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이등령 망부석

“처자, 나를 불렀소?”

“아! 이럴 수가? 서방님인 줄 알았는데…….”

“원, 별 이상한 처녀를 다 보겠네. 빨리 오라고 손짓해서 달려왔건만, 늙은이를 놀리다니. 배고파 죽겠구먼.”

늙은 선비를 뒤돌아보면서 금봉이에게 눈알을 부라렸다. 늙은 선비가 지나가자 금봉이는 그만 길옆에 바위에 걸터앉아 흐느꼈다.

“서방님, 언제 오시려는지요? 서방님 기다리다 지쳐 죽겠습니다.”

금봉이 힘을 내어 무거운 배를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천천히 걸었다. 하늘 높이 솔개가 제 자리에 떠서 지상의 먹이를 발견하고 날갯짓만 하고 있었다. 이윽고 솔개가 먹이를 향해 쏜살같이 수직으로 내려꽂혔다.

“개똥어멈, 소문 들었어?”

“뭔 소문?”

“어이구, 이 멍청한 여편네는 귀 뒀다 뭐혀?”

“이 여편네야, 뭔 소리여 시방?”

“금봉이가 애를 가졌다고 하는구먼.”

“뭐시여? 그, 금봉이가,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어떻게 아기를 배?”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여. 지금 동네 어르신들이나 청년들은 누가 금봉이에게 씨를 뿌렸는지 수소문 중이라고 한다네.”

“어이쿠! 이거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아니 자다가 봉창을 뜯어도 유분수지, 어떻게 처녀가 애를 밴단 말이여?”

“이 여편네야, 그러게 내가 하는 말 아니여?”

“세상 말세로세. 어떻게 서방도 없는 처녀가 애를 다 밴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갑돌이나 수돌이 아니면 동네 총각들이 슬며시 금봉이에게 씨를 뿌렸겠지.”

“지금쯤 그 씨 임자는 안절부절못하겠네. 곧 들통나고 말거 아녀?”

“그렇지.”

“씨앗 임자가 밝혀지면 금봉이네는 어쩔 수 없이 그 임자한테 시집을 보내야 하겠구먼. 금봉이 아버지가 그렇게 우쭐대며 사윗감을 고르고 다니더니 망신살 뻗치게 되었구먼.”

마을 우물가 빨래터에 모인 동네 아낙들은 쑤군대며 금봉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봉양댁이 빨랫감을 들고 빨래터로 오고 있었다.

“쉿! 저기 금봉이 엄마가 오고 있어. 모두 입 다물어.”

“시집도 안 간 딸이 애를 뱉는 데도 뻔뻔스럽게 빨래터를 오네.”

봉양댁이 빨래터에 자리를 잡고 앉자 동네 아낙들은 봉양댁을 마치 이방인 보듯 했다.

‘이 여편네들이 사람을 본체만체하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혹시 금봉이 아이를 가진 것을 알고 그러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금봉이가 임신한 사실은 박씨 밖에 모르는데…….’

“개똥어멈! 집에 무슨 일 있어?”

봉양댁이 시큰둥한 얼굴로 개똥어멈에게 말을 걸었지만 대꾸가 없었다. 부아가 난 봉양댁이 다시 물었지만 개똥어멈은 봉양댁을 한번 멀뚱히 쳐다보고 말 뿐이었다.

‘어라? 이것들이 사람을 무시해?’

“개똥어멈! 내 말이 안 들려?”

“성님! 저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싶지 않구먼유.”

“왜? 내가 오기 전에 말도 잘하고 깔깔거리며 웃더니 내가오니까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이유가 뭐여? 우리 금봉이 가지고 입방아 찐 거 아니야?”

봉양댁이 동네 아낙들에게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았다. 벌말에서 최고 부자인 봉양댁의 위세에 아낙들은 기를 펴지 못했다.

“아이고! 성님두. 우리가 왜 쓸데없이 금봉이 이야기를 해유?”

“만약 우리 금봉이를 가지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년 있으면 내가 입을 찢어 놓을 거야. 알아서들 혀.”

“성님, 우리 개똥이가 어젯밤 오줌을 싸서 아침에 옆집에 소금을 얻으러 보낸 이야기 했어유.”

“맞어유.”

봉양댁은 동네 아낙들 사이에서 고립돼 가고 있었다. 빨래를 대충 하여 집으로 돌아온 봉양댁은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리며 금봉이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딸이 방에 없었다.

“이 애가 어딜 간 거야? 또 이등령에 간 거 아냐? 먼젓번에도 눈구덩이에 넘어져 갑돌이가 업고 왔는데. 즈네 아버지도 없는 데 이 일을 어찌한다?”

봉양댁은 얼른 갑돌이네 집으로 향했다. 마침 갑돌이는 행랑채에서 수돌이와 새끼를 꼬고 있었다.

“갑돌아, 금봉이 집에 없구나. 금봉이 보지 못했니?”

“금봉이가 집에 없다고요?”

‘홀몸도 아닌데. 그렇다면 분명히 이등령을 간 건데…….’

“어머니, 제가 금봉이가 갈 만한 곳을 찾아볼게요.”

평소에 자신을 사위처럼 대해준 봉양댁이었다. 갑돌이 새끼를 꼬다 말고 방에서 나가자 수돌이도 따라 나섰다.

“수돌아, 넌 여기 있어라. 내가 금봉이 갈만한 데를 알고 있으니까 얼른 다녀올게. 둘이 가는 것보다 한 사람이 얼른 다녀오는 게 좋아.”

