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학수고대

동짓달 기나긴 밤 한허리를 둘러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고운 임 오신 날 밤이어 든 굽이굽이 펴리라

“조오타. 정말로 죽여주는구나.”

“정말로 황진이가 환생한 듯하구나. 너, 이 모주집에서 썩긴 아깝다.”

“그럼, 오라버니들 따라가면 기생이라도 만들어 주실래요?”

“조오치. 애월아! 너 나 따라서 가자. 내가 기생청에 등록시켜 줄 테니.”

박달과 두 남자는 애월이와 어울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을 퍼마셨다. 박달도 애월이의 노래를 들으면서 울분을 삭이려고 하였다.

“ 서방님께서 어찌된 것일까? 벌써 저녁때가 훨씬 넘었는데. 혹시, 혹시 과거에 낙방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벌써 오셨을 텐데?”

아지는 축하잔치 준비를 모두 끝내고 박달이 오기만 기다렸다. 아지의 친한 친구들도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지야, 어찌된 거니? 네 서방님은 왜 아직도 안 나타나는 거야?”

“글쎄, 오실 때가 훨씬 넘었는데…….”

“얘, 혹시 낙방한 거 아니니?”

“아냐, 우리 박달 서방님은 절대 낙방하실 분이 아니야.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셨다고? 분명히 합격하셨어. 아마 나를 놀리려고 일부러 늦게 오고 계시는 걸 거야.”

“그렇다면 다행인데, 어째 기분이 영 찝찝하다. 얘, 아지야, 우리끼리 먼저 한잔하자. 마시고 있으면 곧 오시겠지.”

“그럼, 너희들끼리 먼저 마시고 있어. 난, 좀 더 있다 마실게.”

“계집애도! 열녀 났다. 열녀 났어. 어련히 알아서 올까 봐 그러니?”

아지의 두 여자 친구들은 입을 삐쭉거리며 아지에게 불평을 토했다. 아지의 친구들은 화류계에서 뼈가 자란 여인들이었다. 박달이 합격 소식을 가지고 주막으로 오면 멋지게 놀아주려고 하였지만, 주인공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자 먼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서방님이 어찌 된 걸까?’

아지는 주막을 나와서 개천을 따라 걸었다. 개천에는 얼음을 지치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만약, 만약 서방님이 불합격하였다면 어찌하나?’

아지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개천 길을 걸었다. 바람이 불었지만 아지는 추운 줄 몰랐다. 아지는 박달이 과거에 합격하였다면 그에게 모든 것을 걸고 출세시켜 보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를 아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당연히 열심히 공부한 박달이 장원은 아니더라도 과거에 꼭 합격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냐, 아냐. 분명히 합격하였을 거야. 그런데 주막으로 돌아올 시간이 훨씬 넘었는데 아직 안 오시는 이유가 뭘까? 혹시? 혹시 금봉이에게 달려간 건 아닐까?’

아지는 개천 길을 걷다가 부리나케 주막으로 달려왔다. 박달이 쓰는 방을 들어가 보았다. 괴나리봇짐과 옷가지 그리고 지필묵과 서책이 그대로 있었고, 미투리도 두 켤레나 고스란히 있었다.

‘금봉이 처자에게 달려간 건 아닌데. 설령 간다고 하여도 나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는 하고 가겠지. 서방님이 그냥 갈 예의 없는 분이 아니야. 그렇다면 오시다가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으로 가신 게 아닐까?’

아지는 이 생각 저 생각 해보았지만, 딱히 박달이 늦을 이유가 없었다.

‘가만, 그렇다면 자축하기 위하여 혼자 오시다가 피마골 '극락'에 들려 인사만 하고 오신다는 게 그만 그 집 언니에게 붙잡혀 술을 마시고 계시는 건 아닐까?’

아지는 집에 가만히 있다가는 박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자 직접 운종가로 나가 보기로 하였다.

“너희들 나 운종가 좀 다녀올 테니 마시고 있어.”

“아니 우리만 남겨 놓고 무엇하러 운종가를 가게?”

“박달 서방님이 운종가에 있는 ‘극락’에 계실 거 같아서 그래.”

“극락 언니에게 한번 잡히면 끝인데. 아지야, 너 죽 쒀서 극락 언니 준거 아니니?”

“그럴 수도 있어. 그 언니 남자편력이 얼마나 심한데. 한 달이면 두세 남자 갈아 치우잖아. 빨리 가봐. 너 우물쭈물하다가 서방 빼앗기게 생겼다.”

‘서방님이 지조 없이 아무 여자에게 절개를 줄 분이 아니야. 아니고말고.’

아지는 이웃집에 사는 마부를 불러 마차를 타고 운종가로 향했다.

‘박씨 말이 틀림없구나. 금봉이가 꽃물이 멈춘 게 틀림없어. 정말 걱정되네.’

