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박달, 심기일전하다

“그냥 가시게요? 시장에 오셨으니 모주라도 한 사발 들고 가야죠? 도령님, 이리 오세요.”

“주모가 기다릴 텐데? 빨리 가야 하잖니?”

“딱 한 잔만 마시고 가요.”

“그래, 그럼 딱 한 잔이야.”

박달은 한 잔 술을 마시면서 간난이에게 자신의 간단한 신상을 소개하였고 간난이는 그런 박달이 측은했는지 앞으로 많이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간난아, 고맙다.”

“대신 박도령님, 좋은 일이 있으면 저에게 술 한 잔 사주셔야 해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박달과 간난이는 모주 두 잔씩 마시고 주막으로 향했다. 하늘이 꾸물거리더니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나흘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박달은 주막 일이 손에 익었지만 초조했다. 먹고 자는 것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자 박달은 조급증이 일었다.

“그런 분, 이 주막에 묵은 적이 없다고요?”

“네. 낭군께서 다른 데로 가기 전에 얼른 이 근처 주막을 뒤져봐요.”

아지는 아침부터 마포와 서강(西江) 일대의 주막을 뒤지며 박달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여러 날이 지나도록 박달이 괴나리봇짐조차 찾으러 오지 않자 아지는 몹시 불안해했다. 그녀는 과거에 낙방하여 박달을 구박하였지만, 한양에 일가친척 한 명 없는 사람에게 야박하게 군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아지는 아현과 운종가, 구파발, 노량진, 용산, 이문, 세검정, 흥인문, 이현(李峴)시장 등 주막이 몰려있는 지역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그녀는 박달을 찾을 수 없었다. 아지는 박달이 정말로 자신의 박대에 분노해 고향으로 돌아간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였지만, 그의 괴나리봇짐이 그대로 있는 것에 안심하였다.

‘정말로 나의 언동에 마음을 돌린 걸까? 그렇게 쉽게 발길을 돌린 분이 아니야. 나에게 미련이 있으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거야. 그렇다면 박달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다시 마음을 돌리게 해야 해.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눈이 녹아 한양의 대로는 질척거렸다. 아지는 마차를 임대하여 하루 종일 한양 번화가와 시장통을 돌아다녔지만 헛수고 였다. 그녀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칠패시장 주변 주막을 뒤져보기로 하였다. 아지는 마차에서 내려 마부와 걸으며 시장 주변을 살펴보았다. 먼저 숭례문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이 내리는 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바삐 숭례문을 드나들었다. 눈 덮인 숭례문 지붕에 일렬로 늘어선 어처구니들이 춥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녹색과 붉은색으로 칠해진 숭례문 단청이 세월의 무게를 말해 주는 듯 고색창연하면서도 위엄이 느껴졌다.

숭례문 아래 통로 좌우로 벙거지를 쓰고 검정색 옷을 입은 병사 두 명이 시커먼 벙어리장갑을 끼고 삼지창을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 중에 이상하다고 판단되는 행인을 세워 놓고 소지품을 일일이 검사하며 흉악범의 초상화와 대조하기도 하였다. 푸른색 철릭을 입고 전립(戰笠)을 쓴 사령이 칼눈으로 행인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아지는 칠패시장에 있는 주막을 뒤지며 주모들에게 박달의 초상화를 보여주고 인상착의를 알려주어도 모른다고 했다.

“이 칠패시장통 말고 다른 데 주막이 또 있나요?”

“저기 시장 끝에서 목멱산 쪽으로 조금만 가면 주막이 있을 거요. 우리 주막 국밥도 맛있는데 들고 가시지요?”

아지가 조금 전에 들렸던 주막의 주모에게 묻자 시큰둥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지와 마부가 주모가 알려준 대로 한참 걷자 허술한 주막이 하나 나타났다. 아지와 마부는 평상에 앉아 국밥을 시켰다. 마당에 쳐 놓은 포장에 눈이 쌓인 것을 간난이 바지랑대로 툭툭 치며 털어 냈다.

“아가씨, 뭣 좀 물어볼게요.”

아지가 간난이를 부르자 간난이 아지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뭔데요?”

“혹시 이 주막에 박달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령이 기거하고 있지 않나요? 아니면 하룻밤 정도 묵어갔던지.”

아지가 박달의 형상을 그린 종이를 간난이에게 보여 주었다.

‘앗, 바, 박도령님 얼굴이…….’

