 궁궐의 모습을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었다.

이랴 -.

마부의 채찍이 다시 한 번 허공에서 마찰음을 내자 말은 달음박질 쳤다. 창경궁의 높은 담장을 끼고 어느 정도 달려가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서 걸어가는 모습이 박달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모습은 한결 같이 추워 보이면서 무언가 쫓기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그들을 가만히 살펴보니 괴나리봇짐을 메고 왼쪽 아니면 오른쪽에 서책을 끼고 걸어가는 모습이 영락없이 과거를 보기 위하여 전국 팔도에서 올라온 유생(儒生)들이 틀림없어 보였다. 대부분의 과거를 보러가는 사람들은 혼자였다.

장옷을 뒤집어 쓴 여인과 다정하게 걸어가는 유생도 보였다. 여인들의 옷차림으로 보아 부인이나 어머니 같았다. 어린 유생(儒生)이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어른의 손을 잡고 걷는 모습도 보였다. 조금 더 가자 마차가 더는 비집고 들어 갈 수 없을 정도로 유생들이 길게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옆에는 과거를 잘 보라고 격려하기 위하여 함께온 사람들도 보였다. 그들은 유생의 친구로 보이는데 과거보는 벗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는 것 같았다. 박달 도령과 주모는 마차에서 내려 걷기로 하였다. 과장 입구에 남녀가 다정하게 나타나자 따가운 시선이 두 사람의 등에 꽂히면서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서방님, 저는 여기서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저기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줄에 서 계세요. 과장으로 입장하는 분들 같네요.”

“그대 덕분에 과장까지는 잘 왔소만,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할 텐데…….”

박달은 수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서방님,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해요. 서방님은 좋은 결과를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주모는 박달을 안심시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모의 위로에 힘을 얻은 박달은 심호흡을 길게 하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과거보러 온 사람들은 줄을 서시오. 그리고 함께 온 가족이나 지인(知人)들은 열 발짝 이상 뒤로 물러서시오.”

과거를 보기 위하여 온 시험생과 함께 온 사람들이 뒤엉켜 있자 관리가 나타나서 주의를 주며 자리를 정리하느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줄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호패를 꺼내 준비하시고, 서책과 지필묵 이외의 물건은 반입이 절대로 금지되오니 명심하시오.”

관리가 과거보러 온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서방님, 부디, 과거에 합격하시어 박씨 가문을 빛내세요. 저는 여기서 서방님이 과거를 다 보고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주모는 박달의 손을 꼭 잡고 박달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있었다.

“아니오, 날씨도 쌀쌀하데 그만 돌아가요. 나는 대충 길을 아니 과거가 끝나는 대로 곧장 주막으로 달려가겠소.”

“아닙니다. 차가운 데서 과거를 보시는 서방님도 계신데요. 이까짓 하루 쯤 서있는 게 무에 그리 힘들다고요? 서방님, 너무 염려 마셔요. 서방님은 밤낮으로 공맹(孔孟)을 만나고 성현(聖賢)들을 벗으로 두시다 시피 하셨으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가 없을 겁니다.”

“저 많은 경쟁자들을 보니 가슴이 답답하면서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구려.”

“이번 과거에 서방님은 따 놓은 당상이세요. 그리도 열심히 공부를 하셨는데요? 아무려면 하늘이 모른 체 하시겠어요?”

‘하늘이 과연 나를 도울까? 나처럼 지조 없는 사내를 과연 하늘이 도우실까?’ 박달은 옆에 주모가 있었지만 밤낮으로 자신의 장원급제를 위하여 지성을 드리고 있을 금봉이를 떠올렸다.

‘이러다, 이러다 나는 하늘의 미움을 받을 거야.’

박달이 혼자 중얼거리자 주모는 불안해하는 박달의 손을 꼭 잡아주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서방님, 오늘 저녁에는 제가 서방님에게 지상 최고의 잔치를 열어 드릴게요. 과거만 잘 보세요. 기대하셔요.”

주모가 박달의 옆구리를 꼬집으면서 눈웃음을 살살 쳐댔다. 그 모습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박달은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그 멋진 행사가 뭔지 알 수 있소?”

“아니 되어요. 그럼, 김빠진 잔치가 될 수 있다고요.

‘김빠진 잔치? 그 멋진 행사가 무엇일까?’

박달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서방님, 무조건 과거만 잘 보세요. 아니, 문제만 잘 보시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답안지를 잘 작성하셔요. 아셨죠?”

주모는 빨간 입술과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맑게 웃었다.

“최선을 다하리다.”

