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박달, 주지육림에서 놀다

“서방님, 시장하시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괜찮아요.”

“이곳은 한양에서도 음식과 술이 맛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랍니다. 오늘 과거를 치르시느라 고생하셨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 잔 하시고 푹 쉬세요.”

아지는 분명히 이번 과거에 박달이 합격하였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교자상이 들어왔다. 상위에 차려진 음식에 박달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박나물, 취나물, 가지나물, 고추조림, 취나물, 두부조림, 찐 달걀, 편육, 닭백숙, 돼지족발, 신선로, 구이, 튀김, 화채, 탕, 산적, 잡채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음식들로 가득한 상이었다. 백자주(栢子酒)가 가득 담긴 은주전자가 들어왔다.

“서방님, 한잔 받으시어요. 과거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지는 생글생글 웃으며 박달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아지도 한잔 받지?”

박달이 주모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제 이름을 아셨군요.”

“아지 덕분에 내가 호강을 하네요. 고마워요.”

“서방님, 이게 다 서방님이 타고난 복이지요.”

“내가 그대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무척 고생하였을 거요. 정말로 고마워요.”

빈속에 술이 한두 잔 들어가자 박달은 금방 취하고 말았다. 그런 박달에게 아지는 계속 술을 따랐고 심신이 해이해진 박달은 아지의 뜻대로 움직였다. 아지도 작정을 한 듯 술잔을 기울였다.

‘금봉이. 당신이 보고 싶구려. 오늘 과거를 보긴 보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소. 빨리 과거 합격증을 가지고 달려가고 싶소.’

“서방님, 한 가지만 여쭤도 돼요?”

뺨이 빨갛게 변한 아지가 박달 도령에게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댔다.

“두 가지 물어도 괜찮소.”

“어머? 농담도 다하시고. 다름이 아니고 금봉이가 누구인가요?”

“아니, 아지가 금봉이를 어떻게 알고 있소?”

“서방님께서 잠꼬대하시는 것을 들었어요.”

“그, 그랬군요.”

“누구에요? 그 금봉이라는 사람이? 이름을 보니 여인네 같은데요?”

“…….”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박달은 아지에게 과거보러 한양으로 오는 길에 시랑산 아래 벌말에서 알게 된 산골처녀 금봉이에 관하여 이야기 해 주었다. 박달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아지의 얼굴이 굳어 있었고 눈에서 강렬한 빛을 발산하였다.

“그, 그랬군요. 그럼, 그 금봉이 처자가 서방님을 기다리고 있겠네요? 저보다 먼저 서방님의 마음을 훔친 여인이 있었네요.”

“미, 미안하오.”

“아닙니다. 미안해하실 거 없어요. 서방님이 이렇게 제 옆에 계신데요.”

아지는 금봉이에게 질투를 느끼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박달을 자신의 곁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금봉이 이야기에 기분이 상한 아지는 어떻게 하면 박달을 자신의 곁에 둘 수 있을까 골몰하였다.

‘그렇다면 과거에 합격하면 당장이라도 고향을 향해 갈 텐데. 그렇게 되면 나는 뭔가? 닭 쫓던 강아지 지붕 쳐다보는 격이 아닌가? 안 돼! 절대 안 돼. 서방님을 그 여인에게 빼앗길 수는 없어.’

박달이 과거에 합격하면 금방이라도 자신을 떠날까하여 아지는 마음이 우울해졌다. 착잡한 마음을 술로 달래고 싶은 아지는 자작으로 술잔을 연거푸 들이 켰다.

눈의 나라가 된 시랑산 아래 벌말에는 특이한 일없이 고요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금봉이 점심때가 지나 홀로 이등령 가는 길에 서낭당을 찾았다. 눈도 내리고 길도 미끄러운 상태였지만 그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낭당 앞에 서서 그동안의 고마움에 대하여 기도하고 있었다.

“서낭신님, 고마워요. 덕분에 우리 박달 서방님께서 오늘 과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합격자 발표가 나면 서방님께서 좋은 소식을 가지고 빨리

소녀에게로 돌아 올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소녀, 외로워 죽겠어요. 서방님께서

다른 곳에 한 눈팔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이렇게 비나이다.”

금봉이는 몸에서 이상 징후를 느끼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박달이 떠난 지 두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서낭당에서 치성을 드린 금봉이는 혼자서 이등령을 향해 걸었다. 산길 좌우로 고목나무들 가지에 눈꽃이 만발하여 눈이 부실 정도였다. 어쩌다 바람이 불면 눈보라가 뽀얗게 날리며 산길에 내려앉았다. 금봉이는 박달과 헤어지던 날을 생각하며 걸었다.

‘내 과거에 합격하면 제일 먼저 그대에게 달려오리다.’

어디서 박달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서방님께서는 저 벌판과 산을 넘어 달려오실 테지. 그날은 어떻게 서방님을 맞이해야 하나? 옥색치마와 노랑저고리를 준비하고 노리개도 차야지. 그리고 서방님의 옷도 한 벌 준비해야겠어. 한양에 계시면서 입고 있는 옷이 다 헤졌을 텐데…….’

금봉이는 박달을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즐거운 상상을 하였다. 이등령을 향해 걷던 금봉은 점점 높은 곳으로 오르다가 눈이 쌓인 곳을 헛디뎌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어머나!

