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시련이 시작되다

금봉이는 이등령에서 넘어져 갑돌이에게 업혀 온 뒤로 한동안 집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있었다. 밥맛이 없다며 하루 세끼의 밥도 먹지 못하고 자꾸 헛구역질했다. 최대호는 딸의 그러한 상태를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속을 태우고 있었다.

‘과거가 끝난 지 스무날이 훨씬 넘었는데 어찌 된 일일까? 박달 도령이 와도 벌써 왔을 텐데.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혀 그런가?’

최대호는 궐련을 입에 물고 멀리 북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딸의 배가 아직은 마을 사람들 눈에 뜨일 만큼은 아니지만, 곧 마을 사람들은 딸의 비대해진 몸피를 알아보고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 댈 것이 분명했다.

“금봉 아버지, 아무래도 금봉이가 이상해요.”

“뭐가?”

“저 애 몸이 이상해요.”

봉양댁은 딸의 이상 징후를 알아보고 보름 전부터 방 한쪽에 놓여있는 요강을 살펴보았다. 자신과 딸이 비슷한 시기에 달거리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봉양댁은 딸의 개짐이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딸이 예전보다 무척 동작이 굼뜨고 자주 자리에 누워있는 것으로 보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이상하다니? 금봉이가 뭐가 이상하다는 거요?”

“저 애가 마치 아이라도 밴 여인처럼 행동도 굼뜨고 며칠 전부터 자꾸만 헛구역질하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해요.”

‘이런, 결국 마누라가 알게 되었군. 며칠만 더 있으면 박도령이 올지도 모르는데 그때 가서 이야기해주려고 하였건만 박도령은 나타나지 않으니 이일을 어찌한담?’

최대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먼 산만 바라보았다.

“금봉이가 뭐가 어떻다고?”

최대호는 딸의 임신 사실을 숨기고 며칠만 더 기다려보려고 했었다.

“당신, 나에게 뭐 숨기는 거 있지요?”

“마누라쟁이가? 별말을 다 하네. 내가 당신한테 숨길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오. 나는 금봉이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게 없소.”

최대호는 습관처럼 궐련을 말면서 박씨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말 해봐요. 저 애한테 분명 무슨 일이 있어요. 내 눈은 못 속여요. 저 애가 벌써 그것이 끊어지고 자꾸 몸이 붓는 것이 너무나 이상해요. 솔직히 말 해봐요. 먼저 박씨가 다녀갔을 때 당신을 밖으로 불러내 한참 동안 무슨 말을 나눴는데 무슨 내용이었어요?”

“내가 박씨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러오? 금봉이가 몸이 허약하니 잘 보살펴

주라고 한 말밖에 없었소.”

“당신, 저 애가 임신했다는 거 알고 있었지요?”

봉양댁은 남편을 다그치기 시작하였다.

‘마누라가 어떻게 그것을…….’

“당신은 무슨 말을 그리하오? 금봉이가 임신했다니? 무슨 뜬금없는 소리요? 시집도 안 간 아이가 임신이라니?”

“이 집안에서 나만 바보같이 지내고 있었구먼. 나만 바보였어. 시집도 안 간 딸년이 임신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니. 동네 나를 뭐라고 할까. 아이고! 아이고! 내가 얼른 죽어야지. 도대체 시집도 안 간 딸년이 어떻게 행동을 했기에 애를 배었단 말인가 그래?”

봉양댁은 방바닥을 치며 통곡하였고 최대호는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시나? 예전에는 없었던 일인데?’

금봉이 저녁을 일찍 들고 방에 누워 박달이 생각에 골몰하고 있을 때 안방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거리가 떨어져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자기를 두고 싸우는 소리 같았다.

‘아, 어쩌나. 두 분이 내가 서방님의 아기를 임신했다는 것을 아신 것일까? 안 되는데. 아직은 아시면 절대 안 되는데. 곧 서방님이 오실 때까지 아무도 몰라야 해. 서방님에게 제일 먼저 이 소식을 알려야 해. 그러나 내가 서방님의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아시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아마 기뻐하시며 나를 꼭 안아 주시겠지. 서방님이 벌말로 오시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말씀드려 빨리 혼인시켜달라고 해야 하는데…….’

금봉이는 박달이 올 때가 지났지만 오늘 아니면 내일 중으로 벌말로 찾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서방님, 어서 달려오세요. 제 뱃속에 서방님의 씨앗이 자라고 있어요. 아직은 저 말고 아무도 모르고 있어요. 서방님이 오시면 아버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씀드리고 서방님에게 시집가려고요. 이 아이가 아마도 서방님을 쏙 빼닮았을 거예요. 어서 빨리 달려오세요. 먼저는 이등령을 다녀오다가 다리를 삐어서 고생 좀 했어요. 서방님이 저 대문을 활짝 열고 들어오실 꿈만 꾸면서 지내고 있어요. 서방님, 어서 달려오세요.”

금봉이는 박달이 과거를 마쳤다면 벌써 벌말을 찾았을 테지만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산 넘고 들판을 달려오려면 어느 정도 눈이 녹아야 할 것이고, 어제 내린 눈이 어른 키만큼 쌓여 그 눈이 녹으려면 상당한 시일이 지나야 할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하였다. 어느새 해가 바뀌면서 눈은 거의 매일 내리다시피 했고 동네 장정들은 눈을 치우느라 비지땀을 흘려야 했다.

