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박달의 수난

“나 무겁지?”

“아냐, 괜찮아. 벌말까지 얼마든지 갈 수 있어.”

갑돌이 금봉이의 따뜻한 엉덩이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금봉이와 잘 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었다.

“금봉아, 난, 난 네가 좋아. 난 예전부터 너에게 장가드는 꿈을 꾸고 살아왔거든. 그런데, 그런데 그 꿈이 산산조각 난 것 같아. 억장이 미어져 못 견디겠어. 너, 나랑 부부가 되면 안 되겠니?”

“미안해.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왔어. 난, 난 박달님에게 마음을 주어 버렸어. 그래서 이제는 나도 내 마음을 나 혼자 통제하지 못하겠어.”

갑돌이 흐느끼고 있었다.

“바보같이 사내대장부가 울긴…….”

갑돌이 금봉이를 업고 벌말로 향하면서 울고 있었다. 갑돌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걷자 금봉이 가슴도 미어졌다.

“미안해. 네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이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내 마음을 너보다 먼저 박달님이 가져가 버렸어.”

금봉이의 말에 갑돌이는 더욱 큰소리로 서럽게 울었다.

“울지 마. 남자가 함부로 눈물을 보이는 거 아니랬어.”

갑돌이는 금봉이를 업고 오면서 계속 흐느꼈다. 이것이 금봉이와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니 갑돌이의 가슴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박달은 운종가에서 아지와 헤어진 뒤 이리저리 한양의 밤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매몰차게 자기 앞에서 사라지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아지에게 충격을 받은 박달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목이라도 매고 싶었다. 아직 술기운이 남아 있어 걸음도 휘청거렸다.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함박눈으로 변했다. 눈이 내리자 운종가의 상점들은 문을 닫고 거리에 행인들의 모습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추었다. 박달은 갈 곳이 없었다.

‘이 넓고 삭막한 한양에 내 한 몸 누일 곳이 없구나. 나쁜 년! 내가 입격(入格)하지 못했다고 손바닥 뒤집듯 매정하게 굴다니.’

박달은 아직도 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이 한 번의 실수는 있을 수 있는 것인데 과거에 낙방하였다고 그렇게 매몰차게 정을 끊는 아지의 태도에 부아가 났다. 하지만 자신이 못나 그리된 것을 누굴 탓할까 싶어 박달은 박복한 자신의 운명을 탓했다. 눈이 계속해서 내리자 한양은 곧 백설의 세상으로 변하고 말았다. 여기가 거기 같고 거기가 여기 같아 길치인 박달은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아지의 주막이 있는 마포로 방향을 잡았지만 실제로는 숭례문 근처 칠패시장(七牌市場) 쪽으로 가고 있었다.

술 취한 상태에서 길을 잃은 박달은 가도 가도 골목길만 나오는 한양의 칠패시장 주변을 뱅뱅 돌고 있었다. 눈길을 서너 시간 돌다 보니 미투리는 다 젖어 발이 얼어오기 시작하였다. 이대로 계속 걷다가 동상에 걸릴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박달을 갑자기 뼛속까지 시려 오는 한기를 느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딘가? 주막이라도 나타나면 하룻밤 묵어야 하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거기가 거기 같았다. 그렇다고 아무 민가에 들어가 하룻밤 재워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집이 없는 산골짜기라면 모르지만, 한양에는 수 많은 주막과 객관 등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발이 얼어 한 발짝 걸어도 통증이 전해졌다. 박달은 이를 악물고 걷기 시작하였다. 금봉이를 처음 만났던 밤이 생각났다. 그날은 사람 사는 집이 없어서 산속을 헤매고 다녔지만, 지금은 집이 너무 많아도 정작 찾아 들어갈 집이 없었다. 박달은 아지를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나쁜 년! 수없이 밤을 함께 지새웠는데 그렇게 매정하게 굴다니…….”

눈은 그쳤지만 바람이 불자 나뭇가지에 쌓여있던 눈이 휘날리며 박달의 앞길을 막았다. 아지와 함께 했던 따뜻한 순간들이 그리웠다. 박달은 금봉이 온순한 사슴이라고 한다면 아지는 세상풍파를 다 겪은 여우와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와 함께했던 밤을 그려보았다.

‘금봉이가 순수했어. 아지는 한여름 장미야.’

박달은 피식 웃기도 하다가 한양의 이름 모를 골목길을 걷는 자신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그는 알지도 못하는 골목길을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발에서 느껴지던 통증도 없었다. 마치 발바닥이 솜 덩어리 같았다. 한 식경을 더 걸었지만, 주막은 나타나지 않았다. 배도 고프고 춥기도 하였지만 참고 걷기로 했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자 저 멀리 주막 같은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부리나케 달려 가까이 가보니 주막이라고 쓴 깃발이 보였다. 눈에 덮여 자세히 보지 않으면 무슨 글자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 주막에 들어 하룻밤 묵자. 더 걷다가는 동태가 되겠어.’

초가지붕의 허름한 주막인데 손님은 보이지 않고 개 두 마리가 눈이 소복이 쌓인 마당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사립문을 열고 주막에 들어갔지만 '어서 오라’는 말이 없었다. 봉놋방 두 곳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주인이 기거하는 것 같은 문이 큰 방에서도 흐릿한 불빛이 창호지에 물들어 있었다.

