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아지를 다시 만나다

‘한 번의 실수는 누구나 있을 수 있어. 과거는 수시로 있으니 다시 시작해 보는 거야. 이번에는 더욱 정성을 다해 뒷바라지하면서 꼭 과거에 합격하도록 지성을 드려보는 거야. 그런데 왜 안 오실까? 내가 냉정하게 대했다고 정말로 화가 나서 고향으로 내려간 걸까? 금봉이란 처자에게 갔다면 어쩌나? 혹시 한양의 어느 주막에 계실지도 모르지. 노잣돈도 없을 텐데…….’

아지는 박달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어찌하나? 수중에 돈이 다 떨어졌는데. 오늘 밤만 자면 이 봉놋방에서 쫓겨날 판인데. 이 험한 한양에서 어찌 살아갈꼬? 봄에 있을지 모르는 별시(別試)는 또 어떻게 준비한단 말인가? 고향에 내려가야 뾰족한 수가 없는데. 어찌한다?’

박달은 자식의 과거 급제를 바라며 지성을 드리고 있을 늙은 홀어미를 생각하자 억장이 무너졌다. 칠패시장 근처 주막에서 묵으면서도 박달은 마음이 심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지의 주막에 있을 때는 그녀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노잣돈이 들지 않았지만, 이제는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당장 내일부터 끼니와 잠자리를 걱정해야 했다.

‘어떻게 한다? 추운 겨울에 길가에 나앉아 굶어 죽을 수도 없으니……. 나에게 호의적인 이 주막 주모에게 부탁해 허드렛일을 거들며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해야겠어.’

박달이 용기를 내어 주모를 찾았다.

“도령이 주막 일을 돕겠다고? 마침 일손이 달리기는 하지만 어려울 거유.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움직여야 밥술이라도 뜰 수 있수. 도령의 사정이 그렇게 딱하다면 우리 주막 일을 거들어 주기는 하는데, 내 말을 잘 들어야 하우. 알겠수?”

“네. 고맙습니다.”

박달은 당장 쫓겨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하였다. 다음날 새벽닭이 울자 늙은 주모가 박달을 깨웠다.

“박도령, 우선 저 아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저 가마솥에 가득 채우고 장작불을 지펴유. 빨리 움직여야 해유. 동 트면 손님들이 몰려드니까.”

“네. 알겠습니다.”

‘지금 시간이면 아지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단잠에 빠져 있을 텐데…….’

박달은 아지의 향긋한 체취가 그리웠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니 생각해보았자 머리만 복잡할 뿐이었다.

“아이쿠!”

박달이 물지게를 지고 가다 빙판에 나뒹굴고 말았다. 한 벌밖에 없는 바지와 저고리가 모두 젖어 금방 뻣뻣하게 얼어버렸다. 얼어버린 바지에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간신히 가마솥에 물을 채우고 장작불을 지폈다. 그는 가마솥 아궁이 앞에 앉아 바지를 말리고 있었다.

“박도령, 저 솥에도 물을 가득 채우고 불을 지펴줘유.”

주모가 옷을 말리고 있는 박달에게 다른 일을 주었다. 박달은 차가운 바지 차림으로 다시 물을 길어 나르기 시작했다. 한 번도 지게를 져본 적이 없는 박달에게 물지게는 고역이었다. 지게의 좌우 평형을 맞추지 못해 넘어지기 일쑤였다. 두 가마솥에 물을 채우고 나자 바지에 고드름들이 수북하게 맺혔다.

‘어머니, 이 못난 자식을 용서하세요.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하여 주막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습니다.’

장작불 앞에서 바지를 말리고 있던 박달은 흐느꼈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초시(初試)에 합격하여 복시(覆試)를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박도령, 마당에 눈을 쓸어요. 손님들이 올 시간이니 말끔하게 쓸어야 해요. 빗자루와 넉가래는 뒤꼍에 가면 있어요.”

주모는 박달이 잠시라도 앉아 있을 틈을 주지 않았다. 주모뿐만 아니라 주방일을 거드는 동자아치와 반빗아치들도 박달에게 자질구레한 일을 주문했다. 먼동이 터오자 장사치들과 봉놋방에서 잠을 자고 일어난 사람들이 국밥을 주문하였다.

“박도령, 이 밥상은 마당에 있는 평상으로 내가고, 저 개다리소반은 두 번째 봉놋방으로 내가요. 그리고 조금 있다가 저 아래 푸줏간에서 동태와 돼지고기 열 근만 사 오고요.”

박달은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오줌이 마려워도 뒷간에도 가지 못하고 사타구니에서 요령 소리가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다.

‘주막 일이 이리도 힘들단 말인가?’

아지의 보살핌으로 아무 걱정 없이 과거 준비를 하던 때가 생각났다. 남편처럼 대접해준 아지의 정성이 너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지도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여 손님들을 맞이했을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박달과 시선이 마주치면 얼굴을 붉히고 살포시 미소를 짓곤 했다.

‘아지의 노고가 이렇게 힘들었구나. 아지의 정성에 힘입어 과거에 입격해서 고마움을 갚았어야 했는데…….’

“박도령, 여기 이 밥상을 첫 번째 봉놋방에 들이고 아까 들어간 빈상을 수거해 와요. 서둘러요. 꾸물거리다가는 손님들 고함이 날아와요.”

