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피마골 동병상련

“아, 그래요? 그럼 우리 합석해서 이번 과거에 관하여 토론이나 해봅시다.”

“그럼, 실례하오. 난 경상도 풍산에서 올라온 박달이라 하오.”

“난 경기도 사람이오. 성은 박가고 본관은 반남(潘南)이요”

“난, 충청도에서 온 김가라 하오.”

“나의 본관은 밀양(密陽)입니다.”

박달이 박가라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본(同本)은 아니나 같은 성씨이니 반갑소이다.”

과거에 낙방한 처지라 세 사람은 금방 마음이 통했다. 박달이 두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자 흔쾌히 손을 내주었다. 박가라는 사람이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일 뿐, 김가는 박달과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박도령 반갑소. 나이도 어리고 키고 크고 진정한 헌헌장부입니다. 여인들이 아주 좋아할 상입니다.”

“내가 봐도 그러이. 가만히 박달 도령 관상을 보니 여난(女難)에서 늘 고민이 많을 듯 하이.”

‘이 자들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못하는 말이 없네. 내가 괜히 참견하였나? 가만히 옆에서 이야기나 듣고 있을 것을…….’

“그리 봐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박달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쓰린 속을 달랬다.

“자, 이렇게 운종가에서 낙방한 사람들끼리 만나 한잔하는 것도 인연이오. 한잔들 합시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박가가 잔을 들어 건배하자고 했다.

“박도령은 이번 과거에 답안을 어떻게 작성하였소?”

김가가 박달 도령에게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달에 대한 나의 소감과 현재 조정에서 시행하고 있는 공납(貢納) 제도의 부당성을 주장하면서 그 대안을 제시하였소이다.”

“어떤 대안을 제시하였소?”

박달은 두 사람에게 자신이 작성한 답안의 내용을 들려주었다. 열변을 토하는 박달의 모습에 두 사람은 마치 여우에 홀린 듯한 모습이었다.

“오! 과연, 과연 멋진 시권(試券)이오.”

“맞소. 과연 기가 막힌 논문이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낙방 처리된 것이오?”

“그걸 알면 내가 형씨들하고 여기서 술을 퍼마시겠소?”

“안타깝구려. 안 그렇소. 박형?”

“암, 암. 그렇고말고. 내가 같은 박가 성을 가졌다고 해서 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정말로 명문이오.”

“아닙니다. 나를 포함하여 두 형씨 그리고 이번에 낙방한 모든 분이 아마도 예조에서 원하는 시권을 쓰지 못하여 낙방하였겠지만,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시제가 현 시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묻는 것 같았습니다.”

박달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시관이나 상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거나 시행하기 어려운 묘안은 채택되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오. 고관(高官)들이 중간에서 농간질한다는데 그들이 자신의 이권이 걸린 정책을 타파하자는 대안을 좋아하겠소?”

“그런데 하필이면 이적선(李謫仙)의 파주문월이란 시에서 시제를 냈을까?”

“그야 상감이나 시관(試官)들 마음이겠지. 아님, 문약한 상감이 평소 좋아하던 시구일 수도 있겠고.”

“내 생각도 박도령 말처럼 당파싸움에 지친 조정 관료나 상감이 이백의 시중에서 한 시구를 따서 유생들에게 현 시국을 타개할 처방을 물은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김가 성을 가진 남자가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마치 자기 생각이 맞을 것이라고 했다.

“언제 또 과거가 있는지 아시는지요?”

박달은 과거에 떨어진 상태로 낙향할 수 없었다. 한양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눌러앉아 혹시 곧 있을지 모를 과거에 대비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여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과거에 합격하여 당당하게 고향에 내려가고 싶었다.

“모르지요. 소문에는 내년에는 상감께서 금상에 앉으신 지 십 년째 되는 해이고, 오랜 태평성대에 대비께서 최근 오랜 환우에서 점차 쾌차하고 있다고 하니 상감께서 내년 봄에 갑자기 별시(別試)를 시행할지 모르는 일이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틀림없이 내년 봄에 별시가 있을 것이오.”

박가 성을 가진 남자가 제법 아는 체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그 별시를 대비하여 준비해야겠다. 이대로 고향을 찾을 수 없어. 잘만하면 별시를 보고 내려가도 되겠지. 금봉이도 나의 이런 입장을 이해해 줄 거야. 그냥 가는 것보다야 좀 늦더라도 입격(入格)해서 찾아가는 떳떳하고 말이야.’

박달이 침통하게 바닥을 내려다보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박도령도 내년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별시를 한 번 더 보시려면 지금부터라도 계획을 잘 짜서 공부에 임해야 할 거요. 이번처럼 또 잘못 했다가는 낙방거사 소릴 듣게 될 거요. 고향 사람들도 두세 번은 봐주지만 세 번 이상 입격하지 못하면 욕을 할 거요.”