박달은 주모에게 자신 있는 표정을 지으며 종주먹을 쥐어 보였다.

“서방님, 힘내세요.”

박달은 주모를 남겨 두고 과장이 있는 성균관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눈이 그치고 햇살이 눈부셨다. 명륜당 앞뜰에는 전국에서 올라온 유생(儒生)들로 가득 했다. 눈은 깨끗이 치워져있고 한 사람이 앉아서 과거를 볼 수 있는 멍석 같은 것이 수백 장 깔려 있었다. 시험의 부정을 방지하기 위하여 멍석은 어른 키 한배 반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대형 철통이 놓여 있는데 철통 안에 장작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박달은 예조 관리들에게 호패를 보여주고 과장(科場) 안으로 들어갔다. 박달은 시험 감독을 담당하는 관리들로부터 가운데 앉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멍석 위에 필묵(筆墨)을 가지런히 놓았다. 과거는 정확히 오시(午時)에 시작하여 미시(未時)가 시작되기 전에 마쳐야 했다. 과거장 앞에는 큰 북이 마련되어 있고 예조(禮曹)에서 나온 수십 명의 관리들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들은 유생들이 시권을 적을 답지를 돌리느라 분주했다. 박달의 전후좌우로 잔득 긴장한 응시자들이 앉아서 시제(詩題)가 빨리 내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북이 울리더니 시제가 내걸렸다.

[今人不見古時月]

“응시생들은 시제를 보고 각자 대책(對策), 표(表), 논(論), 부(賦) 중에서 한 방식을 선택하여 시권을 저술하여 시간 내에 제출토록 하시오. 감독관이 중간에 남은 시간을 알려주겠소. 부정행위를 하다 적발될 시에는 바로 퇴장 조치시킬 것이며, 이후에 십년 간 과거에 응시할 수 없음을 고지하는 바이오. 끝으로 시권 맨 오른쪽 위에는 본인 이름, 본관, 부친과 조부(祖父) 이름도 써야 합니다. 그럼 시작하시오.”

둥 -, 둥 -.

드디어 북소리가 울리며 과거가 시작되었다. 시험을 감독하는 시관(試官)들이 이리 저리 응시생들 사이를 누비며 시제를 들고 다니며 큰소리로 외쳤다. 응시생들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시제를 적느라 잠시 웅성거림이 있었으나 이내 잠잠하였다. 시제를 본 어떤 응시생들은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고, 어떤 응시생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무엇인가 감을 잡았다는 표정을 짓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한숨만 쉬고 있었다. 모두들 어떻게 답안지를 작성할까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시제는 당나라 시인 *이적선의 파주문월(把酒問月)이란 칠언율시 둘째 연(聯)의 둘째 시구(詩句)가 아닌가?’

박달은 당시(唐詩) 중 빼어나다고 이름난 시 삼백 수(首)를 암기하고 있었다. 박달은 천자문을 떼기 시작하자 시경(詩經)과 당나라 시를 먼저 배우고 암기했다. 그것은 서당의 훈장의 방침이기도 하여 학동들은 모두 시경과 당시를 줄줄 외울 정도가 돼야 했다. 그런데 이백의 시중에서 시제가 제시되니 잠시 혼란 스러웠다. 박달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묘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 이적선(李謫仙) - 당나라 시인 이태백을 가리킴. 적선이란 하늘나라 사람으로 죄를 짓고 잠시 인간 세상에 귀양 온 신선을 말함.

예전에 출제 되었던 예상문제를 풀어보았지만 지금과 같은 아리송한 시제는 처음이었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하고 나가는 응시생도 있었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남들은 어떻게 답안지를 작성하는지 궁금해 하는 유생도 있었다. 얼른 감을 잡지 못한 박달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저 시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글자의 뜻은 ’지금의 사람들은 옛 달을 보지 못한다‘라는 뜻인데……. 천지신명님이시어! 풍산에서 온 박달을 도와주소서.’

박달은 두 눈을 꼭 감고 속으로 기도를 올렸으나 뚜렷한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과장(科場) 맨 뒤에서 부정행위를 하다 적발된 응시생 한 명이 관리들에 의해 강제로 퇴장 당할 위기에 처하자 한번만 봐달라고 사정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 유생은 곧 강제로 과장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고시월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고시월, 고시월…….’

박달은 머리를 움켜쥐고 생각에 생각을 해보았지만 뚜렷한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가 무릎을 쳤다. 그는 평소에 달에 대한 지론에 현시국의 난제를 대책(對策)의 형식으로 써내려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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