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박달, 낙방하다

“서방님, 빨리 오세요. 너무 기다리게 하지마시고요. 아셨죠?”

“알겠소. 내 얼른 다녀오리다.”

“가보나 마나입니다. 서방님 오시는 대로 문을 닫고 잔치를 벌이려고요. 제가 아는 언니들과 동생들도 와서 축하해 주기로 했어요.”

“아지, 너무 일을 벌이는 거 아니오?”

“걱정하지마세요. 오늘이 서방님과 제 생애에 최고의 날인데 그까짓 하루 쯤 영업하지 않는다고 달라질 거 없어요.”

아지는 생글거리며 하얀 치아를 드러냈다. 빨간 입술이 물오른 살구 같았다.

“그래도. 남들이 알면 비웃음을 살 거 같아서 그래요.”

“알았어요. 최대한 조용히 준비할게요. 어서 다녀오세요. 성균관까지 다녀오시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 먼저처럼 마차를 타고 가시지 그래요?”

“아니오. 오늘은 천천히 걸으면서 한양 구경도 하고 사람들 구경도 하고 싶어서 그래요. 나 혼자 가도 충분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얼른 다녀오세요.”

아지는 박달이 과거에 장원은 아니라도 충분히 합격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아, 제발 합격해야 하는데…….’

운종가 피마길을 박달은 부리나케 걸었다. 점심 때 쯤 도착한 성균관 명륜당 앞뜰에는 이미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희희낙락하였고 대부분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침통한 표정으로 성균관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박달은 갑자기 다리에 천근 무게의 쇳덩이가 매달린 듯 더 걷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마 가슴이 떨려서 더 이상 못가겠다. 그렇다고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지 않을 수도 없고…….’

박달은 한 걸음 한 걸음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걸었다. 합격자 명단이 붙어있는 곳이 바로 코앞인데도 십리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박달의 심장은 더 요동쳤다.

‘천지신명이시여, 조상신이시여! 도와주소서. 박씨 가문에 영광을 주소서.’

박달은 명단이 붙은 곳까지 간신히 다가갔다. 차마 눈을 들어 바라볼 수 없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입격자 명단을 쳐다보았다. 하얀 종이 위에 빽빽하게 적힌 합격자 명단에 박씨 성을 가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합격자의 상당수가 이씨와 김씨, 최씨, 윤씨, 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박달이 아무리 살펴보아도 본인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사람들에게 합격자 명단이 다른 곳에 또 붙어 있느냐고 물었지만 이 곳 밖에 없다고 하였다. 박달은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예조(禮曹)에서 나온 관리를 찾아가 과거 합격자 명단에서 박달이란 이름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합격자 중에 박달이란 이름은 없소이다.”

관리는 냉소하듯 대답하였다.

“아! 이럴 수가. 어찌 이럴 수가…….”

박달은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다리가 후들거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쩐다냐?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금봉이에게 뭐라고 변명을 한단 말이냐? 그리고 나를 믿고 뒷바라지를 해준 아지에게는 또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염병할 놈의 세상! 왜 나에게는 기회를 안 준단 말이야.”

박달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비틀거리면서 운종가로 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박달을 술 취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젊은 사람이 대낮부터 술에 취해 주정을 한다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박달은 여기 저기 기웃거리다가 피마골에 있는 어떤 모줏집을 찾아 들어갔다.

"주모, 여기, 여기 모주 한잔 주시오.”

“어서 오시구랴. 아주 잘생긴 총각님이시네요.”

“어서 한잔 주시오.”

“얘, 애월아! 여기 모주 한 사발하고, 파전 한 접시 내오거라.”

“주모, 안주는 안 시켰소.”

“우리 집에 처음 오시는 멋있는 손님이라서 제가 인심을 쓰는 거니 염려하지

마시구랴.”

인심 좋아 보이는 여인은 박달을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눈웃음을 쳤다. 주점 안에는 선비 차림의 남자 두 명과 패랭이를 쓴 중인차림의 남자 서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선비 차림의 두 남자는 무엇이 불만인지 한참 현 시국에 대한 성토를 하고 있었다.

“이번 과거는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하이.”

“내 생각에도 좀 그래. 난 이번이 네 번째인데 또 낙방했으니 고향에 내려가면 낙방거사란 별명이 붙을 걸세.”

“사람이 살다보면 합격할 때도 있고, 낙방할 때도 있는 거지. 어떻게 보는 과거마다 합격을 하누? 나도 네 번째 일세.”

박달은 양반 차림의 두 사람 이야기를 듣고 두 귀를 쫑긋 세우며 엿듣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과 함께 과거를 본 사람들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두 사람에게서 박달이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박달 이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겨 두 사람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 과거 시제(試題)는 자네도 알다시피 이태백이 지은 파주문월(把酒問月)이란 칠언율시 두 번째 연의 세 번째 시구(詩句)가 아닌가? 난, 알다가도 모르겠어. 왜 하필이면 이백의 시에서 시제를 따왔는지?”

나이가 든 사람이 탁주잔을 비우며 불만에 찬 듯 상을 탁탁 쳤다.

“난, 시경(詩經)만 열심히 외었지. 당시(唐詩)에서 시제가 나올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네. 그런데 그 시제 중 고시월(古時月)이 뜻하는 바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고시월이란, 바로 사람을 뜻하는 걸세.”

“사람?”