“갑돌 총각, 인제 그만 마셔. 벌써 네 주전자야. 밤도 깊었는데…….”

저녁에 동네 사랑방에 모여 어른들 틈에 끼어 투전하다 동네 어른들이 금봉이 이야기를 꺼내자 심사가 뒤틀린 갑돌이는 사랑방을 나와 과수댁을 찾았다. 주점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빌어먹을 놈들! 모이면 금봉이 이야기야. 제 놈들이 금봉이에게 밥을 사줬어. 버선을 사줘봤어. 왜 모이면 금봉이를 씹어대는 거야?”

갑돌이는 안주도 먹지 않고 연신 탁주 잔을 비웠다. 지난번 금봉이를 이등령에서 업고 올 때 금봉이가 한 이야기가 생각나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십 년 가까이 이웃에서 살면서 금봉이를 아내로 맞이할 것이라고 수천수만 번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일이 허사가 된 것에 가슴이 아려왔다.

“나쁜 계집애. 내가 저를 얼마나 생각했는데 근본도 모르는 녀석에게 순식간에 마음을 주다니. 난, 난 어떡하라고…….”

옆에서 갑돌이를 지켜보던 과수댁은 갑돌이가 왜 흐느끼는지 대충은 그 의미를 짐작하고 있었다. 벌말에서는 금봉이가 갑돌이의 각시가 될 거라고 소문이 자자하던 터였다. 그러나 어느 날 벌말을 찾은 박달로 인하여 갑돌이와 수돌이는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갑돌이가 한참 흐느끼고 나서 일어나려고 할 때 최대호가 주점으로 들어섰다.

“어르신 오셨어요?”

“갑돌이 아니냐?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느냐? 울고 있구나? 어르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갑돌아, 잠시만 앉아 보아라. 잠깐이면 된다.”

박달이 자신의 집을 찾기 전에는 최대호는 갑돌이를 사윗감으로 점찍어 놓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박달이 나타나는 바람에 갑돌이는 그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한때 사윗감으로 생각했었고 얼마 전에는 이등령에서 넘어져 크게 다친 딸을 집에까지 업고 온 갑돌이었다.

“갑돌아.”

“네에 어르신.”

“너, 아직도 우리 금봉이를 마음에 두고 있니?”

“…….”

대답 대신 갑돌이는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만 바라보았다.

“괜찮다. 말해보려무나.”

“네, 금봉이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금봉이와 어린 시절부터 같이 커왔습니다. 어르신, 저는 꼭 금봉이에게 장가들겠다고 맹세한 몸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사내가 이 벌말에 나타나면서 저의 꿈은 산산 조각나고 말았습니다.”

갑돌이 서럽게 울고 있었다.

“…….”

“어르신,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제가 금봉이에게 장가들게 해주십시오.” 갑돌이 무릎을 꿇고 최대호에게 빌었다.

“갑돌아, 이러지 말거라. 사내대장부가 함부로 눈물을 보이면 쓰겠니?”

“어르신, 제가 금봉이에게 장가들 수 있게 해주세요. 전 요즘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금봉이가 그 박도령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난 뒤부터 전, 전 아무런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제가 금봉이에게 장가들 수 있도록 해주세요.”

갑돌이는 옆에 과수댁이 있었지만, 창피한 것도 잊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난감해진 최대호는 갑돌이 등을 다독거려주면서 술잔을 비웠다.

‘이리도 내 딸을 좋아하거늘. 내가 괜한 욕심을 낸 것은 아닐까? 박도령만 아니었더라면 갑돌이에게 금봉이를 시집보냈을 거야. 그러나 딸애 뱃속에 박도령의 씨앗이 자라고 있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최대호는 갑돌이에게 섭섭한 마음이 있으면 풀라고 위로하려고 했다. 하지만 갑돌이의 눈물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 그냥 주점을 나섰다.

아지는 과거에 낙방한 박달을 냉정하게 차버린 후 장사도 하지 않고 거의 술에 취해 있었다. 박달이 과거에 입격하여 자신의 한을 풀어 주리라고 철석같이 믿었었다. 장사도 팽개치고 날마다 술에 취해 있자 그녀의 친구들이 대신 영업을 하고 있었다. 박달의 괴나리봇짐은 아지의 주막에 그대로 있었다. 박달을 냉정하게 대해기는 했지만 삼사일 지나면 찾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박달은 사나흘이 지나도록 아지를 찾지 않았다.

“아지야, 정신 차려. 사내가 그 박달이 밖에 없니? 너처럼 얼굴 반반하고 돈 많으면 얼마든지 사내들 골라서 시집갈 수 있어. 그 박달인지 복달인지는 이제 그만 잊고 다른 사내를 찾아봐.”

‘내가, 내가 너무 심했나? 그래도 그렇지 사내가 돼서 다시 찾아와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내 마음이 풀어졌을 텐데. 무슨 사내가 그리도 고집이 세단 말인가?’

취생몽사 상태에 있는 아지는 자신의 야박한 행동에 대하여 후회하고 있었다. 과거를 준비한 유생은 한 두 번의 실수가 있을 수 있었다. 그녀가 충격을 받은 것은 박달에게 건 기대가 큰 탓이었다. 아지는 박달에게 차마 못할 말을 한 자신의 조급성을 반성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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