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한양의 밤거리를 배회하다.

“안돼요. 안돼요! 우리 서방님을 끌고 가시면 안 돼요. 이 분은 오늘 과거에 합격하신 분이세요. 군관님, 잠깐만요.”

‘아지가 여길 어떻게 알고?’

“아, 아지?”

“서방님, 이게 어찌된 일이세요?”

“군관님, 우리 서방님은 그제 과거를 보셨어요. 오늘 합격자 발표를 보시고 기분이 좋으셔서 한잔 마시다 말다툼이 일어났어요. 우리 서방님은 착한 분이세요. 잠시 저 좀 보세요.”

아지가 사령을 끌고 모주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있다 나왔다.

“험-, 여봐라! 저분만 풀어드려라.”

‘아지가 어떻게 하였기에 나만 풀어주지? 참으로 별일일세.’

박달은 아지의 수단에 혀를 내두르며 아지에게 고마워하였다. 모주집에서 나온 박달과 아지는 화려한 운종가를 걸었다. 상전마다 등불이 내걸리고 호객하는 소리가 거리마다 넘쳐났다.

“서방님, 어찌 되신 건데 모주집에서 욕을 보셨어요?”

“…….”

박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 걷기만 했다.

“서방님, 궁금해 죽겠어요? 과거는 합격하신 거죠? 그것도 우수한 성적으로요? 어서 가요. 서방님 오시면 시작하려고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어요. 언니들도 서방님 합격을 축하해 드리려고 와 있고요.”

“…….”

“서방님?”

“아지, 미, 미안하오.”

박달은 아지를 한번 힐끗 보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미안하다니요? 뭐가요? 괜찮아요. 기분 좋으셔서 과거 보신 분들과 함께 술 마시다 싸울 수도 있는 거죠. 괘념치 마시고 얼른 가세요.“

“정말로, 정말로 미안하오. 미안하오. 아지.”

아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따라오는 박달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감지하고 기던 길을 멈추고 박달을 빤히 쳐다보았다.

“서방님, 왜 자꾸 미안하다고 하세요?”

“아지, 정말로 미안하오. 낙방했소. 과거에서 낙방하였소.”

박달이 통곡하였다. 박달의 통곡에 아지의 얼굴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서방님, 지금 저에게 농담하시는 거죠?”

“정말이오. 이번 과거에 낙방하였소. 그래서 혼자 술 한 잔 마시며 울분을 삭이려고 하다가 옆에 있던 사람들과 언쟁이 붙어서 그런 것이오.”

박달은 흐느꼈다.

“서방님, 농담이 아니라고요?”

“그렇소. 미안하오. 그대의 뒷바라지에 보답해야 하는데…….”

‘아아!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건 말도 안 돼.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낙방이라니? 이건 아냐, 뭔가 잘못되었을 거야.’

아지는 멍청하게 서서 움직일 줄 몰랐다.

“아지, 정말로 미안하오. 나를 용서하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아지는 운종가 길가에 앉아 울기 시작하였다.

“아지, 울지 말아요. 어서 일어나요. 미안하구려. 정말로 미안하구려. 그대의 정성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지 못해 정말 할 말이 없소.”

아지는 일어날 줄 모르고 앉아서 서럽게 울면서 자신의 박덕함을 탓하고 있었다. 그녀는 박달을 통해 과거에 맺힌 한을 풀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가요! 내 앞에서 사라져요. 꼴도 보기 싫으니, 내 앞에서 사라지라고요.”

“아지?”

“꼴도 보기 싫으니 어서 사라져요. 당신에게 바친 지난 정성이 이렇게 물거품이 되다니, 이 억울하고 원통한 심정을 당신은 알기나 해요?”

“아지, 미, 미안하오.”

“내 앞에서 없어지라고요. 어서요.”

아지는 악을 쓰며 통곡하였고 박달은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맸다. 수많은 행인이 아지와 박달을 번갈아 보면서 입을 삐쭉 내밀기도 하고, 자기네끼리 귓속말로 소곤거리며 재미있어했다.

“아지, 미안하오. 하늘이 나를 돕지 않으니 어찌하오. 나 최선을 다하여 공부하였고, 나름대로 소신 있게 과거를 보았다고 자부하였는데 이리된 것을 어쩌란 말이오? 용서하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잖소? 미안하오. 아지, 어서 일어나구려.”

“비켜요.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난, 당신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는데, 이제 수포가 되었으니 당신을 더는 볼 일 없어요. 내 앞에서 사라져요.”

아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박달은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비실거리며 목멱산 쪽으로 걸어갔다.

‘바보, 멍청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도 낙방하다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을까? 사람 하나는 제대로 골랐는데 왜 낙방하였을까? 낙방할 이유가 없는데. 바보, 바보.’

아지는 혼자 중얼거리며 운종가를 배회하였다.