“고맙습니다. 형씨 말씀대로 한양에서 더 머물면서 별시를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잘 생각하였소, 고향에 내려가 보았자. 별수 없을 거요.”

‘내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을 금봉이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입격하지 못했지만 한번 다녀올까? 아니야, 안 돼. 금봉이 아버지나 어머니는 내가 이 꼴로 찾아간다면 실망하고 말 거야. 그렇게 되면 금봉이의 처지도 우습게 될 것이고. 내년 봄에 있을지 모르는 별시를 한 번 더 보고 나서 찾아보아도 되겠지.’

박달은 입술을 깨물며 내년 봄을 기약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자, 이제 물 건너간 건데 더 이야기해서 무얼 하겠소. 우리 진탕하니 마시면서 다른 이야기나 합시다.”

“좋습니다.”

박달이 맞장구를 치며 술잔을 들었다. 술이 서너 주전자 비워지자 세 사람은 낙방한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조정의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시국을 제대로 풀어나가지 못한다며 격렬하게 비판을 하였다. 흥분한 김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술상을 두드리기도 하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 이제 앞으로 대책을 논해봅시다.”

“논해보는 것도 좋은데 술에 취하니 계집 생각이 나는구려.”

경기도 박가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두 사람의 안면을 살폈다.

“이런 곳에도 계집이 있으려고?“

“부르면 오겠지요.”

“그냥 술이나 한잔 마시고 가십시다.”

박달은 자신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아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낙방 소식을 가지고 주막을 찾기 싫었다.

“아니야, 아무리 싸구려 모주집이라도 계집은 있게 마련이오.”

“주모, 이리와 보시오.”

박가 성을 가진 남자가 주모를 부르자 주모가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달려왔다.

“부르셨수?”

“여기 계집 좀 불러주쇼. 이거 남정네들끼리 술을 마시니 술맛이 나질 않아.”

“우리 집은 색주가가 아니라서 술 시중들 아이는 없어요.”

“아까 안주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처자를 보았는데 그 아이는 누구요?”

“그 애는 우리 집에서 내 일을 도와주는 처녀인데 작부(酌婦)는 아니우.”

“작부든 아니든 이곳에 있으면 다 작부 아니오?”

“그럼, 그럼. 작부가 뭐 따로 있다. 술 부을 작(酌), 아내 부(婦), 말 그대로 술 따르는 여인이 작부 아니오?”

“박형 말이 맞습니다.”

“그럼, 그 애를 나오라고 해 볼 테니, 생각 좀 해주슈.”

“걱정하지 마오. 행하는 아니지만 알아서 섭섭지 않게 해줄 테니.”

주모가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 한 여인이 나왔다. 나이는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지만 성숙한 느낌이 드는 여인인데 육덕이 튼실하고 살결이 곱고 얼굴이 반반해 사내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해 보였다. 초록색 저고리와 붉은 치마를 입고 댕기 머리를 한 처녀의 풋풋함이 얼큰하게 취한 세 남자의 음심을 건드렸다.

“애월이라고 합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애월이? 거참 이름도 예쁘네.”

“기방에서 유통되는 이름 같네그려.”

“아이, 놀리시면 싫어요.”

“그 처자, 사내들 간장을 다 녹이겠네.”

애월이는 남자들 사이에 앉더니 술을 한잔 씩 가득 따르고 어서 마시라며 눈을 흘겼다.

“좋아. 오늘 기분도 그렇지 않은데 애월이랑 한번 놀아보자고.”

“좋사옵니다.”

애월이 비록 댕기 머리를 하였으나 세상 풍파를 모두 겪은 여인처럼 남자들을 요리하는 데 능숙해 보였다.

“애월아, 오라비들이 오늘 과거에 낙방하여 마음도 울적한데 노래나 한 수 뽑아 보거라.”

“그래, 어서 한번 해봐라. 자고로 술자리에는 계집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 네가 제격이구나. 거기에 노래 한 수 곁들이면 금상첨화지.”

“좋아요. 오라버니들. 소녀가 노래가 아닌 시조를 한 수 뽑을 테니 장단을 맞춰주세요.”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알아서 맞출 테니.”

애월이 목청을 가다듬더니 노래를 시작하였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애월이 애절한 목소리로 끊어질 듯하다가 이어지며 황진이의 시조 읊자 사내들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박가 성을 가지 경기도 사내는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췄다.

“너 이 모주집에 있기에는 너무 아깝다. 기생청(妓生廳)에 등록하여 공부 좀 해서 기루로 진출하면 황진이 뺨치겠는걸?”

“오오, 맞다 맞아. 너 정말 잘한다. 한 곡조 더 뽑아보아라. 이 울적한 심사를 네 노래로 달래야겠구나.”

“애월이, 정말 멋집니다. 한 곡 더 청해도 되겠소?” 박달 도령이 애월이 눈과 마주치자 애월이 눈을 찡끗하더니 다시 목청을 가다듬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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