“그려. 사람?”

“뭔 사람?”

“허! 이 사람은?”

“이 사람아! 얼른 말해보게. 고시월이 사람을 뜻한다니? 그럼, 당신은 답안지에 고시월이 사람이니 사람 타령만 늘어놓았겠군?”

“그럼. 이번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 시권은 달 타령과 장삼이사 타령만 장황하게 늘어 놓았을 것이네.”

“맞아! 바로 그거야. 우리네 평민들은 달을 그냥 아무생각 없이 달로 보지만, 상감이나 관리들의 생각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전혀 다르지. 그들은 달을 권력자나 무소불위의 절대자로 볼 것이네.”

“파주문월이나 한번 읊어보시게.”

“잘 생각이 날지 모르겠는데 한번 읊어볼까 그럼. 나도 어제 이 시를 보고 다시 암기했는데 한번 들어보시게 그럼.”

“그래 어서 한번 읊어보이. 내가 장단을 맞출 테니.”

“천천히 읊을 테니 들어 보시게.”

나이가 들어 보이는 유생이 목청을 가다듬더니 이백의 시를 읊기 시작했다.

靑天有月來幾時(청천유월내기시) 我今停杯一問之(아금정배일문지)

人攀明月不可得(인반명월불가득) 月行卻與人相隨(월행각여인상수)

皎如飛鏡臨丹闕(교여비경임단궐) 綠煙滅盡淸輝發(녹연멸진청휘발)

但見宵從海上來(단견소종해상래) 寧知曉向雲間沒(영지효향운간몰)

白兎搗藥秋復春(백토도약추부춘) 嫦娥孤棲與誰鄰(항아고서여수린)

今人不見古時月(금인불견고시월) 今月曾經照古人(금월증경조고인)

古人今人若流水(고인금인약류수) 共看明月皆如此(공간명월개여차)

唯願當歌對酒時(유원당가대주시) 月光長照金樽裡(월광장조금준리)

푸른 하늘의 달이여, 언제부터 있었느냐?

나 지금 술잔을 멈추고 한 번 물어 보노라.

사람은 저 밝은 달을 잡을 수 없는데

달이 도리어 사람을 따라 오는구나.

떠다니는 거울같이 밝은 저 달은 선궁(仙宮)에 걸린 듯이

푸른 안개 다 사라지니 맑은 빛을 내는구나.

다만, 밤이면 바다에서 떠오르는 것을 볼 뿐이니

어찌 새벽에 구름 사이로 지는 것을 알리오?

토끼는 일 년 내내 불사약을 찧고 있는데

항아는 외로이 살면서 누구와 이웃하고 있는가?

지금 사람들은 옛 날의 저 달을 보지 못하지만

지금 저 달은 옛 사람들을 비추었으리라.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 모두 흐르는 물과 같아

다 같이 달을 보고 모두 이와 같았으리라.

오직 바라노라, 노래하고 술 마실 동안은

달빛이 오랫동안 술통을 비추어 주기를…….

“술맛 좋다.”

이백의 시를 읊은 남자가 목이 마른지 탁주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이백의 파주월문 중 제2연 제3행의 시구를 이번 과거의 시제가 선택된 것이었는데 낙방한 대부분의 유생들은 시의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과거 주관부서인 예조(禮曹)에서 원하는 답은 피상적인 것이 아닐 것이었다. 박달은 방금 들은 이백의 시를 생각해 보았다. 파주문월은 이태백의 기개가 호방하다는 점이 잘 드러나 있는 시로 자신의 고고함을 달에 빗대어 묘사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달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박달은 서당에서 공부할 때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시문을 대부분 암기하거나 자주 읊곤 했었지만, 이백의 시 파주문월의 한 문장이 과거의 시제로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전에도 유명한 한시나 사서삼경 중 한 부분을 시제로 낸 적이 있었지만, 최근 들어 시국의 난제(難題)를 풀어 갈 수 있는 해법을 묻거나 또는 부국강병책을 묻는 시제가 자주 등장했었다.

“이 사람아, 자네는 고시월이 사람이라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이.”

“다르다?”

“십이 행을 보면 금월증경조고인(今月曾經照古人)이라고 했으이.”

“그랬지.”

“여기서 조고인(照古人)이란 고시월(古時月)과 대조되는 시구가 된다네. 지 즉, 지금 이승에 없는 사람들을 뜻하는데, 즉 달은 우리 이승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옛날 사람들을 알고 있다는 뜻이야.”

“그래서?”

“그러니, 백년도 못사는 인간들은 달의 영원성과 시공을 뛰어넘는 영물(靈物)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말씀이지.”

“이 사람아. 핵심을 말해봐. 과거 출제관이 유생들에게 요구하는 정답이 무엇인지 말이야. 답답하이.”

“이 사람아, 정답을 알면 내가 여기서 이렇게 탁주잔이나 찌그리고 있겠나?”

“하긴, 그렇겠군.”

“그럼, 그 놈의 고시월이 무엇을 뜻한단 말인가?”

“그거야 이번에 장원급제한 놈에게 물어보면 알겠지. 빌어먹을…….”

“형씨들! 나도 이번 과거에 낙방한 사람이오. 나도 그 고시월에 대하여 불만이 많소.”

박달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가 참견하자 두 사람이 박달을 흘낏 쳐다 보더니 오라고 손짓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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