‘이 녀석이 먼저도 그러더니 또 나를 떼어 놓고 저 혼자 가려고 하네. 아, 정말이지 미치겠네. 제 녀석이 마치 금봉이 서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

“알았다. 얼른 다녀와라. 나 혼자 새끼 꼬고 있을 테니.”

“어머니, 집에 돌아가 계세요. 제가 얼른 다녀올게요.”

“갑돌아, 그 애가 분명 이등령에 갔을 거야. 이 추운 날 또 거기에 갔으면 어떻게 하니?”

“너무 염려 마세요. 제가 얼른 다녀올게요.”

“그래. 고맙다.”

갑돌이는 이등령을 향해 달렸다.

‘금봉아! 안 돼. 너 홀몸도 아닌데 그곳이 어디라고 이 엄동설한에 눈보라를

뚫고 거기에 간 거니? 어서 돌아와.’

갑돌이는 곁에 금봉이가 있는 것처럼 중얼거리며 달렸다. 금방 이마에 땀이 방울방울 맺히면서 얼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금봉아, 네가 비록 박달 도령의 씨앗을 잉태하여도 난 좋아. 네가 나에게 온 다면 그까짓 아이 하나 가진 것쯤은 이해할 수 있어. 그러니 이제라도 마음 돌리고 나한테 와.’

갑돌이 뛰면서도 혼잣말로 금봉이에게 염원(念願)을 전하고 있었다.

자왈, 위선자 천보지이복。위불선자 천보지이화.

공자가라사대.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이 복으로 갚고, 불선을 행하는 사 람은 하늘이 화(禍)로서 갚느니라.

“서방님, 이 식혜 좀 드시면서 공부하세요. 방에만 있지 말고 가끔 바람도 좀 쐬시면서 공부하세요.”

아지는 소반에 시원한 식혜를 한 그릇 받쳐 들고 박달이 들어 있는 방을 찾았다. 마침 점심시간이 지나서 주막에 손님이 뜸했다.

“나 때문에 신경을 너무 쓰는구려.”

“서방님, 그럼 말씀하지 마세요. 지난 일은 다 잊으시고 무조건 과거에 입격만 하시면 됩니다. 저는 이번 봄에 있을 별시에 서방님께서 꼭 입격하실 것을 믿습니다. 아무 생각하지마시고 오로지 입격하시는 꿈만 꾸세요.”

“고맙소. 머리가 지끈거려 바람 좀 쐬려고 하던 참이었소.”

박달은 식혜 한 그릇을 단숨에 비우고 주막을 나섰다. 박달은 방금 자신에게 한 아지의 염원을 듣고 마음이 무거웠다. 이번에는 무조건 과거에 합격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괴롭기만 했다.

‘금봉이 아버님이 만들어 준 미투리인데, 어르신께 은혜도 갚지도 못하고 이리 한양의 마포 나루 주막에서 세월을 보내야 한다니…….’

박달은 신을 신으며 벌말에서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금봉이를 생각하였다. 아지에게 잠시 강가를 다녀오겠다고 하고 주막을 나섰다.

‘어찌하나? 잠시 벌말에 다녀올까? 금봉이 나를 얼마나 원망하고 있을까? 어르신도 나를 나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나는 왜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걸까?’

박달은 한강이 있는 나루터를 향해 걸었다. 한양에 온 지 서너 달이 되도록 한 번도 한강을 구경한 적이 없었다. 거리에는 응달을 제외하고는 눈이 거의 다 녹아 있었지만, 찬바람은 불지 않았다. 날씨가 풀려서인지 거리는 장작과 옹기를 잔뜩 실을 우마차와 장사치들 그리고 한양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니 마포나루가 나타났다. 한강이 얼어 눈이 쌓인 강 위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강을 건너고 있었다. 웬만큼 추워도 얼지 않은 한강이었다. 고기잡이배와 나룻배들이 얼음 속에 갇혀 발목이 잡혀 있어 더욱 한가한 정취를 자아냈다.

한강이 얼마나 단단히 얼었는지 짐을 산더미처럼 실은 달구지도 강 위로 다니고 있었다. 마포 나루 좌우로 초가집과 기와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양지바른 집 앞마당에 아이들이 나와서 제기차기 놀이와 자치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강 건너 길게 이어진 모래사장이 양화진까지 끝없이 이어져 아득하게 보였다. 그때 머리 위쪽으로 한 떼의 기러기들이 남녘을 향해 날고 있었다. 박달은 끼룩끼룩 울며 날아가는 기러기가 부러웠다. 점심때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서 그런지 사방이 어둑해진 것 같았다. 날씨는 아침보다 더욱 풀려 푸근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저 기러기처럼 날개를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금봉이가 보고 싶다. 지금쯤 이등령에 올라 북녘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의 무심함을 탓하고 있을 텐데. 기러기 들아! 나의 답답한 심정을 저 시랑산 아래 벌말에 있는 금봉이에게 전해다오. 이 박달이 한양에서 금봉이가 보고 싶어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다고. 그리고 이번 별시에 입격하면 곧바로 벌말로 달려가겠노라고 꼭, 꼭 전해다오.’

박달은 길 가다 말고 고개를 들어 기러기 떼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남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봉이, 미안하구려. 내 비록 마음에도 없는 여인의 뒷바라지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마음만은 늘 그대에게로 달려가고 있다오. 바보 같은 이 남자를 원망하여도 달게 받겠소. 조금만 더 기다려주오. 이번에는 꼭 입격하여 그대에게 한걸음에 달려가리다.’

박달은 기러기 떼를 보자 더욱더 금봉이가 보고 싶었다. 꾸물거리던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진눈깨비는 다시 비로 변하였다. 금방 마포나루 일대는 질척거리는 거리로 변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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