눈이 소복이 쌓인 구덩이에 발이 미끄러지며 그만 두 서너 바퀴 구르면서 구덩이에 쳐 박히고 말았다. 그 바람에 배에 충격이 가해지면서 통증을 느꼈다.

‘안 되겠네. 이러다 큰일 나겠어. 아쉽지만 오늘은 그냥 내려가야지.’

임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이등령을 향해 걷던 금봉이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가며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서방님, 죄송해요. 이등령에 올라 서방님이 계신 한양을 바라보고 싶었어요. 곧 합격자 발표가 나겠죠? 그럼 얼른 벌말로 달려 오셔야 해요.”

금봉이는 중얼거리며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혼자서 히죽히죽 웃기도 하다가 긴 한숨을 쉬며 멀거니 북녘 하늘을 올려다 보기도하며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왔을 때 날이 저물기 시작하였다.

‘아니, 저 얘가 어딜 갔다 오는 거여?’

“얘, 금봉아 너 어디 갔다 오는데 그러니? 어디 아프니? 얼굴빛이 안 좋아 보인다?”

“서낭당에 다녀왔어요?”

“서낭당에는 왜?”

“그냥이요.”

‘저것이 박달인가 복달이 때문에 갔다 온 게로군.’

봉양댁은 딸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자 불안해했다.

“얼른 저녁 들어라. 아버지하고 나는 이미 들었어. 그런데 얘야, 너 어디 아프니? 안색이 안 좋다.”

“아니요. 아픈데 없어요.”

‘저 애가 분명히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금봉이는 저녁을 뜨는 둥 마는 둥하더니 피곤하다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한 봉양댁은 살며시 딸의 방에 들어가 보았다. 잠든 딸의 이마를 만져 본 봉양댁은 깜짝 놀랐다. 딸의 이마가 불덩이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고 있었다.

“금봉아! 어디 아픈 거야? 얘야, 말해보렴. 어디가 아픈 거야?”

“어머니, 아, 아무데도 아픈데 없어요. 푹 자고나면 괜찮아 질 거예요.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봉양댁이 끙끙 앓는 딸의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발등이 퉁퉁 부었고 종아리에도 상처도 나 있었다.

“얘, 너 이거 어디서 다친 거니?”

“아까 서낭당 다녀오다가 눈길에 넘어졌어요.”

“어이구, 그러게 이렇게 길이 미끄러운데 거길 왜 가니?”

“박달님이 무사히 돌아오시라고 빌러 갔다 왔어요.”

“이것아, 그 사람이 오늘 과거가 끝났다 하더라도 한참 더 있어야 해. 안되겠어. 박씨를 불러야 겠다. 너 이렇게 열이 펄펄 나는데 어떻게 밤을 새우려고 하는 거야?”

“어머니, 그냥 두세요. 잠자고 나면 좋아질 거예요.”

“이것아 밤새 끙끙 앓다가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어머니, 아버지 걱정하셔요. 그냥 두시래도요?”

봉양댁은 딸의 건강이 염려되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대처 한의원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적이 있는 박씨를 부르러 갔다. 어깨 너머로 배운 의술로 산촌에서는 의원으로 통하는 박씨였다. 열이 펄펄 끓는 딸을 그냥 내버려 두면 큰일이라고 날 것 같았다. 봉양댁의 부탁을 받은 박씨가 간단한 의료 기구를 들고 집을 나섰다.

과거를 보고 마음이 홀가분해진 박달 도령은 운종가 피마골 색주가에서 대낮부터 술과 여인에 취해있었다. 앞에 있는 여인이 금봉이 인지 아지인지 분간도 못할 정도로 대취하였다. 아지는 박달의 마음을 확실하게 잡아두기 위하여 온갖 애교를 떨었다.

“서방님, 벌말에 있는 금봉이와 저 중에 누가 더 예뻐요?”

“…….”

“서방니임-.”

“그대가 만개한 모란꽃이라면 금봉이는 아침 이슬 머금은 목련이라오.”

“저를 그리 표현해 주시니 고맙긴 합니다만, 둘 중에 누가 더 예쁘냐고요?”

아지도 술에 대취하여 발음이 부정확하였다. 가물가물한 박달의 시야에 들어 온 아지의 붉은 입술이 마치 잘 익은 산딸기 같았다. 박달은 그 산딸기가 꽤 맛이 있을 것 같아 손을 들어 만져보았다.

“서방님, 제 입술에 뭐가 묻었어요?”

박달의 행동에 음심(淫心)이 발동한 아지가 박달의 곁으로 바싹 다가와 앉았다. 강렬한 여인의 체취가 박달을 자극하였다.

‘탐스러운 딸기로다. 한 입 베어 먹으면 달콤하겠어.’

"서방니임-."

박달의 입술이 아지의 입술에 닿자 아지는 박달을 꼭 끌어안았다.

‘금봉이. 나를 용서하오. 내 어쩔 수 없이 이 여인을 안고는 있지만 그대를 향한 내 일편단심은 변함이 없소.’

박달은 아지의 따뜻하고 달콤한 입술을 지그시 누르면서 금봉이를 떠올렸다.

“서방니임-.”

아지는 박달의 따뜻하고 넓은 가슴에 안겨왔다.

‘금봉이, 용서해주오. 과거에 합격하면 한 걸음에 벌말로 달려갈 것이오.’

박달은 아지를 안고 있으면서 중얼거렸다. *계속

저작권자 © 남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