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별시를 준비하다

‘사나이가 지조 없이 따라나서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쩌나…….’

“박도령님, 제가 이런 말씀 드려 송구합니다만, 도령님께서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하셨으니 무슨 일이 있으셔도 그 꿈을 이루셔야지요. 전 처음에 박도령님이 그냥 말로만 과거를 준비하는 줄 알았어요. 제 판단에도 이 언니 말씀이 맞아요. 이곳에서는 도저히 과거 준비할 수 없어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해야 하는데 언제 책을 읽어요? 지금은 자존심 다 버리시고 과거에 급제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해요. 어서 언니를 따라가세요.”

간난이가 옆에 서 있다가 아지를 거들고 나섰다.

‘그래, 간난이 말대로 입격이 우선이지. 그까짓 자존심이야 합격하고 난 후에 세워도 되겠지.’

"서방님, 어서 저와 가세요.“

“좋소. 내 그대 말을 따르리다.”

“박도령님, 잘 생각하셨어요. 나중에 과거에 합격하시거든 꼭 우리 주막에 한 번 들려주세요. 저하고 한 번만 더 칠패시장 가서 모주 한잔 마셔요.”

아지와 간난이는 박달의 자존심이 크게 훼손되는 않는 선에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하였다.

“금봉이 방에 있니?”

일찍 저녁을 먹고 난 봉양댁이 딸의 방을 찾았다.

“엄마하고 이야기 좀 하자.”

“…….”

“금봉아, 너 엄마한테 솔직하게 말해보렴.”

‘엄마가 다 알고 계시나 보다. 이를 어째…….’

“엄마하고 딸 사이에 못할 말이 어디 있어? 너에게 이상한 조짐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

“저에게 아무 일 없어요.”

“저 지난달부터 너 그거 없는 거 알고 있다. 누구 씨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엄마에게 솔직하게 털어놔봐. 그래야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 거 아니니?”

금봉이 그제야 흐느끼기 시작했다.

“엄마, 죄송해요.”

금봉이 어머니는 흐느끼는 딸의 등을 다독거렸다.

‘어린 것이 혼자서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을까? 언니가 있어 상의할 수 있나 절친한 친구가 있나? 혼자서 수많은 날을 밤잠도 자지 못하고 고민하였을 텐데.’

“얘야, 그 아기 아버지가 박달도령 맞니?”

“네. 어머니, 죄송해요.”

‘이 일은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곧 동네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될 터인데. 창피해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왜 하필이면 그때 그 사내가 우리 집에 찾아올 게 무어람? 왜 하필이면 우리 집에…….’

“지금은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 데는 없는 거야?”

“네에.”

봉양댁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를 딸의 앞날이 걱정되어 목이 멨다. 생각 같아서는 철없는 딸을 두들겨 패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 어디 가서 실컷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즉에 딸에게 혼전 성교육을 시키지 못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니, 봉양댁은 자신의 무관심에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전적으로 딸의 잘못을 탓할 수 없지. 내가 여자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몸가짐에 대한 훈육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죄가 크지. 금봉이가 오늘 이렇게 된 것은 내 잘못이야. 앞으로 어떻게 한다? 친정에 보내 강제로 유산을 시켜? 아니면 집에서 두문불출하게 하고 아기를 지워?’

봉양댁은 한숨만 쉬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어머니, 죄송해요. 박달님과 정분을 나누긴 했어도 아기가 들어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죄송해요.”

“그게 어디 네 탓이니. 다 이 미련한 어미 탓이지.”

모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전개될 운명에 대하여 불안해했다.

“어머니, 박달님은 꼭 오실 거예요.”

“이것아, 아직도 박달 타령이니?”

“어머니, 그분은 꼭 오세요. 저에게 과거에 급제하면 저를 보러 이 벌말로 달려오신다고 하셨어요.”

“과거 끝난 지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그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걸 보면 그 사람이 너를 잊은 게 분명해.”

“어머니, 아니에요. 절대로 박달님은 저를 잊으실 분이 아니에요.”

“어이구! 네가 너무 물러 터지니 이런 일이 생긴 거 아니니?”

“어머니, 박달님은 꼭 저를 찾아오실 거예요. 지금은 눈이 많이 내려 산 넘고 강 건너오실 수 없으니 저 눈이 녹으면 박달님이 오실 거예요.”

“어이구, 속 터져 죽겠다. 그래, 네 말대로 그 박달이 올 때까지 배 속에 아기를 넣고 있을 참이니?”

“그럼, 어떻게 해요?”

“내일 엄마하고 외삼촌 집으로 가자. 이 동네 있다가는 지금보다 더 해괴한 소문이 날지 몰라. 네 외삼촌 댁에 가서 아기를 지우자. 과거 끝난 지 한참 지나도 찾아오지 않는 걸 보면 일은 다 글렀다. 그 박달인가 뭔가 하는 남자는 안 올 거야. 아무 말 말고 내일 나하고 외삼촌 댁으로 가자. 알았니?”