‘어이쿠! 이거 생각보다는 엄청 힘들구나. 밥 먹기가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어디 해먹겠나? 아지가 내 뒷바라지 해줄 때가 행복했었구나. 지난번에 합격해서 보란 듯 그녀에게 보답했어야 하는 건데…….’

훤하게 날이 밝아오자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주모와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박달은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박달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허겁지겁 아침밥을 얻어먹고 다시 물지게를 지고 우물로 달려야 했다. 처음보다 익숙해서 그런지 빙판에 미끄러지는 일은 없었다. 별시(別試)를 준비해야 할 처지에서 물지게를 지고 나르는 처량한 자신의 몰골에 박달은 눈물을 흘렸다.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하여 꼭 별시에 입격하리라. 그리하여 아지에게 본대를

보여 주고 금봉이에게 달려가야지. 꼭 그리 할 거야.’

박달은 가마솥에 물을 가득 채워 놓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손님이 좀 뜸한 틈을 타서 박달은 봉놋방에 들어앉아 책을 펼쳤다. 하룻밤 자고 간 손님들이 남긴 휴지며 쓰레기 등이 방구석 여기저기 널려 있었지만, 박달은 책 읽기에 전념하였다.

자왈, 군자 의이위상 군자 유용 이무의 위란 소인 유용이무의위도.

공자가라사대, 군자는 의를 으뜸으로 삼으니, 군자는 용맹이 있으나 의가 없으면 혼란스러울 것이요, 소인은 용맹이 있으면서 의가 없으면 도적질을 할 것이로다.

오랜만에 책을 잡은 박달은 과거의 합격을 위한 집념을 불태웠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금봉이를 생각하니 속에서 울컥하며 설움이 치밀어 올랐다. 이번 별시에서는 장원급제는 고사하고 중간 성적으로 합격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기였다. 박달이 논어(論語)를 중간쯤 읽을 때 밖에서 찾는 소리가 들렸다.

“박도령, 빨리 나와 봐요.”

“부르셨어요?”

“간난이와 칠패시장에 가서 생선 좀 사와요. 빨리 다녀와야 점심을 준비할 수 있어요.”

주모는 박달에게 엽전 꾸러미를 건넸다.

“알겠습니다.‘

“간난아! 박도령 모시고 칠패시장엘 다녀오거라.”

박달보다 너덧 살 어려 보이는 주방 보조로 있는 간난이는 박달이와 시장에 가는 것이 몹시 즐거운 듯 입이 벌어지며 앞장섰다.

“박도령님, 칠패시장은 처음 가보지요?”

칠패는 이현, 종루와 더불어 한양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서민들의 생활필수품이 주로 거래되는 시장으로 숭례문 밖에 있는데, 주요 취급 품목은 생선이었다. 군졸들은 나라에서 주는 급료로 생활하기 힘들었다. 그들이 교대 근무로 귀는 날은 마포나 노량진에서 생선을 도매금으로 구매하여 칠패시장에서 좌판을 벌이는 바람에 시장은 활황을 누리고 있었다.

“주막에서 허드렛일을 하시면서 공부를 하신다고 들었어요. 과거를 준비하시나 봐요? 주막에서 일하시면서 공부하시기는 힘들어요.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밤에 술손님을 받으려면 눈코 뜰 새가 없어요. 박달님은 주막 같은 데서 일하실 분이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 주막에 머물러 계세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사정이 있어서 그래. 간난이는 주막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되었어?”

“삼 년 정도 되었어요. 삼 년 되었어도 늘 보조만 하는걸요. 불 때고, 밥하고, 김치 담그고, 설거지하고, 밥 푸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요.”

“주막에서 일하려면 부지런해야 하겠군.”

“전에도 어떤 선비 한 분이 주막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박달님처럼 공부하던 적이 있었는데 보름 정도 일하시다 가버리셨어요.”

“그래? 그 선비는 왜 주막 일을 그만두었을까?”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쉴 틈도 없이 일하다 보니 공부할 짬이 없으셨던 것 같아요. 그 선비님도 시골에서 올라오셨다고 하던데…….”

박달과 간난이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다정하게 시장으로 향했다.

“칠패시장을 말로만 들었는데 굉장하구나.”

“시장 구경 처음 하세요?”

“응.”

“저만 따라오세요. 시장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안 되잖아요? 여긴 복잡해서 한번 길 잃어버리면 찾기가 쉽지 않아요.”

칠패시장에서 판매되는 주요 품목이 생선이었다. 시장 바닥에도 다양한 종류의 생선을 파는 좌판들이 즐비했다. 대부분 중인 출신의 남자들과 그들의 아내들이 생선을 판매하는데 어물이 꽤 싱싱해 보였다. 고등어, 오징어, 조기, 갈치, 잉어, 문어, 꼴뚜기, 낙지, 꽁치, 꽃게, 참게, 붕어, 뱀장어, 은어, 넙치, 가자미, 광어, 키조개, 대합, 피조개, 꼬막, 달팽이, 우렁이, 동태 등 조선의 바다나 강 또는 호수에서 잡히는 물고기는 모두 진열된 듯했다.

상인들은 생선이 좀 더 싱싱하게 보이게 하려고 바가지로 물을 살살 뿌려댔다. 박달과 간난이가 좌판을 지나가려고 하면 생선 판매하는 아낙들이 팔을 잡으며 호객행위를 하였다. 박달은 서둘러 생선을 사서 시장을 나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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