간난이는 아지가 박달의 아내나 혹은 일가친척이 아닌가 싶어 알려주려다가 다시 생각을 해보았다.

‘이분들이 박도령님에게 위해를 가하면 어쩌지. 내가 말을 잘못하면 박도령님이 곤란한 지경에 빠질 수도 있을 거야.’

간난이는 입을 꾹 다물고 아지를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아가씨, 이런 분 못 봤어요?”

‘어쩌나, 박달 도령님은 물 길러 가셨는데 금방 올 텐데…….’

“네, 못 봤는데요.”

간난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눈을 내리깔며 짧게 대답하였다. 아지가 막 국밥을 먹으려고 수저를 들었을 때 박달이 물지게를 지고 마당으로 들어서면서 아지와 시선이 마주쳤다.

“서, 서방님!”

‘아지가 여길 어떻게?’

“서방님, 이게 어찌된 거예요?”

아지가 평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는 그대는 여기 어쩐 일이오?”

“서방님, 제가 잘못했어요.”

아지가 박달 앞에 서더니 반쯤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보는 임이었다. 아지는 눈물을 훔치며 목이 메는지 말을 잊지 못했다.

“나는 그대를 더는 보고 싶지 않소. 나는 이 주막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온종일 물 긷고, 가마솥에 불 지피고, 손님들에게 국밥 나르고, 술을 나르며 살아가고 있소. 마음 하나는 참으로 편합디다. 그대가 나를 다시 찾을 줄은 몰랐소.”

박달은 운종가에서 아지에게 박대받던 일을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서방님, 제가 잘못했어요. 저와 그만 돌아가요. 여기는 서방님이 계실 곳이 아닙니다. 어서 저와 마포로 돌아가요.”

“난, 이곳이 편하오.”

“서방님, 안 됩니다. 어서 저와 마포로 가셔서 다시 시작하시는 거예요. 사람들 말로는 봄에 별시가 일을 지도 모른다고 해요.”

“난 이곳에서 일하며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어요. 그러니 나에게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요.”

“안 됩니다. 주막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루 세끼 밥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것을 제가 뻔히 아는데, 서방님이 이런 데서 어떻게 공부를 하시겠다는 말씀이세요? 그때 제가 잘못했어요. 저를 용서해 주시고 마포로 돌아가세요. 서방님, 제가 이렇게 빌잖아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 노여움을 거두시고 저와 마포로 가세요. 시간이 없어요. 온종일 책을 보며 다시 과거 준비를 하시도록 하세요. 제가 먼저보다 더 신경을 쓸게요. 저와 돌아가세요.”

아지가 박달에 매달렸다.

‘하긴 며칠 동안 주막 일을 해보니 이런 상태에서 과거를 준비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기가 막힌 일인지 잘 알지. 그러나 다시는 아지를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어이할꼬? 사내가 한번 마음먹었으면 실천해야지 당장 어렵다고 쪼르르 아지를 따라나선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하지만 과거를 다시 보려면 아지 말대로 온종일 책 속에 파묻혀 살아야 하는데 물지게를 지고 있으면서 언제 과거를 준비한단 말인가? 어찌해야 하나? 못 이기는 체하고 아지를 따라나설까? 괜히 고집 피워봐야 나만 더 피곤하고 몸만 달 텐데…….’

박달이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아지는 박달에게 애원하다시피 했다.

“서방님, 제가 잘못했어요. 그만 노여움 푸시고 다시 시작해요. 그때는 저도 욱하는 성질에 화기를 참을 수 없어서 그런 말을 했어요. 죄송해요. 저도 그렇게 말해 놓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서방님, 시간이 없어요. 서방님께서 고향에 안 내려가시고 이곳에 계신다는 것은 과거를 보실 의향이 있다는 뜻입니다. 서방님, 자존심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과거 공부가 더 중요합니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하시어 과거에 입격하셔야지요. 주막에서 허드렛일을 하시면서 무슨 공부를 하실 수 있겠어요. 서방님, 어서 저와 함께 돌아가요. 서방님이 계실 곳은 마포지 이곳 칠패시장 모퉁이가 아니에요. 제발 돌아가세요. 저를 용서하시고 돌아가셔서 다시 시작하세요.”

박달은 평상에 앉아 골똘히 이것저것을 생각해보았다. 아지 말이 백번 맞기는 하지만 선뜻 따라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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