“어머니, 안돼요.”

“응? 안 된다고?”

“만약 내일모레라도 박달님이 저를 찾아오면 어쩌게요?”

“설렁, 그 도령이 찾아온다고 해도 너와 혼인한다는 보장이 없잖니? 혼인은 두 가문의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인데, 그 도령 혼자 결정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니?”

“어머니. 그래도 안 돼요.”

“이 미련한 것아! 이 엄마 말대로 해.“

“안돼요, 어머니 절대 그럴 수 없어요. 어떻게 산 생명을 강제로 죽인단 말이에요. 절대로 안 돼요.”

“어이구! 어쩌다 내 팔자가 이리 되었노.”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박달님이 꼭 오실 거예요.”

모녀는 밤늦도록 옥신각신하였지만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봉양댁이 방에서 나가자 금봉이는 살며시 뒤꼍으로 나갔다. 쌀쌀한 날씨지만 박달에 대한 그리움을 천지신명님에게 고하고 싶었다. 금봉이 정화수 한 그릇을 장독 위에 올려놓고 막 기도를 드리려 할 때 동산에서 하현달이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달님, 달님! 박달 서방님을 얼른 오시도록 길을 비춰주세요. 이 소녀 박달 서방님이 아니 오시면 죽습니다. 하루빨리 박달 서방님을 저의 곁으로 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서방님께서 산과 들판에 눈이 많이 쌓여 이등령을 넘어오지 못하고 애를 태우고 계신 것을 잘 압니다. 어서 저 눈이 녹도록 해주셔요. 이렇게 빌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달은 산골 소녀 금봉이의 간절한 기도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구구구-,

금봉이가 정신없이 치성을 드리는 데 가까이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평소에는 자주 듣지 못했던 울음소리였다. 금봉이는 박달을 향한 그리움의 염원을 담아 빌고 빌었다. 그 어떤 물리적인 힘도 감히 박달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지성(至誠)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금봉이는 부모가 마실 나간 틈을 타서 집을 나와 산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천지는 온통 하얗게 변해있었다. 들판, 개울, 민가, 저 멀리 보이는 이등령도 온통 하얗다 못다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논에서 썰매를 타기도 하고 높은 언덕에 올라 소나무 가지를 잘라서 두세 명이 앉아 미끄럼을 타는 모습도 보였다. 산길 중간중간 물이 고여 있던 곳은 얼어 빙판이 되어 있었고 그 위에 눈이 살짝 뿌려져 있어 잘못 밟으면 미끄러질 것 같았다. 멀리 이등령이 있는 시랑산 정상에 하얀 눈이 덮여 있었는데 구름이 산봉우리를 휘감으며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은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방불케 했다. 금봉이는 무거운 몸으로 천천히 산길을 걸었다. 두 식경 쯤 걸으니 서낭당이 나타났다.

“서낭신님, 자주 찾아뵙지 못했어요.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우리 박달님은 잘 계시는지요? 서낭신님, 이 소녀 뱃속에 서방님의 씨앗이 자라고 있어요. 서낭신님이 점지해 주신 거죠?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는데, 박달 서방님에게서 소식이 없어 답답해 죽겠어요. 서방님이 벌말로 돌아와 소녀와 함께 서낭신님 앞에 서서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해주세요. 장원급제를 못 해도 좋으니 서방님이 속히 오셔서 소녀와 서낭신님 앞에 다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제 저의 소원은 단지 서방님을 다시 뵙는 것이랍니다.”

금봉이는 박달 생각에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금봉이 울음을 그치고 서낭당을 지나 다시 산길을 걸었다. 종종 바람이 불면 간신히 매달려 있던 나뭇잎이 허공을 향해 날아오르며 펄럭거렸다. 날씨가 며칠간 따뜻하더니 길 곳곳에 눈이 녹아 물이 고인 곳도 있어 금봉이 신고 있던 미투리가 금방 젖어 버렸다.

금봉이는 혹시라도 박달이 벌말로 달려오고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면서 앞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벌써 서방님이 떠나가신 지 넉 달이 넘어 다섯 달째 접어들고 있건만 어째서 소식이 없으신 것일까? 무슨 사달이 난 게 분명한 것 같은데. 과거에 입격하지 못하셨다 하더라도 그냥 오셨으면 좋을 텐데…….’

금봉이 정신없이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하며 걷고 있을 때 멀리서 갓을 쓴 한 선비가 걸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서, 서방님이시다.”

금봉이는 옷매무시를 고치고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서방님! 박달 서방님! 금봉이에요. 서방님, 빨리 오세요. 천지신명님! 고맙습니다. 소녀의 청을 들어주셨군요.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금봉이는 저 멀리 오고 있는 선비에게 손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서방님! 어서 뛰어오세요.”

그러나 점점 가까워지는 사람은 박달이 아닌 선비 차림의 늙은 남자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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