“서방님, 언제 오시는 거예요? 열흘 후면 뵐 수 있는 거죠? 열흘도 너무 길어요. 닷새나 엿새 안으로 오셔야 해요. 저와 약속하셨잖아요. 합격하면 제일 먼저 저에게 달려오시겠다고요? 보고 싶어요.”

금봉이 박달과 헤어질 때 박달이 한 약속을 수백 수천 번도 더 되뇌면서 하염없이 북녘 하늘만 바라보았다. 바람이 한번 불자 눈보라가 이등령으로 불어왔다. 마치 금봉이의 기도에 답하려는 박달의 소식이라도 전해주려고 하는지 하얀 눈보라가 뽀얗게 하늘을 덮었다. 그 바람에 금봉이 붉은 치맛자락이 펄럭였다. 눈보라 속에 휩싸인 금봉이를 숲속에서 바라보던 갑돌이의 가슴은 찢어질 것 같았다.

‘저러다 몸살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이제 그만 내려가야 하는데 조금 더 있으면 날이 어두워질 테고…….’

갑돌이는 빨리 금봉이가 내려오기만을 바랐다.

“서방님, 오늘은 이만 갈게요. 다시 올게요. 서방님께서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벌말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 같아요. 이제 돌아가야겠어요. 서방님, 안녕히 계세요. 천천히 오세요. 저 때문에 빨리 오시느라 끼니 거르지 마시고요.”

금봉이 북녘 하늘을 향해 합장한 채 잠시 마치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금봉이가 이제 집으로 가려는 모양이구나. 그런데 가만히 보니 금봉이 행동이 무척 부자연스러워 보이는걸? 정말로 금봉이가 아이를 가진 걸까? 아니야. 내가 잘못 보았을 거야. 금봉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니야. 내가 오랜 세월 지켜보았지만 절대로 그럴 애가 아니야. 난 믿어. 그러나 만약 박도령이 정말로 과거에 떡하니 합격해 벌말에 나타나면 난 뭔가? 닭 쫓던 강아지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는 건가? 답답해 미치겠다.’

갑돌이 숲속에서 금봉이를 바라보며 가슴을 치고 있을 때 금봉이 벌말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이등령에는 눈이 많이 쌓여있어 미끄러지기 쉽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 날 수 있었다.

아악-.

갑돌이 비명이 들리는 곳을 보니 금봉이가 그만 눈길에 미끄러져 길가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저런! 안 돼. 안 돼! 금봉아!”

갑돌이가 얼른 숲속에서 뛰어나오며 금봉이에게 달려갔다.

“금봉아! 괜찮니?”

“가, 갑돌이 네가 여긴 어떻게? 너, 아까 집에 안 갔어?”

“바보야, 혼자서 여길 왜 왔어. 큰일 날 뻔했잖아. 다리를 삔 것 같은데?”

갑돌이 금봉이 발목을 만지자 비명을 질렀다.

“큰일이다. 발목을 삐었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니?”

“내 등에 업혀. 빨리 집에 가야 해. 조금 있으면 날이 어두워질 거야. 어서 업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마을로 내려가야 해.”

“그냥 걸어볼게.”

“안 돼. 벌말까지 삔 발로 어떻게 간다고 그래? 어서 업혀.”

갑돌이 넓적한 등판을 들이밀자 금봉이 할 수 없이 갑돌이 등에 업혔다.

“그런데 갑돌아.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어떻게 내가 넘어지자마자 네가 달려왔느냐고?”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네가 이등령으로 향하는 걸 보고 아무래도 너 혼자 가는 걸 그냥 두고 갈 수 없겠더라고, 그래서 네 뒤를 따라왔었어.”

“그랬구나. 고마워. 갑돌아, 아직도 나를 좋아하니?”

“…….”

“나 안 좋아해?”

“하늘만큼 땅만큼 너를 좋아해.”

“정말이니?”

“그럼, 정말이지. 너를 좋아하니까, 네가 걱정되어서 여기까지 따라왔지. 안 그러면 뭐 하러 왔겠니?”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난, 여기서 얼어 죽을 뻔했구나.”

“그런데, 금봉아.”

“응?”

“여긴 왜 온 거야? 이 추운 날씨에 혼자서 여기 왜 온 거냐고?”

“…….”

“너, 그 도령하고 장래를 약속했니?”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

“금봉아, 우리 어릴 때 여기 자주 왔었지?”

“그래. 칡 캐러 오고. 진달래 꽃잎 따러오고. 송편 만들 때 쓰는 솔잎 따러 오고. 자주 왔었지.

이젠 옛 추억이 되었구나.”

갑돌이는 금봉이를 업고 내려오면서 이대로 멀리 떠나서 금봉이와 함께 살았으면 하는 상상을 하였다. *계속

저작권자 © 남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