최대호는 장독대 뒤에 있는 놋요강 두 개 중에 딸의 것 뚜껑을 열어보았다. 개짐이 없고 맑은 물만 가득 차 있었다. 꽃물이 나오는 시기에 사용하던 개짐을 요강에 담가두어야 하는데 딸의 개짐이 없었다.

‘분명, 마누라하고 비슷한 날짜인데. 마누라 개짐이 요강에 가득한데 금봉이의 개짐이 없다는 것은 그 애가 꽃물이 멈추었다는 증거가 분명해. 그렇다면 틀림없이 딸애가 아기를 가졌다는 것인데…….’

최대호는 궐련을 피우면서 곰곰이 딸의 앞날을 생각해보았다.

‘과거가 끝났으니 지금쯤 박도령이 합격 패를 가지고 고향으로 향하고 있을 테지. 그러면 이곳 벌말까지 넉넉잡고 보름이면 충분할 거야. 보름 후면 금봉이에게 귀중한 선물이 도착하겠군. 넉넉잡고 보름이야. 보름.’

최대호는 딸의 개짐이 요강에 담겨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과수댁을 찾았다.

‘이상하다. 몸이 점점 무겁고 밥맛도 없는 게 왜 그러지.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 내 몸이 이상해. 참으로 이상한 일이야.’

금봉이는 점심때쯤 서낭당에 들러 서낭신에게 하루빨리 박달이 벌말에 도착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이등령을 향해 가고 있었다. 다행히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먼 산을 제외하고 대부분 녹아 있어서 산길을 걷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얘들아, 저기 올라오는 게 금봉이 아니니?”

“맞아. 금봉이다.”

땔 나무를 한 짐씩 해서 지게에 지고 벌말을 향해 내려오던 갑돌이와 수돌이 그리고 동네 청년들이 금봉이를 보더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갑돌이와 수돌이 금봉이를 두고 서로 날카롭게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였지만, 평소에는 둘도 없는 다정한 불알 친구였다. 그런 둘 사이가 나이를 먹자 점차 서먹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갑돌아. 너, 지금도 금봉이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거니?

“…….”

“아닌 거야?”

수돌이 갑돌이의 수심에 찬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 말이 맞아. 나는 금봉이를 깊이 생각하고 있어. 너도 금봉이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어. 너나 나나 오래전부터 금봉이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 그러나 선택은 금봉이 마음에 달려 있을 테지.”

“요즘 동네에 이상한 말이 돌고 있어.”

수돌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한 마디 던지고 갑돌이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

“그게 무슨 말이냐고?”

“갑돌아, 금봉이가, 금봉이가 홀몸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

“뭐? 금봉이가 홀몸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시방?”

“나도 개똥 엄마한테 들은 소린데. 금봉이가 홀몸이 아니라고 하더구나.”

“그 여편네가 생사람 잡네. 그 개똥 엄마가 전에도 자주 미친 소릴 했었잖아. 수돌아, 넌 그 여편네 말 믿니?“

갑돌이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변하였다.

“아니, 안 믿지. 네 말대로 그 여편네 헛소릴 했었어.”

금봉이가 갑돌이 일행과 거의 가까워지면서 갑돌이 일행은 지게를 내려놓고 땀을 닦았다.

“금봉아, 어딜 그렇게 바삐 가는 거야?”

“갑돌이구나.”

“날씨도 차가운데?”

“이등령에 갔다 오려고.”

“이등령까지 한참 가야 하는데. 여자 혼자 너무 위험해. 그리고 꼭대기엔 아직 눈이 많이 쌓여있어. 가지마. 너무 위험해.”

갑돌이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금봉이에게 말하였다.

“금봉아, 갑돌이 말이 맞아. 우리도 그 근처에서 땔나무를 해서 오는 참인데 꼭대기에는 눈이 많이. 가지마! 너 혼자 가면 위험해.”

“괜찮아. 며칠 전에도 혼자 갔다 왔었어.”

“거기에는 무엇하러 가는 거니? 금봉아,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거기 너 혼자 가는 건 너무 위험해.”

“수돌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내 일이니 너희들은 상관하지 마.”

갑돌이는 금봉이의 배를 살펴보았으나 금봉이가 임신하였다는 어떤 증표도 알아낼 수 없었다.

“금봉아, 아무 일 없는 거지?”

갑돌이가 금봉이를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금봉이에게 묻자 금봉이는 별 이상한 소리 다 듣겠다는 표정이었다.

“갑돌아, 그게 무슨 소리야?”

“응? 아, 아냐. 아무것도.”

“남의 일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그래. 미안해. 그냥, 어르신 안녕하시냐고 물은 거야.“

“우리 집은 아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금봉이는 불편한 심기를 간신히 참고 휘적휘적 이등령을 향해 걸었다. 금봉이가 저만치 아득하게 가물가물하게 보이자 갑돌이 지게를 숲속에 내려놓고 나왔다. 아무래도 금봉이를 혼자 이등령까지 혼자 가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무슨 결정을 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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