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피마골 결투

“수돌아, 너희들은 먼저 가라.”

“너는?”

“응, 아무래도 금봉이가 위험해.”

“그래서 금봉이 뒤를 따라가려고? 그럼, 나도 같이 가자.”

“안 돼. 너는 애들하고 어서 내려가. 너희들은 빨리 내려가 집에 나뭇짐을 부려야지. 어른들이 걱정하셔.”

“야, 나도 가야 해.”

수돌이도 갑돌이를 따라 이등령을 가겠다고 하자 갑돌이와 수돌이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생겼다.

“수돌아, 애들 데리고 마을로 돌아가라. 나 혼자 금봉이 뒤따라 갈 테니.”

“네 걱정이 아니라 금봉이 걱정돼서 그래. 그러니 내 앞길 막지 마.”

“야, 너 자꾸 그럴래?”

“왜? 너만 가고 나는 금봉이 뒤따라가지 말라는 법 있어?”

결국, 갑돌이와 한바탕 말다툼이 있고 나서 수돌이와 동네 총각들은 나뭇짐을 지고 벌말로 돌아갔다. 갑돌이는 달리다시피 하며 이등령을 올라갔다. 한참 달리다 보니 금봉이가 저만치 가고 있었다. 달려가서 금봉이 손을 잡고 가고 싶었다. 갑돌이는 일정 간격을 유지한 채 금봉이 뒤를 따라갔다.

“서방님. 과거도 끝났으니 어서 오셔요. 분명히 장원급제하셨겠지요? 요즘 전 몸이 이상해요. 몸이 예전처럼 가볍지 못해요. 하루빨리 서방님을 뵙고 싶어요. 서방님의 머리에 어사화를 꽂은 장한 모습을 보고 싶어요. 말을 타고 옆에 포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씩씩하게 벌말로 오시는 늠름한 모습을 보고 싶어요.”

금봉이 혼자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이등령을 향해 걸었다.

“금봉이가 그 도령 때문에 이등령에 가는 게 분명해. 그 박달이란 사내가 과거에 합격하고 고향을 가기 위해서 저 이등령을 넘을 것을 알고 그 도령을 맞이하러 가거나 한양이 있는 북쪽 하늘을 보러 가는 걸 거야. 수돌이 말이 거짓인거 같군. 아까 보니까 배가 부르거나 이상한 조짐은 안 보이던데. 마을 참새들은 왜 금봉이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들이람.”

갑돌이는 보일 듯 말 듯 금봉이를 좇아 이등령을 향해 걸었다.

“금봉 아부지, 먼저 말씀하신 거 있잖수?”

최대호가 과수댁 얼굴을 쳐다보았다. 과수댁은 얼굴을 붉히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거유. 그거.”

“자세히 말 해봐요. 주저하지 말고.”

“아이, 다 알면서.”

“......”

“그래, 친척 중에 아직도 아기를 못 가진 여인이 있다면서요?”

“아아, 그거?”

최대호가 껄껄대며 호탕하게 웃었다.

“왜 웃어유?”

“그일, 잘 해결되었어요. 그 아이가 비방을 얻어서 그대로 실행하였더니 금방 아기가 들어섰대요.”

최대호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유? 잘 되었구먼유.”

최대호는 딸이 박달의 씨앗을 잉태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으나 자칫 이상한 소문으로 번질까 봐 꾹 참았다.

‘보름만 있어봐라. 이 벌말과 근동에 내 사위가 과거에 당당하게 합격한 사실이 쫙 퍼질 테니.’

최대호는 낮술에 취하고, 곧 있을 경사스러운 일에 스스로 도취하여 기분이 너무 좋았다.

“아유, 뭐가 그리 좋은 거유. 나도 좀 알자구유.”

“과수댁은 알 거 없소. 얼마 있으면 우리 딸에게 아주 좋은 일이 생길 거요.”

‘좋은 일? 좋은 일이라? 그게 뭐지?’

동네 모든 소문의 진원지인 과수댁은 골똘하게 생각해보았다. 그녀는 또 무슨 희한한 이야기로 동네의 새로운 파문을 일으킬 것인지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천지신명님! 서방님께서 하루빨리 소녀에게 달려오시도록 도와주세요. 오시다가 행여 나쁜 기운에 혹하거나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서방님이 마음이 너무 착해 다른 데 마음을 두실 수 있으니 혹하지 않도록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세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등령 정상에 서자 금봉이는 북녘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폈다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기도하였다. 정상에 서서 북녘 하늘을 바라보여 기도하는 금봉이를 바라보는 갑돌이의 마음은 착잡했다.

‘박달 도령이란 사내는 참으로 복도 많구나. 어떻게 저렇게 착한 소녀의 마음을 단시일 내에 훔치다니. 나는 이십 년을 같은 이웃에 살면서 한 번도 금봉이의 마음을 훔쳐본 적이 없는데…….’

갑돌이는 가슴을 치면서 금봉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언니, 혹시 박달 서방님 여기 안 오셨어요?”

“아니. 안 왔는데.”

“정말?”