“계세요? 계십니까?”

‘이상하다? 분명히 방에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도 없어요?”

이번에는 박달이 목청을 높이자 방문이 열리더니 여인의 모습이 희미한 불빛에 비쳤다.

“누구요?”

“지나가는 과객입니다.”

“영업 끝났수. 다른 주막으로 가보슈.”

나이가 꽤 지긋해 보이는 여인의 쉰 목소리가 무척 차갑게 들렸다.

“하룻밤만 묵읍시다. 그냥 자겠다는 게 아니오. 방 삯은 낼 거요.”

“봉놋방이 모두 손님들로 가득 찼는데 어떻게 재운단 말이우?”

“다른 손님들 틈에서 자도 상관없소이다.”

“저 아래 길로 조그만 가면 주막이 하나 더 있수. 그리 가보시구랴. 여기서는 도저히 잘 수 없수. 국밥도 다 떨어졌고. 어서 가보슈.”

여인은 말을 마치자 문을 쾅 하고 닫아버리고 불을 껐다.

‘이런! 이 일을 어쩌나? 여기까지 간신히 왔는데 또 가야 하다니.’

“주모, 헛간도 좋으니 하룻밤만 재워주시구려.”

“…….”

주모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주모, 헛간도 좋으니 하룻밤만 재워줘요.”

박달이 아무리 주모를 불러보아도 한번 닫힌 문은 열릴 줄 몰랐다. 그렇다고 함부로 방문을 열고 들어갈 수도 없었다. 박달은 할 수 없이 꽁꽁 언 발로 걷기 시작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어쩌다가 이 엄동설한에 한양의 눈 쌓인 뒷골목을 배회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언덕을 올라가다 박달은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앗 -.

거의 다 올라갔던 언덕에서 아래로 수십 번도 더 구르며 어른 키 깊이의 구덩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박달은 허리, 다리, 머리할 거 없이 구르면서 돌에 부딪혀 꼼짝할 수 없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박달이 소리쳐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이대로 한양의 어느 알 수 없는 길에서 동사(凍死)하는가 보다. 어쩌다 내 인생이 이리되었을꼬?”

박달이 서러워 큰 소리로 울면서 속의 울분을 토해냈다. 한참을 구덩이에 빠져서 울다 보니 구름 사이로 반달이 빠끔히 얼굴을 내밀고 박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님이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핀잔을 주는 것 같았다.

“달님, 금봉이, 우리 금봉이 잘 있지요? 나는 이렇게 처량한 신세가 되어 한양의 알 수 없는 곳의 눈구덩이에 빠져 있답니다. 어서 저에게 힘을 주시어 이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박달이 큰 소리로 울며 달에게 기도를 드렸지만 달은 구름 속을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며 서천을 향해 흐를 뿐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객지에서 강시(殭屍)가 되겠구나. 어떻게 해서든지 이 구덩이에서 빠져나가야 해. 안 그러면 여기서 얼어 죽을 거야.’

박달이 움직여 보았지만, 등과 다리에 통증이 심해 꼼작도 할 수 없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사람 살려요-.”

박달이 아무리 불러도 바람 소리만 들려 올 뿐 누구도 달려오는 사람이 없었다. 박달은 있는 힘을 다해 다시 한번 소리쳤다.

“사람 살려요. 사람이 구덩이에 빠졌어요. 사람 살려요. 천지신명님, 이 가련한 박달이를 살려주세요. 달님, 저를 살려 주세요.”

기진맥진한 박달이 혼자서 중얼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요?”

구덩이 위로 두 사내가 나타났다.

“사람 살려요! 미끄러져 눈구덩이에 빠졌어요. 저 좀 살려 주세요. 구덩이에 떨어지면서 다쳐서 꼼짝을 할 수 없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잠시만 거기 있으슈.”

“고맙습니다. 천지신명님, 달님, 고맙습니다.”

박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두 사내가 장대를 내렸다.

“그 장대를 꼭 잡으슈.”

“고맙습니다.”

박달이 간신이 두 사내의 도움으로 구덩이에서 나왔다.

“이 밤에 어떻게 하다 그 구덩이에 빠졌수?”

차림새를 보니 두 사내는 방망이를 들고 오랏줄을 허리 찬 것으로 보아 포졸이 틀림없었다.

“고맙습니다. 저 언덕을 올라가다 그만 미끄러져 눈구덩이에 빠졌습니다.”

“우린, 한성부 소속 야경꾼이오. 그대는 어디를 가려던 참이었소?”

“저는 박달이라 합니다. 주막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이 근처에 주막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십시오.”

“많이 다친 거 같은데, 우리가 데려다주지요. 저 아래 주막이 있소.”

박달은 두 야경꾼의 도움을 받아 겨우 주막에 들어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봉놋방은 서너 명의 사내가 코를 골며 새우잠을 자고 있었는데, 어찌나 발고랑 내가 심하게 나는지 코를 틀어막고 잠을 자야 할 판이었다. 박달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새우잠을 청해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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