“내가 시방 너한테 거짓말하랴?”

“이상하다. 오늘 과거 합격자 발표하는 날이라서. 아침에 혼자 성균관에 다녀오신다고 나가셨는데.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

“그래? 거참 이상하다. 그 도령이 꼭 합격할 거라고 했었잖니?”

“꼭 합격하셨을 거예요.”

“얘, 너 죽 쒀서 다른 개한테 준 거 아니니?”

“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도령이 한양에 또 다른 여인네가 있는 거 아냐?”

“아이참, 언니도! 한양에 일가친척 한 명 없는 분이세요. 그런 분이 어딜 가시겠어요?”

“너, 그거 모르는 소리다. 남자들이 얼마나 엉큼한지 몰라서 그래. 아지야, 남자들 절대로 믿지 말거라. 남자들 심보가 여자들 보다 더 못되었다는 걸 알아야 해.”

“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우리 박달 서방님은 절대 그런 분 아니에요.”

“너희 주막 앞에 정절문이라도 세워야겠구나.”

“언니, 나 갈게요. 그분이 한양의 지리를 잘 모르는데 찾아봐야겠어요.”

“빨리 찾아봐라. 엉뚱한데 안 가시게.”

아지는 얼른 극락을 나와서 피마골 주점들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형씨, 난, 난 이번 과거에 장원급제는 아니더라도 꼭 입격되는 줄 알았다오. 아무리 내가 쓴 시권(試券)이라고 하지만 정말로 명문이라고 생각한다오.”

“아까 자네가 이야기한 고시월에 대한 자네의 논술은 잘못되었어.”

“뭐요? 잘못되었다니? 뭐가 잘못되었다는 거요?”

박달 도령이 긴장하며 물었다.

“전반부에 형씨 나름대로 달에 대한 소신이 내용이 너무 장황하였고, 결론 부분에서 설득력이 미약해. 후반 내용이 현재 기득권 세력인 상감이나 시관들에게 도전으로 비쳐질 수가 있어. 그들이 자신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시권을 좋아할 리가 있겠어?”

“뭐라고요? 그럼, 당신이 말한 당신 시권은 잘 쓴 건 줄 알아요? 내가 보기에는 전체적으로 산만하고 핵심이 모호하더이다.”

“경상도 문둥이 자식이 버르장머리 없이 함부로 주둥이를 놀려대?”

“뭐라고? 문둥이 자식?”

박달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문둥이 자식이라고 했다. 어쩔래?”

박달이 박가 성을 가진 경기도 남자의 얼굴에 마시다 남은 술을 뿌렸다.

“이 문둥이 자식이 미쳤나?”

이번에는 박가가 술상을 들어 박달을 향해 집어 던지자 술과 먹다 남은 찌개와 반찬 등이 박달의 얼굴부터 바지저고리까지 시뻘겋게 물들였다.

“이놈의 자식! 한번 해볼 테여?”

박달이 벌떡 일어나 키가 작은 경기도 박가의 멱살을 잡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삽시간에 모주집은 싸움터로 변했다.

“이봐유! 그만 해유. 여태껏 사이좋게 술 잘 마시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다른 손님들 생각도 해주셔야지요?”

모주집 주모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문둥이 새끼야! 네놈이 뭘 안다고 지랄이야.”

“네놈이 같은 박가고 나보다 연배라서 그냥 지나가려고 했건만 내 자존심을 건드려? 너나 나나 과거에 낙방하였으면 곱게 있을 것이지 뭐가 잘났다고 사람을 우습게 보는 거야?”

박달이 박가의 등에 올라타 주먹으로 박가의 얼굴과 등을 강타했다.

“경상도 문둥이가 사람 잡네. 여보시오! 포도청에 신고해 주세요.”

키가 왜소한 김가가 두 사람을 말리려고 하였지만 한번 자존심이 상한 박달이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계속 사내를 두들겨 팼다. 그러나 곧 누구의 신고를 받았는지 포도청에서 나온 군졸들과 사령(使令)이 모주집으로 들이 닥쳤다.

“여봐라! 저 세 놈 모두를 포도청으로 압송하라.”

세 사내는 졸지에 오랏줄에 묶여 포도청으로 압송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운종가는 조선에서 가장 화려하고 번화한 지역이고 가까운 곳에 궁궐이 있어서 작은 사건에서도 포도청에서 군졸들이 출동하였다.

“나는 아무런 죄가 없어요. 왜 나를 포박하는 거요?”

“저놈이 먼저 나에게 경상도 문둥이라고 놀렸습니다. 그러니 저놈만 끌고 가면 되는데 왜 나까지 끌고 가는 거요?”

퍽-.

“이놈들, 말이 많다.”

사령이 곤봉으로 세 사람의 등을 한 대씩 갈기자 기가 죽은 세 낙방생은 꼼짝하지 못하고 모주집에서 끌려 나왔다.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이냐. 이 모습을 어머님이 보신다면 얼마나 가슴이 미어질까?'

박달은 속으로 한탄하며 군졸들에게 이끌려 가려 할 때 한 여인의 달려들며 소리 질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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